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9화
4년 동안 셰인은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마나운용의 경지는 세실과 같은 2써클.
라인하르트 가문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운용법에 충실한 결과, 13세가 되는 해에 자연스레 2써클의 경지를 개방하게 되었다.
만약 혼자서 수행했다면 16세에나 겨우 이루었을 터.
물론 혈도 개방을 통해 8써클의 경지도 해방시킬 수 있지만, 후유증을 내지 않고 개방시킬 수 있는 경지는 기껏 해봐야 3써클 정도다.
4써클부터는 사용 후 근육통이 생기며, 6써클 이상부턴 1분 이상 유지할 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다.
‘써클의 개방은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 좋으니 무리하게 개방시키지 않는 게 좋지.’
단검술도 익히긴 했지만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무기술이란 결국 시늉일 뿐이니.
하지만 4년 간 라인하르트의 무검술을 마투술에 접합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그걸 발전시키면 전생 이상의 저력을 발휘하는 것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볼레로 라인하르트.
그가 자신의 기술을 카피해 만들었던 호신술은, 200년의 시간을 넘어 셰인에게 기대 이상의 성장여지를 준 것이다.
‘날 죽인 것만 빼면 여러모로 고마운 것뿐이네.’
제 옆에 있는 소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것 역시.
"셰인은 강하네요."
달밤 아래.
공터에 있는 나무밑동에 자리를 잡은 세실이, 제 옆에서 함께 별을 구경하는 셰인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다시 옷을 갖춰 입은 세실은 귀족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절벽에 핀 꽃처럼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누구도 지금의 모습에서 이전의 맹렬함을 연상하진 못하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쫄래쫄래 따라오기만 했었는데.’
그 가녀린 소녀가 이만한 실력을 갖추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강해야지. 열심히 했으니까."
"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단련하셨죠."
세실이 슬쩍 자신의 목 쪽에 손을 올렸다.
"저도 셰인이 없었다면 이전처럼 싸우진 못했을 거예요."
천식.
천성부터 타고난 유전병.
관리만 잘 되더라도 죽을 일은 없지만, 이 시대에선 그런 걸 기대하는 게 어렵다.
그리고 세실은 무가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눈이 없는 것보다도, 팔이나 다리가 없는 것보다도 더 치명적으로 여겨질 호흡에 장애를 타고난…….
"셰인 덕분이에요. 제가 다시 검을 쥘 수 있게 된 건."
하지만 지금은 한 차례의 대련을 거쳐도 될 정도로 호전되었다.
알레르기성 질환이기에 완치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약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가문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성과를 아쉽다 생각하는 건 욕심이겠지.’
만약…….
세실에게 천식이 없었다면 이전의 대련에선 자신이 졌을지도 모른다.
실전이었다면 압승했을 테지만, 지금의 대련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단계에서 행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사용하는 기술도 무검술로 한정시키고, 세실과 같은 2써클의 경지에서만 합을 나누었다.
반대로 세실이 자신과 비슷한 나잇대까지.
이를테면 ‘볼레로 라인하르트’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면…….
‘졌겠지, 분명히.’
재능만 본다면 그 녀석 이상이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선 질투보단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만한 재능을 고작 천식 때문에 이렇게나 늦게 개화시켰다는 사실에.
그런 생각을 하며 달밤을 올려다볼 무렵이었다.
"셰인은……."
세실이 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저와의 약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문에 대한 평가를 배제한, 순수한 개인의 감상에서 빗댄 물음이었다.
뭐라 말할까 고민하던 셰인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너는 어떤데?"
"저는……."
말꼬리를 흐리는 세실이.
이내 셰인에게 머리를 기대어왔다.
"셰인이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아마 이성에게 품는 연심과는 거리가 멀거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감사와 친근함, 그리고 익숙함에서 비롯된 결론일 뿐.
아이에게 있어 4년간 함께 지내온 아버지 이상으로 편한 존재로 와 닿을 것이다.
"나도 싫진 않아."
그런 마음을 품은 건 셰인 역시 마찬가지다.
세실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감상으로 평생을 정해선 안 되겠지.’
셰인이.
카일 페터슨이 세실을 보는 관점은 어디까지나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상태가 호전된 지금은 자신이 곁에 있을 필요가 없으리라.
아니, 앞으로도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늘어트린 손을 거두려 했을 때, 세실이 셰인의 손을 붙잡았다.
"셰인이……."
가느다란 손가락.
그럼에도 굳은살이 베긴 손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칠기 그지없는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만약, 셰인이 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전 어떻게 될까요?"
"……."
"……전, 앞으로 셰인이 곁에 없는 걸 상상할 수가 없어요."
이제야 겨우 14살이 된 소녀다.
4년이란 셰인에게 있어선 인생의 1/10밖에 안 되겠지만, 이 소녀에겐 어느 정도 자아가 생길 무렵부턴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가족이라도 되듯 지냈다.
제 아버지보다도 가깝게.
"정말로, 앞으로 다시 보지 못할까, 그래서 괜스레, 두려워지고……. 그래서……."
그런 사람이 사라진다.
사라질까 두렵지만, 차마 말릴 수 없기에 손을 더욱이 거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전해진다.
이 소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을 두고 있는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그래서……."
차마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녀가 머뭇거리다.
끝내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오질, 않아요."
"뭐?"
"여기까지, 말했는데… 한 번도, 호흡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아까 전에 그렇게 움직였는데도……."
"……."
"이제야 겨우 검을, 쥘 수 있게 됐어요. 휘두를 수 있게 돼서… 그게, 너무 기뻐서……. 그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싶은데도, 전……."
"……세실."
"고마워요. 셰인.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제가 검을 휘두를 수 있게 해줘서, 정말, 정말로……."
옥구슬이 달빛을 머금은 채 흐르고, 추락하며 부서진다.
차마 그것을 볼 수 없기에 소녀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무도 자신에 대해 기억하는 자들이 없는 시대에, 이 소녀는 자신을 신뢰하며 첫 환자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감사를 전한다.
사람을 살리는 자에게 이보다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보람을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는 나머지, 끝내 그 감정을 등을 다독이는 손에 녹여내었다.
‘나를 신뢰해 줘서 고마워.’
이런 시간이 앞으로도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달을 올려다보는 중.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하지만 바라는 바가 모두 이루어진다면, 인간 역시 신이란 존재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전생에서부터 누누이 되새겨온 사실이었다.
"셰인 골드리안."
이른 아침.
저택에서 보내온 마차가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성의 정원을 산책하던 중 누군가가 셰인의 이름을 불러왔다.
발걸음을 멈춘 셰인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졌다.
다수의 마차.
그리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
하나같이 십자마크가 그려진 갑옷을 걸치고 있다. 제국의 국교인 유일교에 소속된 성기사단이다.
그들과 함께 행차한 건, 사제복을 입고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당신에게서 이단혐의가 발견되었습니다. 심문을 위해 신변을 구속할 예정이니 조용히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단심문관 안젤라.
4년 간 성에서 지내며 몇 번 마주한 바가 있던 사람이었다.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야 오는군.’
그다지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안 온 게 이상하다 생각할 정도.
세실이 마침 자고 있어 다행이다, 생각한 셰인이 담담히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안젤라가 의외인 듯 눈을 벌려 떴다.
"부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켕기는 부분이 있긴 하니까요."
"……좀 더 발뺌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영장만 나왔을 뿐이지, 구체적인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시간 끌어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죠."
애초에 심문관이란 진상파악이 아닌 본보기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다.
말하지 않으면 고문만 거세질 뿐.
심증만 있다면 진위여부 따윈 뒷전으로 미루는, 그런 잔혹한 이들을 상대하는 데엔 자백이 확실한 답일 수도 있다.
물론 조사하기 편하라고 구구절절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뭐해요? 연행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요?"
셰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의연하기 그지없는 태도.
그에 당황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성기사단이, 이내 안젤라의 눈빛을 마주하며 수갑을 꺼내었다.
누군가가 난입한 건 그 순간.
"잠깐!!"
질리언 라인하르트.
이 성과 영지의 주인이 된 자가, 순찰을 도는 기사들로부터 급히 보고를 받고 성의 입구로 뛰쳐나왔다.
"안젤라 사제님,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허덕이는 숨과 흐트러진 옷차림. 그만큼 이 방문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역시 이 아침에 이단심문관이 찾아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갑작스레 불편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공작님. 이곳에 올 때만큼은 편하게 있고 싶었으나, 공교롭게도 오늘은 업무차 온 것이기에 그리 좋은 시간은 보내지 못할 듯하군요."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습니까! 셰인이 이단혐의를 가지고 있다니, 그럴 리가……."
절그럭.
안젤라가 대답을 대신해 손에 쥔 것을 보여주었다.
흡입구와 버튼이 달려있는 장치.
파이프 담배에 비하면 훨씬 짧지만, 그보다 기계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셰인이 영지에 내려갔을 때 장인에게 만들어 달라 했던 흡입기였다.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이 나라에선 엄연히 ‘약학’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정확히는 이 시대엔 존재하지 않는, 설계도를 따라 만들던 중 양산하고 만 실패작 중 하나.
안젤라가 손에 쥔 것은 그런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으로부터.
안젤라는 셰인이 이단의 지식에 손을 대었다는 것을 간파해내었다.
"알고 계시겠죠. 선조분들께서도 그 부분에서 큰 피해를 보았으니."
가문의 비전에 따른 영약.
한때엔 과용에 의한 부작용으로 금지대상으로 오르려 했지만, 끝내 전통성과 증명된 효능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제조가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다.
제국은 약이라는 존재가 독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양면성을 경계했고,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것을 철저히 금지시켜왔다.
그것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신성력이란 존재가 있기에.
질리언 역시 그 비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로써, 그녀의 말은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소년은 어딘가에서 200년 전에 존재했던 야만족의 사술에 대한 지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와 학습을 연금술 독학으로 가장하여 은밀히 벌여왔죠. 이 손에 쥐어진 것이 그 증거물입니다."
"그런……."
질리언의 시선이 셰인에게로 향해졌지만, 정작 셰인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미안해요. 약혼은 못 하게 됐네요."
태연한 모습이다.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건, 그런 14세의 소년을 직접 연행하고자 하는 과거의 전우였다.
"공작님께서 납득하실 만한 증거는 지금부터 천천히 조사하며 습득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조사관들을 파견할 예정이니, 잠시 그가 머물렀던 방을 포함한 주변을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안젤라!!!"
이내 격노한 질리언이 안젤라를 쏘아붙였다.
다름 아닌 제국의 공작가에, 아무런 허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난입하여 그 식솔을 강제로 연행해가는 상황이다.
당장 칼을 뽑아도 시원찮을 상황.
그럼에도 감정을 불태우는 정도로 끝내는 건, 안젤라 역시도 질리언에게 마냥 가벼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단에서 총애를 받는 인재였고, 동시에 사지를 함께 누볐던 전우였으니까.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야."
그렇기에 정에 호소한다.
그런 게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질리언."
그럼에도 발버둥을 치는 옛 친구를 위로하듯.
안젤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이 나라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