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4화
‘소설이 아니라 엄연히 의학서적이에요. 한(韓)이라는 나라에서 들여온 점혈법에 대한 책을 읽어보니 꽤나 흥미롭더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기(氣)라고 하는 게 마나의 움직임과 유사한데, 이 기라는 게 혈도를 타고 흐른다고…….’
‘네네, 그거 그 무협인가 뭔가 하는 책 맞죠? 툭툭 찌르면 피토하고 억 죽고.’
당시 카일은 피오의 제자인 수련의(레지던트)로써, 어지간한 중장비보다도 두꺼운 책들을 사흘에 하나 씩 정독했던 몸이었다.
그마저도 ‘기초’라 말하며 과제를 바가지로 퍼담아 준 게 피오였거늘.
그런 그녀가 현대의학과 거리가 먼…… 점혈같이 찌르는 곳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조절한다는 ‘미신’ 따위를 숭상하는데 어찌 좋게 볼 수 있을까?
‘애초에 한의학이라는 걸 연구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셰인과 같은 의사가 보기엔, 한의학이란 분석이 없는 경험만으로 정립시킨 치료법이었다.
무작정 반복하고, 무언가 효과를 보면 전파하는……. 그마저도 대개는 ‘느낌’만으로 그칠 뿐인 신빙성 없는 행위.
실제로도 별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기에, 그와 같은 의사들은 당연히 한의학에 대한 효용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민간요법도 충분히 연구가치가 있어요.’
그럼에도 가장 위대한 의사라 일컬어지는 여인은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카일. 모든 학문의 시작은 예외 없이 가설에서 비롯된 거예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설을 만들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러 실험을 거친 후에 정립된 명제를 정리한 게 학문이자 책이란 거죠. 우리가 배우는 의학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건 카일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 왜 학자들이 가설을 세워가며 쌓은 순수의학이 아닌 한의학 같은 미신을 숭상하냐는 것이었다.
‘한의학은 엄연히 존재하는 결과를 정립시킨 민간요법의 결정체이기 때문이죠.’
‘존재하는……. 결과요?’
‘그들의 치료를 받고 엄연히 몸이 호전된 사람들은 존재해요. 한의학에 통달한 사람들조차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설명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환자가 치료된 결과가 나왔죠.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진작 한의학이란 현대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도태되었을 거예요.’
그 결과물이 지금 제 손에 쥔 점혈법에 관련된 책이다.
그리 말한 피오가 늘 그렇듯 자신 있게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그 행위를 통해 회복된 환자가 나타났다. 그것만으로 우리와 같은 의사들이 그것을 주목하고, 분석할 가치를 찾았다 할 수 있겠죠. 우리가 맹신하는 현대의학만 해도 당장 완성되었다곤 할 수 없잖아요?’
그녀의 말대로다.
당시를 기준으로 백 년 전만 해도 심정지로도 사망판정이 나왔지만, 전쟁에서의 죽음에 대한 개념은 맥박이나 호흡이 아닌 뇌의 상태에 따라 정해졌으니까.
의학적 죽음에 대한 개념도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가는 것.
마찬가지로 인류는 민간요법을 통해 만들어진 저서가 왜 불쏘시개에 불과한지, 아직 그것을 단정 지을 정도로 의학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을 연구하는 것도 발전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그 필요성은 카일도 이해하고 있지만…….
‘그 연구를 왜 지금 하는 건데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하필 사람이 다 죽어가는 전쟁통에 과정 없이 결과만 존재하는 학문을 연구하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본인의 귀중한 휴식과 수면시간까지 쪼개가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물음에 피오가 반대쪽 손에 새로운 책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성경책.
민간요법의 결정체조차 의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녀가, 도저히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결론을 내렸던 제국의 치유교본이었다.
‘결과만을 숭배 받는 활동의 과정을 알아간다……. 그 중요성을 저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서요.’
피오 아스클레.
카일의 스승이 된 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의학의 길조차 부정한 적국을 이해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 * *
‘빌어먹게도 착해 빠진 사람이었지.’
하지만 선악과 별개로 그녀는 유능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녀가 말했던 ‘마력회로’에 대한 가설은 분명 사실이었다.
‘인간의 몸에 받아들인 마나는 피와 함께 순환한다.’
마법사들이 흔히 말하는 마나회로란 인간의 피가 흐르는 혈관을, 정확히는 인간의 몸에 존재한다는 365개의 혈도를 일컫는 것이다.
써클이 고리의 형태를 띠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
마나가 혈액과 함께 끝없이 순환을 하니, 운용을 하는 순간 그 ‘흐름’에 맞춰 마나를 움직인 결과 자연스레 고리의 형태가 짜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카일은 스승의 가설을 떠올리며, 그 명제를 바탕으로 써클의 강제개방법을 만들어내었다.
‘전쟁통 속엔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환생 후엔 시간이라면 차고도 넘쳤으니까.’
혈도의 개방은 엄연히 ‘환생 이후’에 윤곽을 잡았던 기술이었다.
갓 태어난 영유아 때부터 의식이 또렷했을 때.
도리어 몸도 움직일 수 없고 매일 같이 침대에만 누워있으니, 몸에 흐르는 마나에 더욱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몸이기에 더욱이 민감해졌던 감각.
그렇게 자연스레 마나를 운용을 하는 시간은 길어졌고, 거기에 피오 아스클레의 가설을 더하여 풍문으로만 돌던 마력회로가 실존하는 것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혈도를 어찌 조작하냐에 따라 써클의 개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쿠과강, 투쿵!
그 결과가 지금 이 골목길에 버젓이 펼쳐져 있다.
"하, 와와……."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발발 떨어대었다.
고작 해봐야 응축된 마나의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튕겼을 뿐이었다.
순수한 물리력 덩어리를 던지는 ‘매직미사일’만도 못한 기술.
하지만 그것만으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벽들은 죄다 갈려나가듯 쓸려나간 데다 땅은 뒤집어졌다.
8써클의 경지란 그렇게나 터무니없었다.
"야, 꼬맹이."
그 공격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소녀를 향해 말했다.
소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다, 이내 정좌자세로 앉으며 셰인을 올려다보았다.
"네, 네, 넵!! 마, 말씀하세요!"
이전까지만 해도 제 사지를 갈라 산 채로 데리고 갈 생각으로 가득찼던 소녀였거늘.
지금은 8써클의 딱밤 한 대에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비굴한 태세로 돌입해 있었다.
‘여기서 더 개겼으면 엉덩이를 때려줬겠지.’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자 팡팡.
하지만 저렇게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니 협박할 필요는 없을 터.
셰인이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니들 두목은 조직 박살나는 거랑, 니들한테 나 데리고 오라 명령한 의뢰주한테 위약금 무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선호할 것 같냐?"
꿀꺽. 소녀가 침을 삼키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즈, 저, 제가 두목,입니다……. 네."
"……네가 두목이라고?"
"네, 넷! 뒷세계의 조직 ‘검은 해골’의 현 계승자인 쟈드 브링시커라고 합니닷!"
쟈드 브링시커.
소녀가 발발 떨며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고작 10살짜리 소녀가 두목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졌지만…….
‘그래도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가문의 비전이나 공주 같은 말도 했었으니 세습제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역시 소녀가 의뢰를 받고 이 사단을 벌였다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 네가 나를 납치해오라는 의뢰를 받고 부하들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이거야?"
"아, 아뇨. 그건 다른 담당이 있고, 이번 일은……. 꽤 건수가 커서 제가 직접 나선 건데에……."
당장이라도 울음보를 넘어 오줌보를 터뜨릴 것 같다.
전의를 상실한 놈을 상대로 손을 대는 것은 성미에 안 맞는 일.
셰인이 몸에 밀려드는 피로감을 추스르며 어느 한 곳에 손가락을 겨누었다.
"거기 팔 병신된 녀석 있지?"
셰인이 고문을 시도하려고 했던 여인이었다.
"그 녀석 팔,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뼈 맞춰지는 과정에서 쇼크로 뒈질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나중에 조용할 때에 나한테 데리고 와. 서로 할 말은 그때 나누기로 하고."
"……."
"대답."
"네, 넵!!"
그래, 일단 제 부하 구하러 달려들었던 녀석이기도 하니 경고는 확실히 되겠지.
뭣보다 여기서 심문을 해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는 없다.
‘대체로 뒷세계 놈들은 신뢰를 중요시 여기니까. 신뢰가 없는 놈에게 정보를 불 바에야 자결을 택할 수도 있고.’
차라리 협박보다는 시간을 들여 역으로 포섭해, 의뢰주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런 계획을 차차 검토하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도 잠시.
"……망할."
이내 인기척이 사라졌을 무렵, 셰인의 몸이 바닥에 털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8써클 경지를 해방시킨 게 고작 10초 남짓.
그것만으로 몸에 터무니없이 무거워진데다, 딱밤을 날린 손가락에 멍자국이 생겼다.
거기에 마투술까지 썼다면?
10초도 안 되어 온 몸이 박살났으리라.
‘역시 성장은 자연스럽게 해야 돼.’
써클이란 것도 결국 근육과 비슷한 거다.
성장하면서, 그리고 반복하며 숙달하는 것을 통해 육체가 적응하며 서서히 개방되는 것.
힘을 한계 이상 줄 시 근파열이나 골절 같은 게 일어나는 것처럼, 혈도의 흐름 역시 강제로 조정을 하게 되면 피의 흐름에 영향이 생겨 큰 부하가 가해진다.
‘혈도 개방…… 역시 남발할 기술은 못 되는군.’
하지만 지금처럼 써야 할 때는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 때를 대비해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단련을 게을리 해선 안 될 터.
그런 생각을 끝으로 사건지를 급히 벗어난 셰인이, 이내 골목길을 빠져나와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중 누구도 셰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일어났던 폭발조차 퍼레이드에 묻혀버린 마당.
깊숙한 골목길에서 벌어진 일 ᄄᆞ윈, 이 평화의 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테니까.
* * *
천식 치료에 쓰이는 약물은 많고, 그중 한 번에 섞어 사용하는 약물도 적지 않은 편이다.
질병 조절제, 증상 완화제, 그리고 스테로이드…….
"셰인! 부탁하신 영약을 가지고 왔어요!"
‘왔네. 스테로이드.’
제 방의 책상에 있는 책을 둘러보던 셰인이 세실을 환영해 주었다.
세실의 손에 쥐어진 것은 가문에서 내어준 영약.
주기적으로 마시면 근육과 뼈를 키우는 데에 도움을 주는 물건이다.
의학용 치료제와는 달리 법적으로도 영양제로 구분되기에 제조가 허락된 물건.
그 안에 스테로이드나 항생물질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으로 여길 일이었다.
"그, 이 영약 안에……. 스테로이드? 라는 근육을 키우는 게 있다는 건가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스테로이드는 아나볼릭과 당질, 각 용도에 따라 두 개의 종류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에서 영약에 들어 있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근육의 성장효과를 촉진시키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
라인하르트 가문에선 이 스테로이드 성분이 든 약물을 ‘중화제’와 함께 섞어, 일종의 근육 보강제로 쓰고 있다.
세실이 영약을 보고 떨떠름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영약을 많이 마시면 근육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다고 해요."
"뭐, 스테로이드니까."
"그럼 저도 근육이 엄청 부풀어오르는 건가요...?"
"……치료제로 만드는 거니까 문제없어."
스테로이드의 과용은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일으키지만, 스테로이드 자체가 나쁜가 하면 절대로 아니다.
아나볼릭이 아닌 당질 스테로이드는 실제로 많은 약물에 적용되는 거니까.
감기는 물론 관절염, 알러지, 피부병, 염증 등등 어느 분야의 질환에도 빠지지 않고 투입되는‘만병 통지약’이라 봐도 무방한 것.
당연히 알레르기성 질환인 천식치료엔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영약에 있는 스테로이드라는 걸……. 이 장치를 통해 추출하겠다는 거죠?"
세실이 곧장 셰인의 책상을 둘러보았다.
위에 있는 것은 얼마 전 연금술 가게에서 산 건조된 식물들과 화학물이 들어 있는 병, 그리고 연금술에 쓰일 기구들이었다.
그중 세실이 관심을 가진 건 큼직한 유리병에 무수한 유리관이 연결되어 있는 ‘증류장치’였다.
"그래, 필요한 성분을 증류시키고 배합하는 거야."
"증류……?"
"혼합물이라도 섞여있는 물질마다 증발점이 다르거든."
증류기 안에 분류하고자 하는 물질을 넣고, 그 온기를 높여 증발시키면 각 통로에 걸러져 나온 성분이 추출되는 것이다.
그게 세실의 눈엔 신비해 보인 듯했지만 셰인에겐 무척이나 답답한 과정이었다.
‘공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제조를 거친 셰인이, 이내 완성된 약물을 손에 쥔 장치에 따라낸 후 입구를 닫았다.
‘ㄴ’ 자를 그리듯 구부러진 파이프식의 장치.
세실을 위해 마련해 직접 주문제작한 약물흡입기였다.
"자, 세실. 이걸 한 번 빨아들여 봐."
환생 후 첫 치료가 시작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