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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6화 (6/255)

의무병의 환생 6화

"정말로 괜찮겠나?"

성 밖에서 배웅하는 자리.

잠시 기사와 사용인들에게 자리를 비워 달라 말을 한 뒤, 아놀드가 질리언을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질리언이 대답하길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상대가 있을지도 모르지."

"권위가 있는 이들은 안 됩니다."

현 제국에 있어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

그 숭고함을 거부하는 존재란 이단으로 취급되게 마련이다.

가문의 힘으로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그런 불길한 소문이 떠도는 것까지 억누를 순 없다.

그런 상황에 권위를 가진 반려의 입을 틀어막는 게 쉬운 일일까?

"골드리안 가문이라면……. 논란이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모두가 인정해 주겠죠."

"그래, 선조들이 일궈둔 것이 많으니 말이야."

후작가 골드리안.

라인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설립부터 존재했으며, 제국의 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알려진 역사와 수완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다.

그 위상이 얼마나 큰지는 골드리안 후작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치열히 싸웠는지도.

"그렇게 일궈둔 것이 얼마나 많은 피로 쌓아올려졌는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현 후작 역시 그런 피바람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자.

그런 그가 제 피를 이은 자식들을 말릴 자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셰인은 아니다.

그 아이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순수한 열정과 소망을 빚어내 만든 결과물이었으니까.

"질리언. 나는 저 아이가 우리 가문과 멀어졌으면 하네. 설령 가문을 물려받을 일이 없다 해도, 그 사이에서 나와 같은 광경을 보지 않았으면 하네."

세간의 인식은 아무래도 좋다.

그에게만은 셰인은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히 여길 존재였으니.

"그 목적을 위해 그대의 딸을 이용해도 되겠는가?"

"……."

질리언이 조용히 성으로, 셰인과 세실이 남아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말한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그는, 그 소년이 이 가문에 어울리는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엄중히 진행될 예정이다.

제 목적에 딱 부합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곤 하나, 그 조건조차 제국의 세 개 뿐인 공작가를 이어받는 책임과는 비할 바가 못 되니까.

그러니 제 욕심에 세간의 시선에 가문이 오명을 쓴다 하더라도, 그 시선마저 어찌 못할 정도로 그 아이를 철저히 가문에 걸맞는 인재로 길러내리라.

"부디 제 딸아이의……."

그런 투자에 질리언이 바라는 것은 단 두 가지.

"제 딸의 한때뿐인 추억을 위해, 당신과 같은 아픔을 저 아이에게 쥐어주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딸아이의 행복.

그리고 후세에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

그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골드리안 후작이 씁쓸히 말하며,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것이 저 아이의 미래에 큰 힘이 되어준다면 기꺼이."

신분에 구애되어 솔직하지 못했던 관계.

야속한 천명에 의해 이어가지 못한 사랑.

그에 대한 속죄가, 천한 출생으로나마 세상을 거머쥐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 * *

"그, 그럼 성을 안내해 드릴게요!"

후작이 떠났을 무렵, 세실은 셰인을 데리고 성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나아가는 성은 본가보다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소.

장식은 다소 떨어지긴 하나, 검술가라는 역할에 걸맞게도 엄숙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성을 누비는 곳곳에 자리한 사용인들과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세실이 지나칠 때마다 그들은 세실에게 예의를 다하였고, 세실 역시 그들의 인사와 호의를 하나하나 받아들였다.

‘공작가의 아가씨라면 더 거들먹거려도 될 텐데.’

가문의 교육이 투철해서인가?

아니면 세실 본인의 성향?

‘아마도 후자겠지.’

세간에서 저주라 불리는 선천적 질환의 보유자인데 어찌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콜록."

기침을 하는 세실.

셰인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세실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내 앞에선 심하게 안 참아도 돼."

"아, 그……."

세실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마워요."

더욱이 꽈악 틀어쥐는 손.

그것으로나마 안심이 되면 좋다, 생각한 셰인이 세실에게 조용한 장소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기사가문에서 가장 발길이 드문 장소 중 하나로.

"여기가 성의 서고예요."

이윽고 도착하게 된 곳은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서고.

검술가여서인지 본가보단 규모가 작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도서관과 비등한 수의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책을 원 없이 볼 수 있게 됐군.’

적어도 여기선 일과만 지키면 시설의 출입은 자유로우니까.

물론 검술가인 만큼 있는 책들은 대개 검술관련의 교본이지만, 본래 교본이란 몸의 사용법과 그 공략법에 대해 적어둔 것이다.

의료가 의미를 잃은 시대에도 ‘인체학’의 발전은 엄연히 이루어진다는 것.

셰인의 전공이 외과임을 생각하면 더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잘 됐군.’

이곳에서의 생활은 분명 큰 의미로 다가오리라, 생각하며 책들을 둘러보자 세실이 셰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저기……."

"……왜 그래?"

셰인이 잠시 책에서 시선을 거두고 세실을 돌아보았다.

우물쭈물하는 세실이 살짝 고개를 치켜세우며 수줍게 속삭였다.

"서, 서방님……?"

"……."

잠시 침묵.

뒤늦게 자신을 부른 것임을 깨달은 셰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아직 약혼 안 한 거 알지?"

"네, 네. 그래도……."

"그냥 셰인이라고 불러. 존대도 하지 말고."

10살에 서방님은 무슨.

지금 나이대에 그런 걸 입에 담아야 할 상황은 소꿉놀이를 할 때뿐이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어쩌면 이 가문을 이을지 모르는 분에게 말을 놓는 건……."

하지만 이 어린 아가씨는 현 가문의 유일한 계승권을 가진 자.

그 계승권을 물려줄지도 모르는 이를 소홀히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셰인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마저 대답했다.

"그럼 그냥 말은 놓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줘."

"네, 그럼 이름으로……."

세실이 수긍하다 슬쩍 대답했다.

"셰인 님?"

"……님도 빼."

서자와 공작가의 영애사이.

오히려 이쪽에게 존대하라 명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지만, 극도로 자신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세실은 셰인의 손에 쥔 책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

동화책과 같은 그림하나 그려져 있지 않지만, 셰인은 그것을 능숙히 읽어가고 있었다.

펄럭, 펄럭.

"……셰인은 저랑 동갑이죠?"

돌연히 이어지는 물음에 셰인이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조금 찔리는 물음.

하지만 세실의 눈에 그려진 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거야?"

"아, 그……. 천식이라고 했죠? 셰인은 그런 걸 어디서 들은 건가요?"

"주입식 교육."

"……네?"

"그런 게 있어."

의학에 대해 배울 적엔, 빈 말 없이 사흘에 한 번 씩 백과사전급 두께의 서적을 정독했었다.

그 정도로 하지 않으면 못 배워먹는다고 스승이 늘 바가지를 긁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에 배워둔 거랑 근본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네.’

어디까지나 응용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고대인이라고 해서 지식을 배우는 데에 무리가 없는 건 다행으로 여길 일이었다.

‘외과 쪽은 급하게 공부할 정도는 아닌가.’

그래, 지금은 다른 것부터 우선시 하자.

이를테면 제 앞에 있는 아이와의 신뢰를 쌓는다거나 하는 일을.

"책 읽는 거 좋아해?"

"아, 네! 좋아해요!"

책을 책장에 넣어두며 묻자 세실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에게 무언가 물어봐준 것이 기쁜 것일까?

서고를 뒤적이는 게 능숙한 것으로 보아, 단순 장단을 맞추는 건 아닌 듯했다.

"그……. 저는 쓰러지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일라이에게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자주 읽어달라고 해요. 아, 일라이는 제 전속 시종인데……."

책장 사이를 누비는 중 들뜬 듯 말을 이어가는 세실.

책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검술가 가문의 아이가 그런 취미를 가졌다는 점에 착잡함이 느껴졌다.

호흡이 가빠져 제대로 검을 쥐지 못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니까.

괜스레 동정심이 들 무렵, 세실이 책 한 권을 셰인에게 내어주었다.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한 번 읽어보실래요?"

내어준 것은 전기를 바탕으로 한 위인전.

세실이 속해있는 라인하르트 가문에 소속된 위인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존재했던 시기는 200년 전.

제국이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정복전쟁이 활발히 벌어진 때였다.

"……."

셰인이 말없이 책을 손에 쥐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은 제국 설립 때부터 존재했던 가문.

제국의 정복 전쟁을 주도했다는 건 이미 확신한 상태였다.

그 시대의 영웅들이 지금 이 때에도 숭배 받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런 책들은 대개 개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역사서를 처음 접했을 때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 읽어볼게."

환생 후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인 상태였다.

아무리 그때의 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진다 한들, 그 시대의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마당에 전쟁에 느꼈던 감정을 가져오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

느끼더라도 과거의 감정을 곱씹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그런 셰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소녀가 철없이 웃었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지.

셰인은 피식 웃으며 제 손에 쥐어진 책을 펼쳤다.

제국의 시점에서 쓰인 옛 영웅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

* * *

볼레로 라인하르트.

그는 제국을 지지해 온 세 가문 중 가장 명예로운 가문인 라인하르트의 21대 가주이자, 성전 당시에 그 누구보다도 전장의 선두에서 공훈을 쌓아온 자였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그의 검 앞에선 모두가 평등히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진군은 꺼지지 않으니, 제국이 징벌하는 야만인들조차도 그를 ‘제국의 심판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기에 바빴다.

그런 그는 전쟁이 끝이 난 후,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강철의 골렘을 쓰러트리고, 거대한 용의 목을 도려내거나 환술을 부리는 이들을 뚫고, 사람의 몸을 산 채로 도려내는 부두의식을 벌이는 이들을 정벌하는 등등…….

하나같이 뛰어난 무훈이었지만,

그 이야기들 중 볼레로 본인이 가장 인상 깊다 여긴 사건은 한 협곡에서 벌어진 사투였다.

* * *

‘……협곡?’

잠시 책을 읽는 손을 멈추었다.

200년 전.

정복전쟁에서 활동했던 위인전.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와 협곡.

하나같이 익숙함이 느껴지는 요소들이 아닌가?

* * *

황제는 협곡에서 패퇴하는 야만인들의 추적을 명하였고, 제국의 검이라 불렸던 볼레로 역시 그 말을 따르며 그들의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앞선 추격대와 합류했을 때에 마주했던 건 참혹한 광경.

다름 아닌 한 야만인의 손에 그들 모두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야만인들 중에도 그대와 같은 전사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군.’

처음 그 야만인을 대면했을 때, 볼레로는 그를 향해 감탄과 멸시를 섞어 말하였다.

경의를 표한 건 어디까지나 힘 뿐. 그 힘으로 야만적이고 불경한 짓을 행한다면, 결국 그 또한 황제의 명 하에 척살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더욱이 경멸스럽게 여겨졌던 건, 이후 그 남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데에 썼던 말이었다.

‘나는 전사가 아니라 의사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요.’

* * *

"왜 그런가요, 셰인?"

"……."

"……셰인?"

셰인을 지켜보는 세실이 불안한 듯 몸을 떨었다.

그 시선을 느꼈음에도 셰인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셰인 골드리안이 아닌 전생의…….

카일 페터슨으로써의 기억을 투영하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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