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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24화 (24/255)

의무병의 환생 24화

"……."

침묵이 오간다.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도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포부에, 야유 한 마디 내뱉지 못하였다.

‘경외심.’

최후를 각오하면서도, 한 점의 공포 하나 느껴지지 않는 당당함은, 이 자리에 선 모두에게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건 심문관 역시 마찬가지다.

‘가엾은…….’

그런 감정을 부정할 수 없기에.

안젤라는 저 소년을 처량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고작 14살의 아이다.

그런 소년이 어찌 저렇게 당당히 제 소신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그만큼 의학이라는 게 매력적이기에?

정말로 길을 만들어준다 여겼기에?

하지만 그에 감회되더라도 용서할 순 없었다.

고작 지금의 모습만으로 설득되기엔, 그녀가 이제껏 보아온 결과물들이 너무나도 참혹했으니.

"……재판장님."

안젤라가 욱신거리는 팔을 움켜쥐며 의견을 토로했다.

"현 피고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반성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이상의 재판은 무의미하다 판단이 되니, 서둘러 판결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

변호인인 제네릭 역시 그에 조용히 동조를 하였다.

피고가 제 죄를 인정하고, 반성의 여지마저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이상의 변호 따윈 의미가 없는 상황. 그럼에도 발버둥하나 치지 않는 건, 그 역시 소년의 숭고한 의지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안타까움을 느낀 재판장이 이윽고 제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럼, 배심원단 여러분. 지금부터……."

이윽고 비정한 선고가 떨어지려는 순간.

-덜컹!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며, 재판장 내에 광명이 비추었다.

빛을 등에 지며 난입한 그림자가.

"모두 주목!!!"

그자가 지른 고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자는……."

마주한 이들의 얼굴에 하나 둘 씩 경악이 그려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난입한 자는, 절대로 재판장에 얼굴을 들이밀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자였으니.

그래, 이 자리에서 그 등장을 예견한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제야 오셨군.’

셰인 골드리안.

오직 그런 이름의 소년만이, 이 혼란 속에 묻혀 미소 짓고 있었다.

* * *

"저자는……. 탑주?"

"맞아, 마탑주 아제롯테다."

난입한 것은 복잡한 진과 룬문자가 새겨진 로브를 걸친 이들.

그들의 사이에 선 고깔모자의 여성은, 현 제국을 이루는 마도문명의 기반을 가꾸는 ‘마탑’의 수장이 된 자였다.

탑주 아제롯테.

제국의 마법발전과 연구에 이바지하고 있으나, 폐쇄적인 성향으로 인해 중요 행사에 대한 참가에 거부를 표해온 자.

그런 그녀가 재판에 모습을 드러낸 건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교단 측에서도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자.

세계의 완벽과 온전성을 주장하는, 유일교의 교리와는 상반되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으니까.

"……아제롯테, 당신이 왜 이곳에 온 것이죠?"

안젤라의 적대적인 물음에 아제롯테가 안경을 치켜세웠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죠."

"해야 할 일이라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대답이다.

무엇을 하건 신성한 재판 중에 난입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순간 아제롯테가 안젤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심문관 안젤라."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얘기했다.

"저희 마탑은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라인하르트 공작 전하를 암살하려던 혐의가 있음을 고발하겠습니다."

당당한 외침에 안젤라의 몸이 경직되었다.

당황한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암살이라니. 누가?"

"심문관님께서 누구를……. 공작님을?"

"대체 무슨 말이지?"

술렁임에 요동치는 재판장.

정작 소란의 장본인이 된 안젤라는 그들보다도 더한 혼란을 느끼는 상태였다.

"암살이라니, 제가?"

뜬금없다…….

그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걸 선언한 자가 다름 아닌 탑주라니.

폐쇄적이기로 치면 제국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세력의, 그 주도자가 어째서 이 자리에 와 이런 대형폭탄을 터뜨린단 말인가?

"정숙!"

-탕! 탕! 탕!

고함에 동반된 망치소리와 함께 술렁거림이 잦아든다.

줄곧 엄숙히 있던 재판장이 처음으로 분노를 표한 순간.

그렇게나 난입자의 존재는 달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제롯테. 그대는 신성한 재판장에 돌연히 난입하여 크나큰 혼란을 자아내었습니다."

"네, 저 역시 제가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아제롯테가 안젤라를 돌아보았다.

"허나 현 제국에서 가장 중대하다 여겨지는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 이, 다름 아닌 공작을 암살하려 했다는 확정적인 증거를 방치할 순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난입하게 되었습니다."

아제롯테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결코 물러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복전쟁 후 200년.

교단이 권위를 쥔 후, 마탑의 활동은 그들의 압박에 의해 이제까지 누누이 축소되어왔다.

그러면서도 심문관이란 작자들은 이단의 지식을 익혀야 한단 이유로,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비밀리에 보관한 고문서마저 갈취하는 상황.

그렇게 자기들 좋을 대로 이용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한 참에, 이 시대를 좀 먹는 적폐들을 청산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 기회를 결코 놓쳐선 안 된다.

아제롯테가 재판에 늦은 것은, 그 기회를 보다 확실히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는 엄연히 제 독단이 아님을 밝히겠습니다."

그 각오가 지금 그녀의 품에서부터 튀어나왔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류.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을 시, 특정 인물에 대한 구속권을 행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문서가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건 그대도 알겠지요?"

하지만 제도에서의 재판은 설령 황제라도 방해할 수 없다.

그건 법의 위에 존재하는 맹약의 영역. 아제롯테 역시 그 점은 이해하는 바였다.

"납득하지 못한다면 저 역시 물러갈 뿐입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시겠다면……."

공작의 암살혐의.

다름 아닌 교단의 고위 사제이자 현 재판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하나가,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의 현 가주를 암살한다는 혐의가 붙은 것이다.

제국을 수호하는 자로써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탑주 아제롯테. 그대의 난입을 재판장의 권한으로 허가하는 바입니다. 부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가져왔길 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를……."

정중히 인사를 한 아제롯테의 관심이 안젤라에게로 고정되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 자리는 재판을 위한 곳이 아닌, 용의자의 심문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 흐름에 당황하는 안젤라를 향해 아제롯테가 무언가를 내세웠다.

"심문관 안젤라. 이 물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손에 쥐어진 건 보석이 박혀 있는 은으로 된 잔.

안젤라에겐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걸 어떻게……."

"다시 묻겠습니다."

왜 이 잔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가는 현재 단계에선 중요치 않다.

"이 잔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중요한 건 심문대상이 이 잔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애써 호흡을 가다듬은 안젤라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제가 주교의 자리에 올랐을 무렵, 이제껏 저를 독려해 준 친우에게 준 선물입니다."

"네, 그렇죠. 이 물건은 다름 아닌 라인하르트 공작전하께서 당신에게 받은 물품입니다."

은잔을 내려다보는 아제롯테.

이윽고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컵의 내부를 보여주었다.

"은이야 신성한 금속으로 취급되니 교단에선 아주 흔하게 사용하고 있죠. 하지만 정작 이 잔은 통짜 은으로 된 게 아닌, 어디까지나 ‘겉만을 은으로 도금했을 뿐’입니다. 실제 이 잔을 이루는 성분은 다름 아닌 납이었죠."

호흡이 멎었다.

그 반응을 숨기려는 듯, 안젤라가 미소의 입꼬리를 일그러트렸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죠? 설마 선물을 도금했다는 이유에 트집을 잡을 생각인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물론 공작님에게 주는 선물로 납잔을 선물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 부분은 공작님께서도 이제까지 별 탈 없이 사용하셨으니 문제될 건 없겠죠."

중요한 건 이 잔을 ‘어떤 용도로’사용했느냐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납은 제국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금속 중 하나죠. 하지만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곧 아제롯테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잔을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곳으로 겨누었다.

"납은 엄연히 암살에 쓰이는 독을 만들 때에도 사용될 정도로 인간에게 해로운‘독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알콜과 맞닿을 시 조금씩 부식되어 녹아내린다는 사실을요."

"……알콜?"

"알콜이라는 이름이 친숙하지 않다면……. 그래요, 술이라 표현하는 게 적당하겠군요."

술.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가 즐기는 기호식품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그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술에 들어 있는 성분이 납을 녹인다는 정보를 제외하고.

"그래요, 납과 술이 맞닿으면 부식이 일어난다…… 즉, 미세한 양의 녹이 술에 녹아들게 되어 섭취자의 몸에 축적되는 것이죠. 혹시 이곳에 쇳물을 마시는 걸 즐기시는 분계십니까?"

"……."

반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학지식이 전무하다 해도, 쇳물을 마셔선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잡혀있으니까.

그걸 독이라고 여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알지 못한 건 ‘술이 납을 녹인다’는 화학적 지식뿐이다.

"자, 잠깐. 납이 술에 녹아내린다고요?"

마찬가지로 지식이 전무했던 제네릭이, 뒤늦게 말하고자 하는 걸 깨달으며 당혹을 토해냈다.

"그럼, 교회에서 취급하는 성수는……."

성수.

약간의 취기와 안정 성분으로 기도와 같은 명상행위에 도움을 주는, 각 가문의 영약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을 인정받아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정신안정제다.

하지만 법적으론 엄연히 주류로 분류되는 물건.

맥주나 와인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알콜’이 들어 있는 음료다.

"네, 그렇습니다. 이 잔은, 라인하르트 공작님에게 ‘성수를 마실 때 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즉, 라인하르트 전하께선 성수를 마실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독극물을 조금씩 섭취했다는 뜻이죠!"

-웅성웅성.

혼란이 더욱 거세진다.

그 혼란 속에서, 아제롯테가 쐐기를 박으려는 듯 나아가며 안젤라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물론 한 잔에 녹아내릴 납의 양은 극히 미량이겠지만, 그 정도라도 몸에 악영향을 주기엔 충분하겠죠. 실제로 근 몇 년 간, 라인하르트 공작님께선 잦은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증세는 분명 이 잔에서 비롯된 납중독에서 비롯된 일이리라.

"해로운 물질이 몸에 스며도 신성력이라면 회복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때마다 호출에 응했던 게 누구였습니까?"

그 대상이 되었던 안젤라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승기가 굳혀진 순간.

아제롯테가 벌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며 그녀를 압박했다.

"이 납으로 된 잔을 선물하며, 화학에 무지한 자의 고통을 달래는 것으로 그의 신의를 샀던 자는 누구였습니까!?"

"그건……."

"심문관 안젤라! 당신은 심문관으로써, 이단의 지식을 쌓고자 마탑에 종종 견학을 온 경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마탑의 지식은 이단을 압박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 그녀가 납이 알콜에 부식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쇳물이 인간의 몸에 해로운 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른다 말하는 건, 이제껏 거행했던 심판을 어설픈 지식으로 펼쳤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당신이 공작님에게 납이 든 잔을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한 ‘독살 혐의’에 반박할 근거가 존재하십니까?"

도리어 배경이 있기에 부정할 수 없는 근거.

그에 답하길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재판장 내의 소란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탑주가 뭐라고 한 거야?"

"독살이라니, 정말로?"

"그럴 리가, 공작님과는 연이 있었다고……."

"하지만 안젤라 님께서 반박하지 못하고 있어."

"말도 안 돼, 이단의 헛소리다! 당장 구속해야……."

"정숙, 모두 정숙하십시오!!"

-탕, 탕, 탕!!

재판장이 호통을 치며 망치를 휘둘렀다.

통제하는 경비들조차도 그들을 막아 세우지 못해 진땀을 뺄 정도.

그런 혼란 속에서 안젤라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반박할 근거?

있을 리가 없다.

심문관으로써의 활동을 위해 이단의 지식을 접했다는, 그 하나의 근거가 지금 제 입장의 덜미를 잡고 있으니.

그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결국 추한 발악이 될 뿐.

"……대답하기 전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순 없다.

이윽고 안젤라가 긴장하며, 그리고 절박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 조사를, 의뢰한 것은 누구입니까?"

만약 그 의뢰를 한 것이 저기 있는 피고인이라면.

고작 이들이 14살의 소년이 하는 말에 휘둘려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라면, 이들을 도리어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라인하르트 전하입니다."

하지만 이후 내뱉어진 말에, 그 실낱같은 활로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질리언 라인하르트.

자신의 옛 전우이자, 현재까지 그 관계를 이어온 존재.

그런 그가 자신을 향한 고발을 진행하고자 마탑에 의뢰하고, 이 중요한 재판까지 그 사실을 숨겨 공개적으로 제 죄를 까발렸다.

그건 자신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까?

아니,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물들진 않았겠지.

분명 이때 까지 자신을 믿어온 것이다.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뢰를 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

평생을 검만을 쥐며 살아온 남자가 아닌가?

화학에 대해선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테니, 마탑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가지지 않았을 터다.

그런 그가 어디서 그 지식을 접하고, 연고도 없던 이들의 협력을 빌려가면서까지 이런 상황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모든 것을 파악한 안젤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피고석을 돌아보았다.

재판장이 뒤집어질 정도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그저 판결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듯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을 향해.

"반박할 수 없다면 발언자를 공략한다라……. 그렇군요. 이제까지의 의연한 태도는, 모두 이걸 기다렸기에 취할 수 있었던 거였군요."

라인하르트 영지에서만 4년을 보냈다. 자신이 선물한 잔에 공작을 쳐놨다는 것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터다.

"이거 한 방 크게 먹었군요. 설마 공작님을 설득하여 저를 몰아붙일 기회를 모색할 줄이야."

"……설득하진 않았어요."

뒤늦게 셰인이 입을 열었다.

"그저 알려줬을 뿐이죠. 당신을 고발한 건 공작님의 선택입니다."

내뱉어진 것은 긍정이 아니다.

애초에 그가 일라이에게 부탁한 편지에 적어둔 건, 그저 어린애의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가도 될 만한 내용이었으니까.

그것을 믿을지 말지는 공작의 선택이었다.

친우에 대한 신뢰도, 마탑과 함께 교단을 압박할 근거를 찾아 황제에게 구속권을 따낸 것 역시도.

"그래요. 당연히 배신감이 느껴질 법도 하겠죠."

신뢰하던 사람이 옛 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접근하고, 독극물을 먹이며 ‘공작의 총애를 받는 자’라는 사회적 입지를 다져왔으니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러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해는 어디까지나 옛 친우만을 향한 것.

"……셰인 골드리안. 당신은 이걸로 괜찮으신 겁니까?"

초연한 미소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이자, 상대를 향한 조롱이기도 했다.

지금 이것이 그가 준비한 카드의 전부라면, 결국 ‘양쪽 모두 죄인이 된다’라는 결과로 그칠 테니까.

"제 비록 저의 목적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긴 했으나, 적어도 당신에 대한 조사만은 철저하고 확실하게 행했습니다. 당신이 현 시대에 이단으로 받아들여질 자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교단의 권위자가 부정을 저질러 구속된다.

그건 교단의 이미지엔 치명적이겠지만, 당장은 현 재판을 담당하는 책임자 한 명만 교체될 뿐이다.

"제가 사라져도 당신이 무죄가 될 일은 없단 말입니다!"

도리어 이단의 지식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례가 늘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한 자의 경계심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소년도 결국 죄인의 미래에선 벗어날 수 없다.

안젤라의 눈엔 그런 미래가 그려졌지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 사실을 직시시켰음에도…….

아니, 이미 직시한 듯.

"그건 당신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죠."

셰인은 아주 당연한 사실을 얘기하였다.

이제까지의 태도는 결코 반격을 위해서가 아닌.

애초부터 자신에게 내려질 처벌을 받아들였음을 가르쳐 주듯이.

‘저는, 그 아이를 구제할 가능성을 보여준 나라의……!’

‘아이헨발트의 의지를, 이 시대에 이어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발언은 결코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설령 자신이 죄인이 되더라도, 옳다고 생각한 바를 관철하겠다는 흔들리 없는 지조.

고결함마저 느껴지는 그 태도에서, 그 누가 그릇된 자란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

‘……그렇군요. 볼레로 라인하르트. 당신 또한 이런 느낌이었던 거군요.’

방향은 다를지언정, 그 신념만은 올곧은 자를 만났다.

어째서 그가 목숨을 걸어가며 제 주군에게 간청했는지를 이해한 안젤라가, 이윽고 체념하며 병사들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데려가시죠."

그렇게 한 명의 죄인이 떠나가고.

이 자리에 남게 된 죄인은, 이윽고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채 공간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대중보다도, 귀족보다도, 제국의 3공작과 황실의 일원들과 재판장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에 자리한 장막 너머의 5명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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