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8화
평화의 시대에도 검술을 연마하고, 그 성과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이들은 존재하고 있다.
질리언 라인하르트.
그는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의 가주로써, 그 가문이 다져온 모든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 자와 고작 10살짜리 아이의 대련이 정녕 성립될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디까지나 네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가늠할 뿐이니."
연병장에 도착한 질리언이 셰인을 타이르듯 말했다.
가문 소속의 기사들은 훈련시간이 끝나고 이미 벗어난 상태. 노을빛을 받으며 뒤따르는 셰인의 태도는 조금 소극적으로 변해있었다.
"아무리 봐주신다지만 그래도 긴장이 드네요."
반쯤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전생에 군인이었다 한들, 자신이 앞둔 것은 현 시대 최강이라 여겨지는 검사였으니까.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너에게 해를 입힐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씀은……. 제 공격을 일방적으로 맞아주시겠다는 건가요?"
"아니, 막고 흘리는 거지."
아무리 어린아이라곤 하나 무작정 공격하면 한 번쯤은 얻어맞게 마련.
그럼에도 그 공격을 모두 흘리겠다 자신하는 건, 그 말을 듣는 자를 얕잡아본다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다.
‘상대가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선 흔들림 없는 지조가 있어야 하니.
그렇기에 지도자란 오만한 태도로 상대에게 모욕을 줄 지언정, 그마저도 용납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갖출 필요가 있다.
그가 제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면 도리어 가주자격이 없다 조롱했으리라.
"일단 처음이니 네가 자신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볼 필요가 있겠지. 자, 대련에서 쓸 무기를 마음껏 골라 보거라."
창고에 도착한 질리언이 셰인에게 진열대를 보여주었다.
장검부터 대검, 소검, 그 외에 시미터와 같은 곡도나 레이피어같은 세검도 존재하고 있다.
구석이지만 창이나 도끼 같은 검 외의 무기들도 자리한 상태.
최근에 써본 듯 날과 손잡이엔 모래먼지가 적잖게 묻어나 있었다.
"언젠가 이 무기들을 전부 다 다뤄야 하는 건가요?"
"우리 가문은 기본적으로 모든 무기를 써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단다. 훈련으로 쓰게 될 건 가검이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모든 무기를 다 다뤄본 후,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를 성인식 뒤에 선택하는 거지."
성인식.
즉 19세가 되기 전까진 현존하는 무기를 대부분 다뤄본단 것이다.
‘하나만 파고드는 게 능률이 높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정한 룰 하에 이루어지는 경기에나 성립되는 거지.’
평화의 시대라곤 하지만 가문의 검술은 전통 계승의 의미 역시 존재하며, 그 계승에는 한때 전장에서도 구사한 ‘실전무술’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전장에서 상대하게 될 적들은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검을 상대하는 데에만 익숙해진 상태에서 창을 쥔 자를 마주한다면?
방어술에 능숙한데, 그 방어를 깨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망치를 휘둘러온다면?
그저 검만을 휘둘러선 그 대처법을 습득하기란 쉽지 않으니, 전장에 서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양한 무기를 접해볼 필요가 있다.
그건 한때 카일이 부하들을 가르칠 때에 작성한 교본에도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먼저 네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를 골라보도록 하거라."
‘맨손인데요.’
반사적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억누르고, 근처에 눈에 익은 무기를 들어올렸다.
단검 한 자루.
근 2년 간 검술을 배울 때에 가장 익숙히 사용한 물건이다.
질리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본가에서도 대련할 때에 그걸 쓴 거니?"
"네, 뭐……. 이게 제일 잘 맞았거든요."
맨손전투를 지향하는 셰인에게 무기란 장식이나 다름없는 것.
그럼에도 무기를 휘두른다면, 그럭저럭 가벼운 걸 쓰자는 마음에서 선택한 무기였다.
하지만 질리언은 셰인의 사정을 모른다.
‘그래, 아이이니 쉬운 길을 택하고 싶기도 하겠지.’
기껏 해봐야 아직 10살.
가검이라곤 해도 금속으로 이뤄진 무기를 휘두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가벼운 무기를 선호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런 얄팍한 마음은 가문의 후계자에겐 도리어 독이 되는 것이다.
"……그렇구나."
물론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시험. 고치는 건 이 시험을 끝마친 후의 과제로써 여겨야 할 테니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네가 마음대로 공격하기만 하면 된단다."
"반격은 안 하신다 하셨죠?"
"이 원에서 나가지도 않을 예정이지."
드르륵.
연병장에 선 질리언이 가검의 끝으로 모래밭에 원을 그렸다.
"제한시간은 네가 포기할 때 까지. 체력이 떨어지건, 더 이상 해도 의미가 없다 생각하건 네가 원하는 때에 시험을 중단하도록 하마."
한정된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한다.
치욕스럽기보단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천성이 군인이었으니 강자와의 싸움에 긴장과 기대돼서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더 신경 써야 할 게 있었다.
"테스트를 하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대련이 끝난 후에 하게 될 훈련은 세실도 함께하는 건가요?"
"하하, 세실이 마음에 드는 거니?"
"싫어하진 않아요."
환자를 싫어할 거면 의사 따윈 때려치워야지.
그런 퉁명스런 대답조차 질리언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초면에 그 정도라면 앞으로 좋아질 여지가 있겠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함께 훈련을 하는 건 어려울 거란다. 세실은 개인적으로 단련시켜주는 교관이 있으니까."
"……."
셰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질리언은 내심 셰인이 세실을 마음에 들어하기에,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지는 데에 아쉬움을 느낀 거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지금 셰인은 소년기의 풋풋한 감정놀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몸이었다.
"그 사람도 세실의 지병을 알고 있나요?"
움찔.
가검을 쥔 손이 움츠러들었다.
아주 잠시였다.
"……그 아이에게 들었구나."
"일단은요."
사실 직접 알아낸 거지만.
그 뒷말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선천적으로 기침이 자주 나왔다고 들었어요, 그게 심해지면 발작이 일어나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런 몸으로 훈련을 하는 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그래, 아비 된 자가 딸의 병에 관심이 없을 리 없지.
세실도 그를 신뢰하는 만큼,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정치에 미친 귀족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실에게 혹된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셰인."
질리언이 잠시 검을 거두고 설명을 해주었다.
"세상에는 간혹……. 고칠 수 없는 병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단다. 제국에선 그것을 ‘저주’라고 부르지."
그건 셰인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의외인 것은 제국의 3기둥이라 불리는 가문의 가주가, 그 교단을 입에 담은 순간 회의감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신이 내려주신 기적은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니……. 허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은 천성부터가 부정하게 타고났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죄라고 정의하는 일이니,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경계해야만 한다."
교단의 가르침을 내뱉은 입에, 그 겉 부분이 우그러지며 그려지는 초연한 미소.
"그럼에도 교단에선 그걸 시련으로 여기고, 그걸 극복하여 성과를 올린 자들도 적게나마 존재한단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한 이들마저 부정할 정도로 이 세상은 가혹하지 않지."
선천적으로 눈이 멀었음에도 성녀로 추앙받은 자가,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함에도 황실의 내무대신 자리에 앉는 일도 있다.
태생의 불합리함을 극복해낸다는 건, 세상을 부정하는 이들에겐 크나큰 희망으로 다가오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포교수단이지.’
무너진 하늘에도 솟아날 구멍은 생겨나고, 그로부터 비추는 광명은 구렁텅이 속의 생물들에게 절벽을 오르는 열정을 이끌어내는 법.
언제나 없는 자들의 반발을 억누르는 것은 더 큰 억압이 아닌, 억압 속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희망이었다.
그런 식으로 있지도 않은 부정을 극복하라는 현실이 짜증날 뿐.
적어도 의사의 시점에선 그렇다.
"그러니 세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무리하게 단련시킨다는 건가요?"
"그래, 그 아이가 라인하르트 가문의 검술을 완벽히 연마한다면, 그 아이가 어떤 저주나 병을 앓고 있건 세상이 받아들여 줄 테니 말이다."
"……."
"……탐탁지 않아 보이는구나."
질리언이 망설임 끝에 말했다.
그걸 단언하지 않고 자신의 의중을 묻는 건……. 아마도 그 역시 흔들리기 때문이겠지.
가문의 전통이건 종교적 관념이건 제국의 역사건, 그 모든 것은 결국 남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니까.
"아뇨,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가족을 잃는 미래는 강인한 전사조차 미치게 만드는 법.
그런 그를 이해하며 대답했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종교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걸 거스르지 못하면서도 딸을 아끼는 아비의 마음이 빚어낸 혼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 못 할 건 하나도 없었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런 무지를 깨닫고도 고집을 부리는 거지.
그를 비난하려면, 일단 그가 모르고 있는 부분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령 긴 시간을 들인다 해도……. 의학이 절멸적인 이 시대엔 그런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그저, 세실이 하는 훈련법을 달리 해주면 어쩌나 싶어서요."
"훈련법을?"
"그야 이제껏 가문을 계승해온 후계자들과는 다른 조건에서 시작하니까요. 그걸 그대로 따르는 건 여러모로 불합리한 거잖아요?"
성별, 투자한 시간, 혹은 익혀온 비전…….
거기에 공정함을 논하는 것도 몸이 멀쩡해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다리가 없는 자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말을 하듯.
천식환자에게 검술을 연마시키는 데엔 절대로 공정함을 논해선 안 된다.
"세실에겐 더 적절한 훈련법이 있을 거예요."
하다못해 상태가 호전될 때까진.
이 가문이 중시하는 전통을 위해서라도 단련방식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잠시 지식의 습득을 멈추고 단련과 마나의 제어법을 터득했던 것처럼, 하다못해 그 우선순위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 훈련법을 세우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겠지. 공교롭게도 우리 가문은……."
"아뇨, 저는 알고 있어요."
셰인이 지금 하는 말은, 그에 필요한 ‘유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고 있다니, 네가?"
"지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일단 하나만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당장은 세실에겐 제가 생각한 훈련법이 더 맞을 거예요."
질리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식 약혼자는 아니지만 아비의 친우인 자의 아들.
그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몇 년 간 그를 ‘양자’처럼 대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말은 모욕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건 간과하기 어려운 말이로구나. 셰인, 세실은 병약하다 한들 가문의 검술을 계승받은 후계자란다. 그런 아이를 네가 가르칠 수 있다니……."
마치 이 가문의 가르침이.
그 가르침을 받아온 아이가, 지금 제 앞에 있는 소년보다 뒤떨어진다 는 것처럼 들렸으니.
"……입으로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그리 도발한 셰인이 조용히 단검을 치켜세웠다.
말보다는 행동.
평생을 몸을 구르며 살아온 셰인에겐 이쪽이 더 익숙한 일이었다.
"기세가 좋구나."
그 호기 있는 태도에 질리언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다. 이번 대련에서, 만약 네가 나에게 '한 번이라도 공격을 맞춘다면' 네 뜻을 따르도록 하마."
조건은 처음과 다르지 않다.
작은 원에서 나가지도 않고, 이쪽에선 반격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건 각오.
질리언은 자신이 구애될 페널티 속에서도, 그 어떤 때보다도 진심으로 임해 상대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호기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그 깨달음에 절망감을 녹여 앞으로의 삶에 각인시켜주기 위해.
‘…걱정마라 애송아.’
하지만 질리언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도발이 바로 그 반응을 유도하기 위함이란 걸.
‘나도 공격을 맞추는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건 단순한 대련이 아니다.
이곳에서 지낼 몇 년 동안 자신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사투.
단검을 쥔 손에는 그에 대한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고, 셰인이 그를 향해 단검을 들며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대련이 시작된 후 5초가 지난 뒤.
-콰앙!!!!
질리언의 전력을 다한 저항이 셰인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