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7화 (27/255)

의무병의 환생 27화

알고 있다.

그가 제 딸에게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품은지, 그리고 그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도.

하지만 큰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지 않은가.

그 가문의 계승자란 결코 개인의 감사만으로, 당사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선 안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책임의 무게를 알기에 위로로 그치려는 순간.

"그래도 허락된다면, 기다리고 싶어요."

세실이 제 아비를 향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소망을 입에 담아 말했다.

"……세실."

"그러니까……."

그에 안타까움을 토로하려던 때 세실이 눈을 마주쳐왔다.

당장이라도 돌아갈 듯 부르르 떨리는 고개.

눈 또한 울음을 터트릴 듯 위태롭지만, 어떻게든 아버지와 눈을 마주보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하나……. 억지를 부려도 될까요?"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제 아비에게 부탁이라는 걸 하고자 한다.

이제껏 저주받은 아이란 죄책감에 짓눌리며 살던 아이가 처음으로 어리광을 부린 순간.

그 의미를 깨달은 질리언이 숨통을 멈추다, 이내 심정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물었다.

"…말해보렴."

허락이 떨어졌다.

곧 세실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떨어트렸던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저는……. 저의 반려가 될 자는,  저보다 강한 사람이었으면 해요."

그리고 말한다.

제 아비의 앞에서 각오를 고한다.

"모두가 포기했던 제가 다시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셰인이 그런 위험을 감수한 이유가 있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그건 스스로의 소망과 더불어 가문의 전통을 유지하는 길.

그리고 자신의 딸이 찾아낸 일종의 타협점이었다.

그 의견에 힘을 실어 넣듯, 손에 쥐어진 검의 날은 더욱 꼿꼿이 세워져 갔다.

"……."

라인하르트는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열리는 게 늦은 건 무리한 부탁이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기뻐서 그런 것이다.

그야 이제까지 내뱉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으니까.

결코 한정된 수명을 가진 자가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셰인, 너는…….’

그 소년은.

‘카일, 당신은…….’

그 남자는.

이 순간 자신의 딸에게‘기다림’을 선물로 남긴 것이다.

‘당신은, 정말 이렇게 떠나도 괜찮은 겁니까?’

그 깨달음이 참담함으로 바뀌며 가슴을 들쑤셨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가 어찌 지금의 부탁을 가벼이 여길 수 있을까?

"……네가 그걸 바란다면."

그러니 제 딸아이처럼 자신도 각오를 굳히자.

혼란에 뒤따를 책임, 옛 친우에 대한 감정, 그리고 소년에 대한 죄책감…….

그로부터 비롯된 것을 짊어질 각오를 하며, 앞으로 찾아올 일들을 대면할 준비를 취하는 거다.

그 결심을 표현하듯, 이윽고 질리언이 제 손에 목검을 쥐며 다시 공터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이전에 대련을 하며 그었던 원이 있던 장소의 밖으로 나가며.

"세실, 지금부터 할 단련은 그 어떤 때보다도 혹될 거란다."

한정된 장소라는 제약마저 지우고 전력으로 대련에 임하겠다.

그 각오를 표하는 질리언의 얼굴엔, 이전과 같은 걱정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괜찮겠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남들보다 늦게, 자신보다도 더 높은 이상을 바라고 있는 아이다.

그런 아이를 어수룩하게 가르치는 건 그 자체로 모독이라 여겨지는 일일 테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세실은 그에 주눅을 느끼지 않았다.

이미 각오는 굳힌 바.

결의를 세운 세실이, 곧 자세를 잡으며 제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셰인은……. 분명 저보다도 더 힘들 테니까요."

먼 훗날.

하지만 분명히 이루어질 만남을 기다리고, 또 고대하면서…….

* * *

"슬슬 도착하겠군요."

제국의 서쪽 끝단.

다져지지 않은 길을 달리는 마차의 내부에서, 창밖을 응시하던 제네릭이 제 옆의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양 손에 수갑을 찬 채 책을 읽고 있는 소년.

그는 이전의 재판에서 자신이 전담했던 피고이자, 현재엔 죄인의 신분으로 타 영지에 호송되는 상태였다.

변호인인 그가 함께 마차에 올라탄 건 담당한 피고의 마지막 처분을 확인하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업무의 연장선이라 할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이유라면 함께 나아가는 다른 마차에 타도 될 테지만, 셰인은 그의 존재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손에 쥔 책을 읽는 데에 열중할 뿐이었다.

"성경을 읽어본 소감은 어떠십니까?"

제네릭이 묻자 셰인이 잠시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현재 그의 손에 쥐어진 건 성경책이었다.

가는 길이 긴 만큼 시간을 때울 겸 읽기 시작한 것.

개인 소품을 챙겨가선 안 되기에, 호송자들 중 교단에 속한 이에게서 잠시 대여를 희망한 물건이었다.

죄인이 교단의 가르침을 받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글쎄…….

이후의 평가를 듣게 된다면 그 표정이 어떻게 바뀔까?

"불쏘시개가 따로 없네요."

단순 비꼬임을 넘어 경멸이 느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발언.

하지만 셰인의 입장에선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제부터가 진화론을 부정하니 말 다했지.’

학자의 기준에서 성경이란, 작법이나 문학적 감각에 구애되지 않고 되는 대로 쓰는 라이트 노벨(가벼운 소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거리의 아무 서점에나 가도 볼 수 있는 양산형 불쏘시개.

심지어 등장인물들은 전부 모자라고 미개하기에,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주인공(신)부터 찾고 의존하고 본다.

그리고 신이라는 작자는 자신이 내키는 대로 사람을 살리고 죽일지를 결정한다.

그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작중에 있는 인물 중 대부분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거나, 그다지 죄라고 생각되지 않은 것도 죄로 만들어 정당방위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하니…….

‘읽는 내가 개새끼가 된 기분이야.’

하지만 왜 이런 내용이 되었는지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집필한 자가 바라는 건 절대적인 우상이고, 구제를 바라는 자들을 더없이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야만 구제의 가치가 높아지는 법이니까.

억지스러울지언정, 그를 넘어선 장황함에 순응해야 흔들림 없는 신앙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자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제 옆에 있는 사람도 교단과 척을 지기 시작한 참.

셰인이 피식 웃으며 제네릭을 돌아보았다.

"이번 발언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법이란 본래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법이죠."

"변호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법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죠. 정 성경을 읽기 거북하시다면 제가 가진 법률서를 빌려드리도록 하죠."

"사양할게요. 그것도 제 입장에선 불쏘시개니까."

"그 말씀은 전공이 아니면 다 불쏘시개라는 겁니까?"

"…사흘에 한 번씩 이만한 두께의 책을 정독해 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하긴, 전공을 공부하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다른 책을 읽을 시간을 낼 수 있을 리가 없겠죠."

끝끝내 공감을 표한 제네릭이 입 꼬리를 치켜올렸다.

변호사나 의사나 힘든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이점은 이 시대에도 밥벌이를 할 수 있냐 없냐겠지만.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신 건가요?"

그 밥그릇마저 걷어찬 자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차피 그가 변호를 했건 말건 자신은 유죄가 되었을 운명이다.

안젤라의 부정을 고발한 것은 세간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수단일 뿐, 자신의 판결엔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을 일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을 변호했다. 이단을 혐오하는 세계에서 이단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에 뒤따를 책임이 원망스러울 법함에도…….

"제가 감수하기로 한 일입니다."

정작 당사자는 자신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고작 14살의 소년이 내비친 포부에 감회된 건 엄연히 자신의 선택.

그 선택에 후회를 할 정도로 편히 살아온 삶은 아니었으니까.

"원망을 한다면……. 그래요, 당신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그 여자가 되겠군요."

"……누님 말이죠."

에버그린 골드리안.

그를 떠올리는 셰인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제네릭이 측은한 시선을 보내었다.

"당신도 당한 게 많은가 보군요."

"아뇨 뭐, 저는 다른 형제들보단 사정이 나은 편이죠. 애초에 그 사람은 저한테 관심이 없거든요."

다른 형제들은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지만, 그녀만은 유일하게 셰인을 ‘무관심’으로 응대했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타인이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될 뿐이니까.

실제로 몇 번 대화를 나눈 후엔 자신이 후계자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걸 파악했는지, 이후에는 철저하게 공기취급을 하곤 했었다.

변호사를 보내준 것도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신뢰를 사기 위함일 뿐.

결코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이번 재판의 결과는 기대 이상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5년 정도라면 가문의 계승식이 이루어지는 데엔 충분한 유예라 생각할 테니. 그 시간을 통해 장남과의 격차를 좁힐 기회가 생긴 데에 기뻐하고 있겠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누가 가주가 되건 어차피 돌아갈 때엔 완전히 타인이 되었을 테니까.

서자에 불과한 데다, 범죄자를 넘어 이단자인 녀석이 가문에 발붙이고 사는 걸 누가 좋게 볼 수 있을까?

그러니 미래는 신경 끄고, 당장의 생존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도착했습니다. 죄수의 호송을……."

기나긴 여정의 끝.

이후 마차 밖의 군인들이 셰인을 인도하였다.

수갑이 채워진 채로 밖으로 나간 셰인의 눈에 들어온 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는 터무니없는 성벽이었다.

그 높이만 해도 50m.

길이는 디디고 있는 위치에서부터 지평선을 넘을 정도로 광활히 펼쳐져 있다.

‘블레이즈 방벽.’

추방자, 망명자, 반란군과 야만족, 마물과 사교도, 그리고 언데드 등등…….

제국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든 존재를 차단하고자 세워진 요새로, 저 성벽 안쪽의 영지가 셰인이 5년의 시간을 보내게 될 장소였다.

‘200년이 길긴 기네.’

전생에도 이만한 높이와 길이의 방벽은 본 적이 없었거늘.

그럼에도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할 정도이니, 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그리 벌벌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제가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모쪼록 무운을……."

하지만 재판에서도 의연히 있었던 그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제네릭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순간.

"제네릭."

셰인이 마지막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이 먼 길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해준 은사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에 만날 땐 술이라도 한잔하죠."

"술을 말입니까? 주류는 성인이 되어야…… 아."

따지고 들려는 중 입밖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5년. 소년이 어른이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제네릭이 쓰게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성수는 사양하겠습니다."

"당연히, 잔도 유리로 준비해야죠."

그렇게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두 사람은 등을 돌렸다.

이번의 만남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고, 서로에게 당면한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