의무병의 환생 2화
전쟁이 있었다.
제국이 신의 이름으로, 교리에 반하는 일을 벌이는 야만족들을 정벌하겠다는 취지에서 벌인 전쟁이.
그러한 포고 중 ‘야만족’이라 지칭된 건 제국 외의 여러 약소국들이었고, 그건 타국에게 있어 문화와 역사를 짓밟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개인이 대적하기엔 제국은 너무나도 막강한 세력.
때문에 각 나라는 연합을 맺어 제국의 폭리에 저항하기 위한 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제국과 연합국 간의 전쟁.
그것이 셰인이 기억하는 이 대륙의 정세였다.
‘근데 그게 벌써 200년 전의 일이라 이건가.’
역사서를 정독한 셰인이 눈을 감은 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골드리안 가문의 서자 셰인 골드리안?
아니.
아이헨발트의 의무병 카일 페터슨이다.
의료대국이라 불렸던 왕국.
그 휘하 군대에 소속되어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최전선에서 아군의 구출에 힘을 썼던 의사이자 병사.
그것이 태어난 후 8년 간, 귀족가의 서자라는 입장보다 더 되새겨온 셰인의 정체성이었다.
‘그 망나니 황제가 통일을 이룬지도 200년이 흘렀다 이거지.’
역사서를 확인하기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제 조국을 포함한 나라들의 이름은 이 대륙의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전쟁은 제국의 완벽한 승리.
제국은 본래 목표로 했던 ‘야만족들의 정벌’을 끝내고, 대륙의 통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만한 힘이 있는데 통일을 못 하는 게 이상하겠지.’
물량도 강함도 타국과는 비교도 안 되며,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꺾일 리 없는 사기까지 갖춘 상태.
그만한 대군을 겨우 몰아내도 신성력을 통해 치료되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전장으로 밀려들어오기까지 한다.
가히 ‘불사의 군대’라는 이명에 적합한 이들을 어느 누가 대적할 수 있을까?
‘멸망한 건 그렇다 쳐도, 이놈의 역사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아주 가관이네.’
셰인이 마저 책을 읽으며 혀를 끌끌 차대었다.
광기에 찬 광신도들의 진군은 위인들의 무용담으로 바뀌었고, 타국이 이루어낸 성과들도 제국이 이룬 걸로 편입된 게 몇몇 보이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타국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매국노’라 정의될 자식들이었다.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그런 매국노들에게 화를 낼 기력조차도 없는 게 현실이지만.’
책을 내팽개친 셰인이 한숨을 내뱉었다.
200년.
사람의 평생을 아득히 넘어서고, 20년 주기로 이루어지는 세대교차만 해도 10번은 넘는 시간.
그런 마당에 8년이란 시간을 전쟁과 연이 없는 곳에서 지내왔다.
과거에 대한 체념을 가지기엔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지 않겠는가?
‘왕가의 후예였다면야 꾸득꾸득 복수심을 불태웠겠지. 근데 애초에 난 일개 군인이었고…….’
먹고 살 길 찾아 군에 지원하고, 전쟁 통에 정치질에 밀려 후방지원부대로 전락하고, 그러다 성과를 내어 의무부대장의 자리까지 올라버리고만…….
그런 식으로 순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온 자가 바로 카일 페터슨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와서 200년 전의 일에 대한 복수심을 개화시킬 수 있을까?
‘애초에 그 망나니 황제도, 그 놈을 따르는 놈들도 다 죽은 지 오랜데 뭐 어쩌겠어? 그냥 이 망할 제국에서 새 출발이나 준비해야지.’
낡은 감상은 모두 져버리고 내 몸이나 챙기자.
그것이 환생 후 8년이 지났을 무렵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셰인 도련님!!!!"
……저 할망구만 없었다면 그 다짐에 8년이나 걸리진 않았겠지만.
"책 좀 읽으려는 거예요."
"그게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도서관에 있던 셰인을 시종장, 아리엣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짜글짜글한 얼굴.
표독스러운 눈빛.
어른의 정신이 깃들지 않았다면 된통 울음을 터뜨렸을 얼굴이다.
"제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현 가문 내에는 셰인 도련님께서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시는 분들이 존재합니다. 그분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설마 잊어버리신 겁니까?"
‘잘 알고 있죠~’
셰인도 제 처지는 이해하고 있다.
서자인 자신에게도 계승권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런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겐 굴러온 돌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걸.
못마땅한 건 그거 때문에 책 한 권 읽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지.
"당신 또한 명예로운 골드리안 가문의 자손이나, 당신에게 쥐어진 책임은 그리 크지 않은 편입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던 만큼……."
‘빨리 독립했으면 좋겠네.’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뭐하나?
콩고물 좀 더 먹겠단 형제들 때문에 매일매일이 콩가루 대축제인데.
* * *
귀족사회에서 서자란 평민보다도 못한 존재다.
영지민들은 그래도 세금이라도 내지, 그들은 배다른 형제라는 이유로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재산지분까지 가져가버리니까.
가히 밥버러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존재인 만큼, 아비인 가주가 일선에선 물러난 후엔 대개 가문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물론 바보가 아니라면 철들기 시작할 때부터 진로를 준비하겠지만…….
‘문제는 지금 내가 그런 걸 고려할 짬도 안 난다는 거지.’
골드리안 후작가는 제국 최고의 상인가문.
제국 내 시장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일컬어진 상태이며, 정식 후계자가 되었을 때에 따라 들어올 권리는 무시무시하다 할 수 있다.
당연히 태생이 태생이기에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은 하나같이 욕망이 도를 넘은 상태.
실제 가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후계자를 정할 시국엔 유독 가족 내에 돌연사가 자주 일어난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니, 자식들도 하나같이 편집증 증세를 달고 다닌다는 거고.’
뭐든 의심하고, 수틀리면 사고사로 처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가문.
그런 마당에 밥버러지 취급을 받는 서자가 눈에 띠는 행동을 하는 건 ‘나 죽여줍쇼~’ 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정작 이쪽은 후계자 싸움엔 관심도 없지만……. 그걸 알아줄 리는 없을 테니 독립할 때까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지.’
연병장에 들어선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8살.
성장기에 접어들며 몸이 튼튼해지는 시기로, 단련의 난이도를 높여가기 적당한 때이다.
"아, 셰인 도련님 오셨습니까?"
저택 뒤뜰의 연병장으로 향하니 훈련 중인 이들이 반겨주었다.
후작가 휘하의 기사단으로, 그들은 시종장과 달리 한층 누그러진 느낌으로 셰인을 대해주고 있었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은 가문 그 자체.
누가 가주가 되느냐에 관계없이 모두가 지키고 섬겨야 하는 만큼, 서출인 셰인에게도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실상은 아군보다 중립에 가까운 입장이지만……. 뭐, 다른 가문 기사들은 서자 상판에 대고 쌍욕까지 하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겠지.’
가문에서의 8년.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실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검 휘두르는 게 재밌어 보여서 와봤는데, 나도 한 번 휘둘러봐도 될까?"
"견학을 오신 거군요? 그거라면 얼마든지 지도해 드리도록 하죠."
이후 기사단장인 빌헬름이 연병장의 구석진 곳에서 부관에게 검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작은 사이즈의 목검.
빌헬름은 셰인에게 그 목검을 쥐도록 지시하고, 이후 비어 있는 허수아비 중 하나와 마주서게 만들었다.
"그건 그렇고 의외로군요. 도련님께서 검술에 관심을 가지시다니……."
"어쩔 수 없잖아. 뭐라도 하고 싶은데 도서관은 매번 할망구가 막아버리고."
"하하, 검보다 책을 좋아하시는 도련님에겐 아쉬운 일이겠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정은 무슨.’
그런 식으로 남들 배려하니 황실에서 좌천되고 여기로 온 거지.
물론 셰인에겐 좋게 볼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끄는 기사단이니, 자신과 같은 서출도 편견 없이 대해주는 걸 테니까.
"네, 그래요.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허리에 힘을 실어 넣으며 검을 휘두르고……. 오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이야. 도련님. 자세가 아주 좋으시군요!"
목검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단장이 과장된 칭찬을 내뱉었다.
셰인에게 있어선 매우 성가시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야 의사였던 셰인은 전생에서 검을 쥐어본 경험이 적었으니까.
‘반대로 검을 쥔 놈들은 전장에서도 숱하게 봐왔지.’
그때보아온 것들에 비하면, 지금 자신이 하는 게 어린애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걸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쉬운 건 그걸 알면서도 당장은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는 것.
"으아아, 검 휘두르는 거 엄청 힘드네~"
숨을 몰아쉬며 고꾸라지는 시늉.
빌헬름이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아직 도련님께선 많이 어리시고 체력도 떨어지고, 그마저도 유용하게 쓰는 법을 익히지 못했으니……. 아, 괜찮으시다면 제가 단련을 담당해도 괜찮겠습니까?"
‘어휴, 그러면 좋죠~’
반사적으로 애늙은이 같은 반응이 나올 뻔했다.
"진짜로!?"
반가운 소식엔 천진난만하게.
그래, 지금은 이래야 한다.
"하하!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야 얼마든지 해드리죠! 물론 저희도 훈련을 해야 하는 만큼 남는 시간에만……."
"단장님, 슬슬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아, 그래. 금방 가도록 하지."
이내 빌헬름이 셰인에게 양해를 구하며 부하들을 이끌어 벗어날 준비를 취했다.
셰인은 그가 떠나가는 곳을 보다, 자신이 두드렸던 허수아비에 다시 목검을 겨누었다.
"그럼 난 좀 더 두드려볼게."
"후후, 너무 무리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흐뭇히 웃는 빌헬름.
그렇게 그가 자리를 벗어난 후, 셰인이 손에 쥔 목검을 집어 던지며 자세를 잡았다.
‘자 그럼 합법적으로 훈련장 통행도 허락받았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
검을 들 때와는 전혀 다른.
흔히 ‘맨손 격투’를 쓸 때에 취하는 자세로.
-퍼엉!
정권과 함께 허수아비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목재로 이루어진 허수아비에 새겨진 파열의 흔적.
셰인이 그것을 쏘아보다, 저릿한 감각이 감도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8살 몸으로는 이게 한계인가."
더욱이 힘을 집중하자 손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며 근육이 죄여오기 시작했다.
마나.
만물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스며드는 성질을 지닌 무색무형의 에너지로, 이 에너지는 생명이 지닌 ‘의지’에 반응하며 ‘물리력’을 자아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 마나를 이용하면 사물을 띄우거나 부수는 건 물론, 물질에 스며든 마나를 조작해 화학반응 등의 특이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마나를 활용한 현실조작 능력을 마법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최전선에선 마법이 쓸모가 없다는 게 문제지.’
마나를 쓰는 데엔 여러모로 시간이 필요하니까.
불을 지피기 위해선 발화에 필요한 화학반응을, 물을 제어하는 데엔 물의 농도와 부피의 계산을, 바람을 일으키는 데엔 풍향에 관련된 지식을 익힐 필요가 있다.
그런 지식에 더해 마나를 운용하는 시간과 집중, 수식의 설계와 영창까지…….
‘초단위로 생사가 오가는 최전선에서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하겠어?’
그렇기에 최전선에서의 마나사용은 현실조작이 아닌 순수한 물리력만으로, 그 중에서도 위력과 범위보단 견고함과 속도를 높이는 방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바.
대표적으로 기사의 경우 전위에서 든든한 벽이 되어야 하니, 마나로 제 신체를 최대한 견고하게 만드는 식으로 운용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방어에 중점을 두는 건 의무병 역시 마찬가지.
일단 살아 있어야 최전선에서도 사람을 살리고 구할 수 있으니, 구조를 담당하는 자들은 무장을 단단히 굳히고 방어술을 연마해야만 한다.
‘내가 의무부대 대장을 맡기 전엔 그랬지.’
과거, 카일 페터슨은 자신을 따르는 부대원들에게 견고함이 아닌 ‘속도’를 중시하라고 말했다.
초단위로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려면 그 누구보다도 빠를 필요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속도 하나를 높이고자 무기와 갑옷마저 내버리고, 그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호신술을 창안해 제 부하들에게도 전수했었다.
"설마 머리 커지는 게 싫다고 호신술 단련하는 것까진 막겠어?"
지금부터 셰인이 연마할 건 의무병들의 기본 소양 중 하나.
순수한 물리력과 무투만을 이용한 호신기인 ‘마투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