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31화 (31/255)

의무병의 환생 31화

‘그래, 이 영지에선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겠지.’

이단의 문화도 장려하니 비상식은 넘쳐날 터. 더군다나 자신도 환생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환생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순 없을 터다.

필요하다면 이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만큼 비상식에는 익숙한 상태일 터.

그중에 환생자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냥 타고난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해서 직접 밝히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라인하르트 공작처럼 신뢰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쉽사리 밝힐 수는 없다.

상대가 깊게 추궁한다면 변명이 더 복잡해지겠지만…….

"그렇다면 상관없겠군."

사샤는 그에 별 다른 추궁 없이 대답하며 마저 담배를 태우고 서류를 훑어갔다.

감정은 물론이고 분위기 자체에도 변화가 전혀 없었다.

무관심을 넘어 의중을 알 수 없는 면모.

"그걸로 된 겁니까?"

"그 이상이 필요한가?"

의문을 토하기 무섭게 사샤가 바로 대답했다.

"그 쪽이 악령에게 씌었건 인두겁을 쓴 마물이건, 이 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소통이 가능한가와 지시를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는가 둘뿐이다. 그 이상을 파악하려 드는 건 시간만 아까운 짓이지."

말 통하고 명령만 수행하면 무엇이건 아군으로 쓸 수 있다.

상당히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쟁이란 그런 위험도 감수하며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연합국에서도 이런 건 많았지.’

열세에 빠진 군대란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전직 군인인 셰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이 여자……. 전장에서 보낸 시간만 치면 나보다 두 배는 길어.’

대략 40대 중후반.

환생 후까지 치면 모를까, 전생만 따진다면 자신보다 조금 더 연상에 해당하는 나이다.

그 시간 동안 평생 전장에서 보냈다면 소위 ‘노련한 노장’이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경험은 꿇리지 않을 터.

‘어쩐지 상관 느낌이더라니.’

의사가 아닌 군인으로써의 감상이었다.

"……부관."

"네, 말씀하시죠, 사령관님."

서류의 검토를 끝마친 사샤가 시가를 입에서 떼어놓았다.

이후 내뱉어진 건 서류를 읽으며 내린 사령관으로써의 평가.

"이단의 지식을 보유한데다, 영지에 오자마자 베테랑 군인들을 여럿 때려눕힌 꼬맹이에게 내가 투자를 하겠다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

투자.

일개 죄수병에게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부관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바였다.

"…황실과 교단 측에서 반발이 오겠죠."

치외법권지라 한들 엄연히 제국의 영역이니까.

운용되는 군사자금도 병력도 모두 제국에서 지원을 받는 만큼, 지원을 받기 위해선 그들의 요구를 최소한 수행할 필요가 있다.

형벌을 위해 파견 온 죄수의 편의를 봐주는 건, 그 요구에 위배되는 일 중 하나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반발에 내가 입을 피해는 얼마나 될 것 같나?"

"편의를 봐주는 이유가 타당하다면 약간의 시간낭비로 끝나겠죠."

"그래, 타당하다면."

입 꼬리를 치켜세우는 사샤.

곧 그녀가 다리를 꼬아 앉으며 다시 셰인을 마주하였다.

"간혹, 이 영지에 오는 녀석들이 착각하는 게 있지. 치외법권지라고 해서 규율이 전혀 없다는 것……. 그렇게 막무가내로 날뛰던 녀석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한다."

이단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도 어디까지나 영지법을 침해하지 않을 때, 혹은 사령관이 타당하다 여길 때에나 묵인해 준다는 것이다.

정말로 무법지대였다면 애초에 주둔지로 쓸 수 없을 테니까.

"그런 곳이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대륙 각지의 온갖 괴짜들이 모이고 있지. 그리고 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만 하는 입장이다."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 영지의 치안은 유린되며 쿠데타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진압에 실패하면?

이 영지를 필두로 한 반란세력이 결성되어, 제국에 대한 새로운 위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투자’를 하겠다는 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한다는 거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요는 이곳에서 자유를 보장받고 싶다면 먼저 영지를 위한 봉사를 행하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허튼 마음을 보일 시 ‘즉시 처형’도 고려한단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셰인은 귀족작위를 일시적으로 박탈당한 상태.

사샤의 관리 하에 놓인 만큼, 그녀가 어떤 처사를 하건 그 무고를 대변해 줄 자는 이 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너에게 과한 투자를 할 수는 없는 상태다. 위병들에게 해를 끼친 너의 편의를 봐준다면 다른 병사들에게도 불만이 생길 게 뻔하니,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지원은……. 그래. 병과선택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도겠지."

"병과의 선택, 말인가요?"

"전장에 직접 나설지, 연구직으로 지원할지, 혹은 후방 지원으로 그칠지……. 그 선택권만은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사샤의 눈이 게슴츠레 뜨여졌다.

"부족하다 생각하나?"

"…아뇨, 오히려 좋네요."

빈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보충병들은 가장 병력이 절실한, 이를테면 화살받이가 무수히 필요한 최전방으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죄수병이 최소한의 존엄도 존중받지 못함을 생각하면, 병과 선택의 기회란 그만큼 큰 특혜라 할 수 있었다.

‘목숨이 아까우면 그냥 후방에 짜져 있어도 되겠지만……. 이 기회를 그런 식으로 쓰면 여러모로 실망하겠지.’

병과의 선택.

그건 그 자체로 셰인의 판단과 재주를 알아보는, 일종의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하고……."

"네, 그럼……."

"아니 잠깐.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군."

용무를 마치기 무섭게 셰인을 다시 불러 세우는 사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셰인이 의문을 느끼며 사샤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이죠?"

"개인적인 물음이다."

곧 사샤가 새로운 서류를 들어올리고, 무심한 태도로 셰인에게 툭 말을 던졌다.

"여기 오기 전에 라인하르트 가문의 애송이에게 신세를 졌다는 게 사실인가?"

애송이.

비하적 표현이긴 하지만, 대강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 네, 공작님과 아는 사이이신가요?"

"알 수밖에 없지. 여기에서 1년을 보낸 동안 내 제자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녀석이니까."

"…제자?"

"일라이라는 이름. 알고 있나?"

일라이 덴.

셰인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 시대의 베테랑 군인들조차 ‘잔챙이’라 취급하는 셰인에게 있어, 그녀는 소년병 출신의 퇴역군인임에도 여러모로 파격적인 인상을 남겼던 사람이니까.

‘그 여자가 사령관의 제자?’

일개 병사도 아닌, 황제와 더불어 유이하게 이 제국에서 군권을 거머쥔 귀족의 직계 제자.

대련을 할 때마다 보여준 그 말도 안 되는 무력이 단번에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킨 사샤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까지와 같은 업무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사정에서 비롯된 물음.

비정하고 사무적으로 보여도, 일단 자신의 제자에 대한 걱정이 드는 듯하였다.

‘그래도 인간미라는 게 있는 건가.’

셰인이 쓰게 웃으며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네 뭐. 잘 지내고 있었죠. 마지막으로 본 건 몇 달 정도 됐지만……."

"망할 년."

대답하기 무섭게 튀어나온 욕설.

손아귀에 실린 힘을 버티지 못하고 구겨져가는 서류.

그 행동에 당혹마저 느껴졌지만, 사샤는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볼 뿐이었다.

‘그 여자,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호송 첫날에 사고 친 죄수병도 용서해 주는 사람을 빡치게 만들다니.

* * *

"일라이와 사령관님의 관계 말입니까?"

이후 부관인 존과 함께 집무실을 벗어난 셰인.

그에게 안내를 받기 전, 셰인은 존이 일라이와 동기였음을 알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일라이의 개인사를 궁금해 하는 걸 보니, 라인하르트 가문에 신세를 졌을 때엔 꽤나 친하게 지내셨나보군요."

"……뭐, 그렇죠."

친한 것을 넘어‘유대감’으로 묶여있던 사이였다.

4년 간 둘 모두 세실리아를 위한다는 마음은 같았으니까.

자신의 정체가 적힌 편지를 맡겼던 것도, 그녀에게 큰 감사와 신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얻어터진 적이 좀 많아서 껄끄러울 뿐이지.’

그런 사이인 만큼 개인사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

존이 잠시 턱을 괴다 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일라이가 이곳을 벗어난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네, 돈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뭐, 이 영지에도 돈을 벌러 오는 사람들이 대륙 곳곳에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일라이가 필요로 하는 돈은 장교의 봉급으로도 어림도 없는 수준이거든요."

"……빚이라도 있는 건가요?"

"빚을 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는 거죠."

대부분의 자금을 군사비로 투자해야 하는 변경백과 제국의 3대 공작가 중 하나.

어느 쪽이 더 많은 돈을 내어줄 수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딱한 사정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제자라 한들 군자금에 대한 배분에 편의를 베풀 수는 없는 법이죠. 사령관님도 당시엔 꽤나 화를 내셨어요."

그럴 수밖에.

직계 제자라면 중요책을…….

이를테면 장교 같은 자리에 임명하려고 들였던 것일 테니까.

그런 인재가 돈 때문에 떠난다니, 자신이 기른 부하가 다른 부대로 전향한다 하면 셰인이라도 화를 냈을 것이다.

"뭐 어쨌든……. 그에 대해서 집무실에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북서쪽 성벽에서 이교도무리가 이곳에 침입해 왔죠."

"이교도요?"

"규모만 해도 1만 단위에, 공성병기까지 들고 왔던 세력이었어요. 이곳에선 그런 습격이야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흔하다 해서 흘려 넘길 만한 일은 절대로 아니었죠. 그 보고를 듣자마자 사령관님께선 지휘를 준비하시면서 일라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정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면 지금 막 쳐들어온 사교도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와라! 그걸 혼자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일라이는 혼자서 이교도 우두머리의 목을 베고 돌아왔죠."

"아, 그렇군요."

셰인이 바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5초가 흐른 뒤.

"……예?"

셰인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다시 존을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적장의 목을 베고 왔다고?

수천 규모의 대군을 상대로 혼자?

"그러니까……. 갑작스레 쳐들어온 적군의 지도자를 혼자 죽이고 돌아왔다 했어요. 출전 전에 내어졌던 차의 온기가 식지 않았다는 건 지금도 떠돌아다니는 일화죠."

‘미친년인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일화였다.

그 볼레로조차 혼자 대군에 뛰어들은 건 픽션의 끝판왕인 성서에서도 본 적이 없거늘.

자신만 해도 이런데,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사령관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렇게 일라이가 떠나고 사령관님께서 하루 종일 성벽을 허망한 눈으로 쳐다보셨죠. 그 후 며칠간 다른 장교들이나 사제님들도 뭐라 말을 걸지를 못 했었는데……."

‘…나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애제자를 어이없게 빼앗아버린, 그런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신세를 진 녀석에게도 기회를 주다니.

이 땅의 군주는 사실 성녀가 아닐까, 생각되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네 뭐……. 일라이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대략적인 잡담을 마친 후.

존은 셰인에게 내어준 서류를 힐끗 쳐다보며 질문을 건네었다.

"슬슬 견학할 곳은 정했습니까?"

"…잠시만요."

셰인이 신음을 하며 서류를 마저 훑어보았다.

현재 셰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영지군에 소속된 병과의 목록표.

그 평가의 요약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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