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8화
14세.
풋풋했던 소녀의 티를 벗어나 서서히 여인으로 나아가는 시기.
그건 제 앞을 걸어가는 소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은회색의 긴 장발과 뒤로 묶여있는 리본은 여전하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와 달리 걸음걸이에선 적잖게 절도가 묻어나 있었다.
눈빛 역시도 마찬가지다.
마치 장인이 벼려낸 칼처럼 매사에 대한 경계심을 표출하는 모습.
그건 사춘기를 거치는 과정에 생겨나는 앙칼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가시 돋친 장미.’
라인하르트 가문의 여성들에게 지어지는 이명은, 자신을 앞장서 걸어가는 소녀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바였다.
세실은 그런 소녀에게도 개의치 않고 말을 건네었다.
"의외네, 세실이 먼저 대련을 청하는 일도 있고."
"오늘이 마지막이니까요."
"마지막은 아니지. 잠깐 저택에 돌아갔다 오는 거고……."
"아직 약혼이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지."
근 4년 간 자신의 위치는 학생이자 식객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이후 가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와, 골드리안 후작가의 서자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뭐가 됐건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래야지.’
이내 세실리아를 마저 뒤따라가니, 숲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엔 처음 오죠?"
달빛이 만연한 밤. 성 뒤편에 위치한 넓은 숲에 부자연스럽게 생성된 공터.
주변에 밑동만이 남은 나무들이 남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억지로 나무를 꺾어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세실의 눈이 그리움에 잠겨갔다.
"예전에 일라이와 이곳에서 훈련을 했었어요. 일라이는 힘이 워낙 강해서,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면 다른 분들이 원성을 내고는 하거든요."
‘박살난 나무들은 다 그 여자가 한 거였나.’
셰인이 가끔 일라이와 훈련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손대중이라는 게 전혀 없던 그녀는 아주 봐주거나, 혹은 전력으로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중 세실은 봐주는 쪽이었고, 셰인에겐 전력으로 달려드는 쪽이었다.
‘생각해보면 가끔씩 낌새가 있던 자객들보다 그 여자에게 죽을 뻔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네.’
예상컨대 그녀가 라인하르트 공작보다 강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세실이 셰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물론 셰인이 온 후로는 제 훈련을 전담한 건 셰인이었지만요."
4년.
그 시간 동안 셰인은 질리언의 허락 하에, 세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남들보다 병약한 소녀가 할 수 있다 여기는 모든 걸.
"그럼 오늘이 내 제자와의 마지막 대련이라는 건가?"
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듯, 세실이 가지고 온 무기들을 양손에 꺼내들었다.
양 쪽 모두 날이 서지 않은 가제품. 그중 세실이 사용하는 건 레이피어(세검)였다.
무게가 적지만 섬세한 기량을 요구하는 무기.
근력이 부족한 세실에겐 더 없이 적합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셰인은 단검을 주로 사용했죠?"
그리고 셰인이 훈련에서 주로 사용한 건 단검이었다.
그것을 아는 이유는 대련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
약물의 처방을 1주일 정도 했을 때부터, 세실은 몸이 호전되었다 여겼을 때부터 셰인에게 대련을 신청하곤 했었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처음 몇 달 간은 검을 몇 번 휘두르다 기침을 하고 쓰러지기 일쑤.
그 이후부터는 대련을 하더라도 셰인 쪽에서 여러 제약을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마저도 세실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것을 숨겨왔기에 반쯤은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서로가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싸움만을 4년.
"이번엔 봐주지 마세요."
그 끝에 찾아온.
마지막 대련만큼은 진지하게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그 각오를 읽은 셰인이 단검을 받고 거리를 벌릴 무렵, 세실이 제 옷을 풀어헤쳐갔다.
드러난 것은 민소매에 레깅스라는 간소한 차림새. 풀어낸 리본을 통해 긴 은발을 말총모양으로 묶어낸다.
주로 트레이닝을 할 때의 몸차림이나, 그보다도 날이 선 눈매에 더욱 시선이 갔다.
‘칼을 맞대는 자는 죽일 각오로 달려들어라.’
대련을 할 때에 누누이 강조해왔던 것이다.
남들보다 열악한 몸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이 기싸움에선 져선 안 된다는 가르침.
‘잘 따르는 모양이네.’
그것을 만족스레 쳐다본 셰인이 단검을 치켜세우고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서로 침묵을 하며 마주보길 십 수 초.
그 사이에 산들바람이 불고, 서서히 움직이는 달빛이 레이피어의 끝을 비춘 순간.
-쉬학!
세실이 그 빛을 휘두르며 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다.
마나의 운용을 통해 공기의 저항을 줄인 결과.
하지만 공격을 먼저 한 쪽은 단검을 던진 셰인 쪽이었다.
-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쏘아지는 빛.
그를 맞닥트린 세실이 눈을 부릅뜨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비틀어 단검을 피해내었다.
그리고 레이피어를 휘두를 준비를 취하려는 순간.
-까앙!!
목을 치고 들어오는 살벌함을 감지하고, 바로 세검을 세워 다가오는 공격을 막아내었다.
가느다랗지만 마나를 불어넣었기에 꼿꼿이 세워진 날.
하지만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무겁기 그지없다.
그것을 자아낸 건 다름 아닌 ‘손’이었다.
"무기를 버리다니……."
"애초에 난 검사가 아니거든."
봐주지 말라고 했으니 주력인 맨손으로 나선 것 뿐.
그리고 편하게 잡담을 할 생각도 없다.
-끼긱!
그대로 도신을 타고 흐르는 손날이 품을 파고들어온다.
그에 대응하고자 손잡이에 힘을 준 세실. 이윽고 날이 손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린 후 제 머리의 뒤쪽으로 손잡이를 물렸다.
그 순간 멈춰지는 호흡.
셰인이 전수한 ‘마나의 호흡’으로 집중력을 극대화시킨 순간이다.
-슈파팍!
무호흡의 상태로 이어지는 돌발적인 연격.
그로부터 비롯된 찌르기의 횟수는 1초당 3회를 넘기에 이른다.
-까가강!!
하지만 셰인은 그만한 수의 난격을 한 손으로 해낼 수 있는 자다.
한 손으로 모든 공격을 가드한 셰인이, 자세가 벌어진 틈을 타 반대쪽 손에 힘을 끌어모았다.
이윽고 이어지는 것은 강탄.
손아귀에 실린 마나를 순간적으로 폭발시켜 가하는 필살의 일격.
-끼긱!
하지만 적중 시 발생해야 하는 폭음은 울리지 않았다.
얇은 도신을 이용해 그 공격을 교묘히 빗겨냈기에.
그리고 그 회피동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몸에 회전력을 실어넣어 셰인의 머리를 향한 반격으로 이어졌다.
-쿠웅!
양 손을 교차로 세워 막기 무섭게 느껴지는 묵직함.
도저히 찌르기라곤 생각할 수 없는 위력이다.
이 가느다란 날을 통해, 세실은 자신이 사용한 것과 같은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호흡법에 회절, 마투술을 응용한 검법까지……. 가르쳐준 대로 잘하고 있어.’
4년 간 세실에게 가르쳐 준 건 그저 이론만이 아니다.
자신이 익힌 라인하르트류 검법에 마투술을 접합시키고, 그것을 검술에 적합한 형태로 변형하여 세실에게 전수해줬으니까.
그리고 마투술의 기본은 정지된 상태에서의 집중과 해방의 반복.
호흡에 제약이 있는 세실에겐 이쪽이 더 유용할 것이며, 그 단련의 성과는 셰인의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성장에 감탄한 건 셰인 만이 아니었다.
‘손이 단단해. 그러면서도 날카롭다.’
라인하르트류 제4자세 투로(套路).
검에 투자해야 할 마나를 오직 손에 집중시켜 손의 내구성을 높이는 기술로, 본래엔 맨손으로 적의 칼날을 잡거나 반격을 하기 위한 ‘호신술’이다.
하지만 셰인의 손날은 보통의 검을 초월하는 경도와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메스를 대체하기 위한 ‘절개술’을 혼합시켜 사용한 결과. 절개술의 단점인 내구성을 당수를 이용해 충족한 것이다.
예리함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담겨있는 마나의 농도는 ‘2써클의 마나’를 운용하는 세실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까각!!
리치에 우위를 점했음에도 끝내 셰인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양 손 뿐 아니라 다리, 심지어 어깨나 허리까지 사용해가며 이루어지는 맹렬한 난격은 검 하나로 차단하기엔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셰인은 이번 싸움은 봐주지 않고 행할 예정이었다.
‘빈틈……!’
이윽고 레이피어가 뒤쪽으로 튕겨져 나간 순간.
안으로 파고들은 셰인이 세실의 머리를 노리고 손날을 휘둘렀다.
그 손으로 살을 꿰뚫을 기세로.
-까앙!!
하지만 정작 손날에 부딪친 건 살이 아닌 금속.
절묘한 순간, 세실이 제 어깨를 노리는 일격에 반대쪽 손에 쥔 무기로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하라고 가르쳐 주셨죠?"
단검.
셰인이 이전에 떨어트렸던 무기를 발로 차올리고, 그걸 이용해 가드를 행한 것이다.
-까강!!
다시 공격을 튕겨낸 세실이 무기를 교차로 쥐며 자세를 잡았다.
좌수에 쥔 레이피어로 적을 공격하고, 우수의 단검을 패링용으로 사용해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공수양면에 특화된 자세.
단순 이도류도 아닌 서로 리치가 다른 무기를 쓰는 건 큰 기량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상대는 검술명가의 후계자가 된 자다.
그 피를 짙게 물려받고, 가문에 내려져오는 비전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연마해 온 자.
그런 그녀에게 부족한 건 오직 체력뿐이었다.
이제까진 그랬다.
-휘리릭, 서걱!
레이피어의 리치를 활용한 무수한 찌르기.
그에 빈틈을 찾고자 다가오려던 때, 방어용으로 쓰던 단검마저 과감한 공격으로 뒤바뀌어 셰인을 노리고 들어왔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쉴 틈 없는 맹공에 셰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망설임을 호기로 잡듯, 세실의 발걸음엔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까가가강!!
연달아 터져 나오는 불씨와 마나의 파장.
그 사이에서 옷자락이 찢긴 순간 셰인은 생각했다.
‘도저히 14살의 저력이 아니잖아……!’
병약하고 소심한 아가씨.
처음 마주했던 세실리아는 그런 인상이었다.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지병을 평생 동안 앓고 있어야 했으니, 그러한 태도는 평생 그녀를 뒤따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을 보라.
축 늘어져야 할 어깨는 펼쳐지고, 다소곳이 허리께에 모였어야 할 손은 무기를 쥐며 맹렬함을 과감히 표출하고 있다
자신을 주시하는 저 살벌한 눈빛의 어디에, 처음 마주했을 때의 병약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4년 만에 이 정도라니. 재능이 무서울 지경이군.’
확신한다.
이 소녀는 검술의 천재라 부를 만한 존재다.
재능은 물론이고 무력 역시도.
그 잠재력이 아직 개화되는 중임을 생각하면, 제 아비뿐 아니라 선대인 볼레로 라인하르트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그에 위기감이 가증되어 살의로 진화할 법도 하거늘.
"세실, 그거 알아?"
셰인은 그 감각을 끝내 억누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수상쩍음을 느낀 세실이, 세검의 날을 붙잡은 셰인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무엇을, 말이죠?"
"지금 전투, 1써클로 한 거야."
"……네?"
-까앙!
그대로 레이피어를 튕겨내고, 이윽고 셰인이 자신의 몸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콰아아!!
보다 거세진 마나의 파도가 그의 몸 곳곳을 휘몰아쳤다.
혈도의 개방.
마나가 흐르는 길을 인위적으로 해방시켜 경지를 높이는 기술로, 현재 셰인이 해방시킨 건 세실과 같은 2써클이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은 전생을 포함해 반세기를 넘은 상태.
같은 써클이라도 다루는 숙련도도와, 같은 부위에 사용되는 마나의 농도는 비교를 거부한다.
-쿠웅!
도약과 함께 휘둘러진 손은 힘겨루기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으윽!"
단검은 튕겨져 나간 순간, 그 빈자리를 대처하고자 레이피어를 치켜세우는 세실.
하지만 리치의 우위를 점했음에도 그 날은 셰인을 파고들지 못했다.
"더 할까?"
이미 셰인의 손날은 그녀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으니.
이내 세실이 손에 쥔 레이피어를 땅에 떨어트렸다.
"……아뇨. 제가 졌어요."
서로가 보내온 4년의 성과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