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1화
성에서 지낸지도 언 1년.
안면을 트고 지낸 사용인과 기사들은 여럿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시종복의 여인은 기억에 남질 않았다.
흑발이라는 제국에서 이질적으로 여겨질 머리색에,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그어진 흉한 상처가 나있음에도 말이다.
‘저만한 상처가 기억에 안 남는 게 용하네.’
그만큼 존재감이 옅은 걸까?
아니, 은밀함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의 손에 있는 상처들이, 결코 가사노동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가진 확신이었다.
"반가워요 일라이 씨. 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죠?"
셰인이 곤두세워진 경계심을 죽이며 인사를 건네었다.
일단은 제 쪽이 이 성의 손님으로 오지 않았는가? 상대가 사용인이라면, 서열상으론 자신이 위이니 결코 꿇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적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지만…….
"……."
정작 일라이는 셰인을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할 뿐.
눈살을 험상궂게 찌푸린 얼굴에선, 이제껏 마주했던 시종들의 호의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벌레라도 보는……. 그런 경멸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얼굴.
"저기……."
"세실 아가씨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입을 열기 무섭게 일라이가 말했다.
"아가씨의 훈련은 이제까지 제가 지도했습니다. 도련님께서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 네……."
"……."
그 후 일라이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욱이 협소이 뜨여진 눈.
그로부터 감정이 도드라진 것을 느꼈지만, 정작 셰인의 입장에선 어이없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세실을 가르쳤는데 뭐 어쩌라고?
뜬금없이 이어진 말에 셰인이 답답함을 느꼈다.
상대에게 추측을 요구하는 화법을 마주한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혹시 못마땅하신 건가요?"
"무엇이 말인가요?"
"그, 제가 세실의 훈련을 도맡게 된 거요."
눈빛이 사나운 것도 그렇고, 당장 추측하자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주님의 뜻이라면 따를 뿐이죠."
물론 셰인의 예상과 달리 일라이는 그 점을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어디까지나 말로만.
"하지만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잘 지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군요."
‘……역시 싫어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하기야, 그녀의 훈련을 전담한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굴러온 돌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
"뭣하면 대련이라도 해볼까요?"
그렇다면 일단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비록 어린아이이니 진짜 기사만큼의 저력을 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치고는 굉장하다’ 정도의 성과를 내게 만드는 건 가능하다.
눈앞에 있는 여인도 그걸 안다면 고집을 부리지 않겠지만…….
"저는 가주님과 달리 손대중이 서툰 몸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이윽고 일라이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목숨을 거셔야 할 겁니다."
흠칫.
이어진 경고에 셰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대련에 목숨을 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걸 대놓고 거론하다니, 아무래도 이 여자가 자신에게 가진 증오는 터무니없는 듯 하였다.
‘이거, 상대를 해야 하나?’
일단 손님으로 온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가주의 의견이 꺾일 리는 없겠지만, 뭐가 됐건 간에 제 앞날에 긁어부스럼이 생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니 해결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리라.
관건은 그걸 어떻게 이끌어 가냐는 거겠지만…….
"일라이~"
고민을 하는 중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시종장인 올리비아.
셰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 참! 자꾸 안경을 빼놓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아, 어쩐지 잘 보이지 않다 했더니……."
"조심 좀 하세요. 아무리 일라이가 칠칠치 맞지 않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곤 해도 도련님의 안내를 맡았는데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일라이가 그리 말하며 떠나가는 올리비아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셰인을 마주할 때와는 달리 희미한 미소를 그리면서.
사람을 가리는 걸까, 생각했지만 막상 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혐오가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
셰인을 마주한 일라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상당히 둥그런 테의 안경.
그에 날카로운 눈매가 가려지니, 이전의 째려봄과 대조될 정도의 순한 눈매가 나타났다.
"이런……. 얼굴이셨군요."
이내 셰인을 마주한 일라이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무뚝뚝한 건 여전하나, 그렇기에 감정의 변화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째려본 게 아니라 잘 안 보여서 그런 거였나.’
성질이 더러운 게 아니라 그냥 지독한 원시였던 거다.
괜히 그녀를 경계한 스스로가 바보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 * *
세실이 말하길, 일라이는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손대중을 못한다는 거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말한 건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진짜로 손대중을 못 해서 죽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 세실리아의 훈련을 전담했다고 말을 한 건, 아마도 제 딴엔 ‘공통점’을 찾아 유대를 형성하려는 목적으로 추측이 되었다.
특유의 분위기와 외형 때문에 와닿지 않은 게 문제지만…….
"……험한 삶을 사셨나보네요."
"네, 세실 아가씨께선……."
"일라이 씨를 말한 거예요."
세실도 험한 인생을 살긴 했으니 맞는 말이지만.
지금 셰인이 겨냥한 건 몸 곳곳에 상처가 그려져 있는 일라이였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저를……."
일라이가 안경을 치켜세웠다.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묘하게 몸을 떨고 있다. 오해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건…….
"후후, 저에 대해……."
……아닌 듯했다.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서린 웃음.
마치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준 것이 기쁜 듯 보였다.
‘묘하게 허당끼가 있는 건가.’
첫 인상이 살벌했던 것치곤 조금 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후를 위해선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험한 삶이라……. 제 출신지를 아는 분들은 다들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출신지요?"
"대륙의 변경에 위치한 블레이즈 영지입니다. 아십니까?"
"아, 네……. 공작님께서 몇 번 들려주셨어요."
제국 변경의 블레이즈 영지.
블레이즈 변경백이 관리하는 그곳은 도시라기보단, 일종의 ‘방어선’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야만족, 추방자, 마물…….
그 모든 것이 쉴 새 없이 침입해오는 장소가 바로 일라이의 고향인 것이다.
‘역시 거기였나.’
아마 공작이 그곳에서 보낸 1년 중 연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저택으로 들여와 사용인으로 삼은 듯하였다.
셰인이 물었다.
"그 몸에 난 상처들도 그곳에서 생기신 거 같은데……. 왜 상처는 치료하지 않고 놔두시는 건가요?"
신성력은 만능 치유의 힘.
선천적인 장애나, 결손된 신체부위가 소멸한 게 아니라면 흉터까지 남기지 않고 치료할 수 있다.
명문가의 시종이 된 자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돈이 없진 않을 터.
그 의문에 일라이가 말했다.
"전직 군인들에겐 흔한 일입니다.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일부로 상처를 남겨두는 것은 말이죠."
"그건……. 어째서죠?"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나름대로 훈장으로 삼거나,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저의 경우에는 추억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죠."
추억을 보존하다니.
셰인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장살이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유가 있다면 즐기는 게 아니라 다른 부분이겠지만……. 그런 건 대개 부정적인 이유지.’
이를테면 추억을 쌓은 동지의 추모나, 혹은 상처를 입힌 적을 기억하기 위해…….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라면 이 자리에서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이다.
"그럼 군인을 관두고 시종 일을 하시는 이유는요?"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한 번 물어보았다.
전장에서의 삶을 기억하고자 하는 아가씨가 어째서 전장을 벗어났는지.
그건 역시 목숨이 위험하다 여겨서일까?
"돈을 많이 주니까요."
"……네?"
"급여도 군인이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고, 근무환경도 이쪽이 훨씬 좋기에 당시 함께 전장을 누볐던 현 공작님의 소개를 받고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
돈 많이 주면 군인 때려 치고 당연히 부잣집 시종일 하겠지. 현실적인 이유에 잠시 말문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라이가 마저 말을 이었다.
"전직 군인인 만큼 기사단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래엔 단장직을 맡지 않겠는가 하며 스카웃을 받았지만, 갑옷을 입는 것보다는 시종복을 입는 것이 더 예쁘기에 이쪽으로 전향하였죠."
"어……. 예뻐서요?"
"전장에서는 치마를 입어볼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스륵.
일라이가 자신의 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셰인을 마주했다.
"어울립니까?"
"……네, 어울리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자세를 낮춰 인사하는 일라이.
제 딴엔 예를 갖춘 우아한 인사라 여겼지만, 정작 셰인이 보기엔 여러모로 괴짜가 아닌가 싶었다.
‘전장 살이 오래 한 놈들이 다 한 정신 하는 놈들이다만.’
대개 후방에 실려 오는 응급환자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 장애에 걸려있었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카일의 전공은 정신과가 아닌 외과의. 쇼크로 달려드는 정신병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처방은 물리치료뿐이었다.
‘이 아가씨에겐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는 요인이기도 했다.
당장 나이는 기껏 해봐야 20대 초반.
라인하르트 공작이 성인식 전후로 혼약을 맺고 세실을 낳았다 한다면, 사실상 10대 초중반인 ‘소년병’시절에 그와 함께 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시기에 공작가의 후계자의 눈에 들어 캐스팅된……. 객관적으로 본다면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자.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이 시대에선 볼레로랑 비슷한 급이라는 건가?’
처음에도 시종이 아닌 단장직으로 캐스팅이 되었다 하지 않았는가?
단장직을 거부했다 한들, 가문에 속한 그 자체만으로도 가문의 힘을 과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싸울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전생에서의 그는 괴물이 아닌, 괴물을 공략해야 하는 자의 입장에 속한 자였으니까.
그런 괴물들과 이 시대까지 와서 싸우는 건 극구 사양하고 싶었다.
* * *
-웅성웅성.
영지의 시장터에 들어오니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시장이란 건 대개 그런 식이지만, 공작가의 영지인 만큼 그 규모가 상당한 편이었다.
일라이가 그 거리를 앞장선 채 말했다.
"이번 외출의 이유는 혹시 검을 마련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런 거라면 바로 장인의 거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만……."
"아뇨, 검은 아직 됐어요."
당장 검을 들 때라 봐야 허수아비를 두드리며 자세를 교정할 때뿐.
대부분은 무검술과 이론위주의 수업이니, 진검을 드는 것이 그리 절박하지도 않다.
"그런 것보다 먼저 식사부터 할까요?"
"아, 마침 점심 때로군요. 마침 이 부근에 유명한 요리사가 가게를 두었는데, 그분의 경우엔 성에서도 자주 초청을 드리는……."
이후 일라이의 안내를 받으며 번화가로 향하게 되었다.
외지의 관광객들, 특히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거리였던 만큼 볼거리가 많은 장소였다.
그중 일라이가 안내한 식당으로 가니, 가문의 손님이란 이유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만찬이 대령되었다.
아무리 셰인이 대식가라도 혼자 먹기엔 꽤나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일라이 씨는 안 드시는 건가요?"
"시종이 된 자가 어찌 섬기는 분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일라이가 그리 말하며 셰인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시종으로써의 예의를 지키고자 셰인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했다.
하지만…….
-주륵.
큼직한 고기뭉치를 보며 일라이가 침을 흘렸다.
뒤늦게 그걸 자각하고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하는 일라이.
그러면서도 무뚝뚝한 시선만은 힐끗, 하고 고기로 향해졌다.
비 맞은 강아지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처량하고 가여운 모습…….
"전 아직 계승자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럴 수는……."
-꼬르륵.
"크흠,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내 일라이가 셰인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식사를 이어갔다.
전직 군인답게도 무시무시한 식성이었다. 셰인은 그런 일라이도 귀엽게 쳐다보았다.
‘정신적 나이만 보면 이 아가씨도 내 손녀뻘 되겠지.’
전생엔 결혼도 못 하고 죽었던 몸이지만 어쨌든 간에.
가벼운 외출이라곤 하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천식약에 쓰일 재료를 모으는 것이다.
식사 후 어느 정도 거리를 둘러본 뒤, 셰인은 그에 적당한 가게를 발견하여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은 연금술 가게입니까?"
"네 뭐, 그러네요. 최근에 흥미가 좀 생겼는데 둘러봐도 될까요?"
셰인이 쓰게 웃으며 가게를 올려다보았다.
공교롭게도 제국엔 약방이라고 할 게 없었다.
아프면 자가치료를 하기보단 바로 교회에 의존하면 그만이니까.
‘민간요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효과가 있는 경우는 없으니……. 사실상 약초 같은 걸 취급하는 곳은 연금술 관련 업종자들이 유일하단 거지.’
연금술은 물리와 마찬가지로 현 시대의 마법에 기반이 되는 분야.
의학의 파트너인 약학을 파생시킨 ‘화학’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