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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4화 (4/255)

의무병의 환생 4화

높게 잡아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제 아비를 ‘아비의 친우’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게 된 듯하였다.

물론 친구의 자식이라고 한들 서열상으론 위. 셰인의 아비인 골드리안 후작이, 라인하르트 공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골드리안 가문의 현 가주, 아놀드 골드리안이 라인하르트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깍듯한 인사에 공작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연장자가 예의를 취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되었어도 그 역시 입장이 있는 상태. 곧 긴장하는 기색을 지운 라인하르트 공작이 후작과의 대화에 임하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10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꽤 달라지신 듯하군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요. 나이도 나이인지라 슬슬 후계자를 정하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헌데……. 전하께선 10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늠름해지신 것 같군요."

"철없는 어린아이조차도 책임을 느끼면 성장하게 마련이죠. 아, 이렇게 밖에만 있을 순 없으니, 얘기는 안에서 마저 나누도록 하죠."

이후 성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뒤따르는 사용인들.

나아가는 중, 라인하르트 공작의 시선이 슬쩍 셰인에게로 향해졌다.

"너구나, 이번에 선을 보게 된 아이가."

"…셰인 골드리안이라 합니다."

"그래, 모쪼록 그 아이가 마음에 들길 바라마."

부드러운 웃음.

그를 마주한 셰인은 께름칙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군.’

군에 있었을 적, 정치싸움에 밀려 출세와는 거리가 먼 후방지원부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 다시 장교의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과거가 있기에 제 감정을 숨겨대는 이들을 썩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이 들었지만.’

그런 식으로, 그를 따라 귀빈실에 도착하니 선객이 한 명 자리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라인하르트 공작이 그를 지목하며 말했다.

"이쪽이 이번에 선을 보게 될 아이입니다."

은빛이 흐르듯 뻗어진 머리카락.

그 뒤편의 큼직한 리본과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는 귀족으로써의 귀티와 더불어, 소녀다움을 한층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세,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세실이라고 불러주세요."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상당히 긴장한 기색.

검술가의 자식임에도 당당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누가 보더라도 소심한 아가씨의 인상이었다.

"콜록……."

돌연히 기침을 내뱉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뚝, 셰인이 멈춰선 때에 라인하르트 공작이 의문을 표했다.

"세실, 왜 그러느냐?"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흐뭇이 웃는 라인하르트 공작.

그런 부자관계를 지켜보는 셰인의 표정이 심히 굳어져갔다.

‘저 애 혹시…….’

불길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생각했던 정치적인 이유와는 거리가 먼…….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길한 예감이.

"영애 분께서 못 본 새에 어여삐 자라셨군요. 셰인과 나이가 같다고 들었습니다만……."

"잘 됐군요. 같은 10살이니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을 겁니다."

"그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셰인은 검술에 취미가 붙었기에 영애님과 어울릴 수 있을지는……."

"하하, 저희 가문이 어떤 곳인지 잊으신 겁니까? 이 가문에선 남녀노소를 구분 짓지 않고 모두 가문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영애님도 검술에 대한 조예가……."

한창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셰인의 시선은 오롯이 세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뚜렷한 시선.

그를 맞닥트린 세실이 어쩔 줄 몰라 하다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듯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끅끅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전에 내뱉었던 것과 같은 기침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꿀꺽.

침을 삼킨 셰인이 제 아비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잠시 세실 아가씨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어도 괜찮겠습니까?"

"둘이서 말이냐?"

돌연히 이어진 물음에 잠시 대화를 멈춘 골드리안 후작.

셰인이 제 얼굴에서 심각함을 지우고, 평소대로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없는 편이 두 분이서 얘기를 나누기에도 편할 것 같아서요."

단순한 핑계지만, 그들에게도 나쁠 건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애초에 이 자리를 마련한 건 두 가문의 정치적인 목적 때문일 테니까.

잠시 공작과 시선을 교환한 골드리안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너희 둘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온 것이니, 한 번 단둘이 얘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허락이 떨어졌다.

셰인이 곧 세실에게 다가가고, 그녀의 손을 잡아 걸음걸이를 부축해 주었다.

"세실 아가씨. 괜찮다면 방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으로……. 말인가요?"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습니다만……."

"아, 아뇨! 괜찮아요!"

잔뜩 긴장한 듯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세실.

셰인은 그런 태도에 개의치 않고 자상히 웃어주었다.

"그럼 안내를 부탁하겠습니다."

숙여진 고개의 밑으로 뻗어지는 손. 그를 눈에 새긴 세실이 손을 뻗길 머뭇거리다, 이내 양손으로 잡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허허, 참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군요."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의 흔적을 쫓은 골드리안 후작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대로 라인하르트 공작의 얼굴에 그려진 건 근심.

그 시선에 어린 걱정은 제 딸이 아닌, 떠나가는 소년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셰인은 세실과 달리 어른스러운 면이 보이는군요."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한 면이 있는 아이죠."

만족스레 찻잔을 들이키는 골드리안 후작.

이후 웃음이 거두어진 자리엔 씁쓸함이 남았다.

"그렇기에 더욱이 안타깝습니다. 영리함을 타고났음에도, 서출이라는 인식은 저 아이의 삶에 꼬리표마냥 뒤따라올 테니……."

아비된 자로써 그런 아들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런 아이와의 혼담을, 굳이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와 주선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질리언."

침묵 끝에 가라앉은 목소리.

그것을 기점으로 이 자리는 귀족과 귀족이 아닌, 친우의 아들을 대면하는 연장자의 심문자리로 뒤바뀌게 되었다.

질리언 역시 아놀드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말씀하시죠."

"굳이 셰인과의 혼담을 주선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세실은 너의 유일한 딸이라 알고 있거늘……."

"네, 알고 계신 대로 세실은 현 가문의 계승권을 가진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둘 모두가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 부인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차이점은 각 가문의 가주가 첩을 들이는 데에 붙은 제약이다.

골드리안 가문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첩을 들이는 데에 자유롭지만, 라인하르트 가문은 혈토을 이을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재혼, 혹은 첩을 들일 수가 없다.

무의 길을 거니는 자가 여색과 권력에 미쳐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기에.

즉 앞으로도 세실이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란 것이며, 그녀에게서 계승권을 양도받을 반려가 공작가의 모든 걸 쥐게 된다는 것이다.

"그 기회가 얼마나 중한지 알고 있을 터인데, 굳이 이 자리를 주선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단순히 골드리안 가문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로 그걸 위해, 명예로운 가문의 가주자리에 귀족사회의 하찮은 존재를 앉히려는 것인가?

진중한 추궁 끝에 질리언이 힘겨이 말문을 열었다.

"……늦기 전에 후계자를 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라면 굳이 서자가 아니더라도 선을 볼 자들은 넘쳐날 터인데……."

말을 이어가던 골드리안 후작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해졌다.

질리언의 손이 틀어쥐어져 있다.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주며.

무언가를 깨달은 골드리안 후작이 찻잔을 내려두었다.

"남들에게 알려져선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인가?"

"……."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친우의 아들에게서 느낀 절박함.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앞날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 *

귀족가의 영애란 보통 사교나 내조를 중점으로 교육을 받기 마련.

하지만 라인하르트 가문에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문의 일원 전원이 한 명의 검사로써 여겨져야만 한다.

그건 어렸을 적부터 검술훈련을 받은 세실리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런 교육을 받은 소녀조차 예상외의 사태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옷 벗어봐."

지금이 그랬다.

"……네?"

세실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방에 도착하기 무섭게 정중한 태도를 접은 상대의 말에.

"방금 뭐라고……."

"옷 벗고 침대에 앉아보라 했어."

다시 들어도 마찬가지다.

남들의 눈이 사라지기 무섭게 돌변한 강경한 태도.

세실이 자존심이 강했다면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셰인이 생각한 세실은 소심하고 자기주장이 약한 아이였다.

빠른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그런 태도를 파고들 필요가 있을 터.

그런 이유로 행한 강경한 태도에 세실이 내비춘 건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침실에서 옷을 벗으라니, 설마 그건가요!?’

아무리 검을 배운 몸이라 한들 아직은 10살의 어린아이.

당연히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그 민감함은 대개 주변에 전해들은 이야기에 낭만을 부풀리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일라이에게 들었어요. 남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주님께서 황새를 보내 아이를 내려주신다고……!’

시종이 들려준 건 어디까지나 은유적 표현이지만 어쨌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부끄러운 이야기인 건 마찬가지다.

알몸으로 잠을 자는 모습을 신께서 지켜보신다니. 그런 건 당연히 신중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저기……. 그런 건 좀 더 나이를 먹고 난 후에 하는 거라고 들었……."

"겉옷만 벗어보라는 거야."

물론 셰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겉옷……만?"

"숨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거니까. 등에 귀만 댈 수 있으면 돼."

"……."

"……혹시 곤란해?"

"아, 아뇨. 괜찮아요……."

세실이 그리 말하곤 자신의 웃옷에 손을 올렸다.

일체형 드레스.

벗어버리면 바로 속옷이 드러나지만, 그걸 배려해서인지 셰인은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배려에 우물쭈물하던 세실이 이내 간소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얇은 민소매의 블라우스.

노출이 심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꽤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성에게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옷을 보여준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서방님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에요. 조금 정도는…….’

눈을 질끈 감은 세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좋을까.

셰인이 그 뒤에 자리를 잡고, 등부분에 오므린 손을 가져다 대었다.

"크게 심호흡을 해봐."

"네, 넷!"

숨을 들이쉬는 세실.

셰인은 제 손이 뭉쳐진 부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역시.’

숨소리를 들은 셰인의 표정이 왈칵 우그러졌다.

숨소리 사이에 들려오는 카르륵, 카락 하는 소리.

마치 가래라도 낀 것 같다.

단순한 목감기?

아니, 일시적인 증세라면 입술과 귀 부근에 ‘희미한 푸른빛’이 띠진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과 화장에 가려져 있어 구분이 어렵지만, 분명 호흡곤란에 의해 발생하는 청색증이야.’

체내에 흡수되는 산소가 줄어들어 피부가 파랗게 변색되는 현상.

일시적인 감기로는 절대로 나올 리가 없는 증세다.

"콜록, 콜록!"

호흡 중 기침을 하는 세실.

그 등을 다독여 주었지만, 기침이 멎었을 때 세실의 얼굴에 그려진 건 다름 아닌 당혹이었다.

"아, 저 그……."

죄책감, 그리고 공포.

마치 들켜선 안 될 걸 들킨 사람의 반응이다.

셰인이 찝찝함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 가족 중에 병에 걸린 사람 있었어?"

"병…… 이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 그냥 아무거나, 기억나는 걸 얘기해줬으면 해."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거사’를 치르는 건 아닌 듯했지만, 아직도 숨을 내쉬라는 이유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이대로 휩쓸리기만 하는 것은 가문의 위신을 더럽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하지만 장난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해.’

분명 자신과 같은 나이대의 아이라 여겼거늘, 그에게선 왠지 모를 어른스러움이 느껴지곤 했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나 가문 소속의 기사들처럼.

그에 신뢰를 느낀 세실이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외조부님께서 병세가 약화되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들었어요.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고…."

"외조부? 어머니께선?"

"……잘 모르겠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에 세상을 뜨셨다는 것만 알려주셔서."

할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예상컨대, 그들 모두가 이 소녀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셰인이 이내 진단결과를 들려주었다.

"세실. 혹시 천식이라는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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