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33화
"말이란 결국 해석하기 나름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신의 가르침 또한, 그것을 듣는 자가 인간인 이상엔 개개인이 어찌 받아들일지를 결정해야 하는 법. 그저 이 대륙에 있는 나라가 교단의 영향력이 큰 제국뿐이기에 간과하기 쉬운 문제라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후 이어지는 의견에 셰인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간과하기 쉬운 문제라니. 설마 이 시대에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 했네.’
200년 전에만 해도 흔히 돌던 말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정말 다양한 나라가 이 대륙에 공존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의 전쟁은 각 나라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고……. 제국은 그런 노력마저 존중하지 않은 채 대륙을 통일시켜버리고 말았지.’
그런 과거를 이제 와서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로부터 200년이나 지나, 타국에 대한 존중이 퇴색된 시대에 그것을 깨달은 자가 교단에서 나왔단 사실이.
"참모님, 잠시 실례를……."
한편으론 감탄마저 느낄 무렵, 군복을 입은 한 병사가 존에게로 다가왔다.
얼굴에 피가 묻어 있는 걸로 봐선 전장에서 막 복귀한 자인 듯했다.
사령관의 부관이자 고위참모라는 직책을 가진 존은, 그 군인의 보고를 듣곤 협소한 눈을 차차 벌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이 물었다.
"심각한 일입니까?"
"네, 이건 주교님도 함께 가셔야겠네요."
그리 말한 존이 크리스틴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셰인에게 ‘곧 돌아올 테니 얌전히 견학만 하세요’라는 경고만을 남긴 채.
‘바쁜 건 군인이나 성직자나 마찬가지인가 보군.’
그렇게 홀로 기도실에 남은 셰인이, 공허한 공간을 둘러보며 이전에 있던 크리스틴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성직자임에도 이단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권위자에 대해.
‘교리를 마냥 맹신하지 않아도 신성력은 다룰 수 있는 건가.’
아주 이상하진 않은 이야기다.
교리라는 건 실제 신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 신을 믿는 자들의 깨달음을 성경에 적어 넣어 설파한 결과물이니까.
비유하자면 교리란 일종의 정석.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교과서에 가까우며, 지식이란 어떻게 받아들일지 개개인의 몫인 법이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이단문화를 일부 긍정하는 것만으론 신앙을 부정했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교단 녀석들에게 의학을 납득시키는 것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이내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자신이 이 영지에 왔는가.
사회가 중시하는 게 올바름이 아닌 풍조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 마당에 죄수 신분에서 바로 의학을 받아들이길 바라다니.
‘지금에 와선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격이지.’
큰 그림을 그리는 건 일단 제 앞가림을 하고 난 후.
그 점을 되새긴 셰인이 주먹을 틀어쥐며 마저 성당지역을 배회했다.
그렇게 각 지역의 통로를 지나며 시설을 돌아보고, 어느새 창고지역에 도달한 중…….
"마녀 주제에 건방지게!"
그곳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셰인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앙칼지고 앳된 비명.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가 내뱉을 만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 뒤를 따르는 웅성거림을 쫓아 나아가니, 비품이 쌓인 장소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소년소녀들이 보였다.
수단과 수녀복을 입고 있는 남녀의 아이들.
그들에게 둘러쳐진 채 갈굼을 당하는 수녀 하나가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그때그 아이?’
세실과 비슷한 또래에 수녀복을 입은, 창백한 인상을 가진 소녀.
이 영지에 처음 왔을 당시 심정지에 빠졌던 그 아이였다.
* * *
천운.
세상엔 그렇게 정의될 만한 일들이 존재한다.
건물의 붕괴에 휩쓸렸음에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나거나, 달려오는 마차를 피할 수 없다 생각한 때에 경로가 틀어지거나, 혹은 벼락에 맞고도 목숨을 부지하는 등…….
그렇게 절묘히 발생한 우연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칭하며, 이런 기적을 여럿 겪은 사람을 마주하면 사람들은 그 자를 ‘축복받은 사람’이라 말한다.
베르디가 그런 아이였다.
‘신께선 그 어떤 위험에도 너를 지켜주실 거란다.’
이 영지에 자신을 데려온 성직자가 누누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베르디는 그 말을 신뢰하면서도, 몇 번이고 사지로 파견을 나가길 택했다.
정말로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면 죽을 일이 없을 테니…….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신께선 괘씸히 여기기라도 한 것일까?
마치 한계를 시험하듯 스스로를 몰아붙인 베르디는, 끝내 자신의 삶이 끝나는 순간이 찾아왔음을 자각하였다.
늘 느껴졌던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온 몸이 쥐어 짜이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 충격.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떠오른 건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끝이 나야 할 삶이었다.
"셰인 골드리안."
정신을 차린 베르디의 귀에 누군가의 이름이 들려왔다.
의식을 잃은 며칠 간 자신을 돌봐주었던, 늙은 수녀분이 상황을 설명해주며 가르쳐 준 것이었다.
"당신을 살린 건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골드리안.
제국의 경제를 책임진다 일러진 명망 있는 대부호이자 상인가문. 베르디 역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다.
그곳에 소속된 소년이 이단으로 몰렸다는 소식 역시도.
하지만 들었을 당시엔 아무래도 좋다 생각했다.
설령 그 소년이 이 영지에 처벌을 위해 왔다 하더라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겼으니까.
"…그런가요?"
그저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뿐.
그런 모습이 탐탁찮은 듯 늙은 수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환멸하지 않으시는군요. 사술을 이용해 당신을 살린 것이거늘."
만약 다른 성직자였다면, 제 몸에 불경한 기운이 옮았다며 혀를 깨물고 죽는 걸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령 스스로 죽음을 택해도, 이제까지처럼 또 기적이란 게 일어날지도 모를 일인데.
"살아남는 건, 익숙하니까요."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은 이뤄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걸 위해 이불을 걷어내는 베르디를 보며 늙은 수녀가 제지를 가했다.
"좀 더 쉬시는 게……."
"아뇨, 가볼게요."
만류에도 제 수녀복으로 갈아입은 베르디.
마지막으로 각각 색이 다른 구슬을 꿰어 만든, 그 로자리오를 목에 건 베르디가 자신이 머무른 방을 벗어났다.
자신을 돌봐준 이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그 후 문을 닫고 떠나려던 중,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엾은 아이."
‘가엾다.’
이제껏 수도 없이 들어온 말.
몇 번이고 기적을 겪었다 하나, 기적을 겪는다는 건 그만큼 많은 위험을 겪었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그런 사정을 아는 어른들은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직 경험이 적은 아이들의 경우…….
"저기 마녀 지나간다."
그래.
아마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진심은 공포에 가까울 것이다.
경외와 두려움은 한끝 차이로 갈리는 것이며.
고작 14살의 소녀가 무수한 사지를 뚫고 온다는 건, 그 누구도 곱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야, 마녀. 이쪽으로 와봐."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솔직한 법.
베르디는 성당을 누비는 수행원들의 손짓에 개의치 않고, 그들을 따라 창고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딱딱하고 건조하고.
존중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와 함께 공허한 눈동자가 뜨여진 순간, 베르디를 둘러친 아이들의 몸을 주춤거렸다.
"이, 이 마녀가……."
창백한 피부에 축 늘어진 어깨.
인상 역시 마치 시체가 일어난 것마냥 으스스하기 그지없다.
그런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것일까?
베르디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제가 무얼 잘못한 건가요?"
"무, 뭘 잘못 했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존재 자체가 잘못된 주제에!"
물음에 바로 돌아오는 고함소리.
시작은 불쾌함과 공포였지만, 그러한 감정은 곧 베르디를 향한 원망으로 빠르게 뒤덮여갔다.
"분명 다른 사제분들이랑 같이 파견을 나간 거잖아! 그런데 왜 살아 돌아온 게 너뿐인 건데!?"
"다 저주로 죽인 거지? 란사 사제님도 네가 저주로 죽인 거잖아!"
"믿을 수 없어, 란사 사제님이 죽다니……."
교외지역, 혹은 영지 인근의 노동지에서 펼치는 구호활동……. 그 과정에서 도적들을 만나는 일은 드문 게 아니다.
베르디는 그저 그 과정에서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주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그저 또 우연히 살아남은 것뿐.
하지만 아이들은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베르디가 목숨을 부지한 이유를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짓말 하지 마!"
"얘기를 들어 보니까 이단 녀석이 사술로 깨웠다고 했어."
"리치의 사술이다! 사령술이 이 녀석을 일으켜 세운거야!"
"그럼 지금은 언데드라는 거잖아."
"그래! 언데드가 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다 제물로 바친 게 분명해!"
"당장 정화해야해!"
"하지만 아직 우리 힘으로는 그런 건 무리야……."
"그럼 성수라도 뿌려!!"
이내 한 수행원이 품에서 병을 꺼내들었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하얀 액체는 성수라 불리는 것.
그것을 본 베르디가 제 눈을 살짝 벌려 떴다.
"성인식 전에 성수에 손대면 안 된다고……."
"닥쳐! 지금 그게 중요해!?"
몰래 빼돌린 성수 따위.
사악한 마녀를 벌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분명 허락해 줄 것이다.
그런 독단에 의해 던져진 유리병을, 베르디는 그저 말없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난입한 건 그 순간.
-탁.
그 자가 베르디의 앞을 가로막고, 전방으로 뻗은 손으로 병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린 수행원들의 입에서 당혹이 터져 나왔다.
"너, 넌 뭐야?"
"뭐긴."
금발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소년.
그를 본 베르디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얼마 전 의식을 잃었을 당시, 희미하게 보였던 이의 외형이 떠올랐기에.
"방금 전까지 니들이 떠들어대었던 그 이단 녀석이지."
셰인 골드리안.
그런 이름을 지닌 소년이었다.
* * *
‘자, 그럼……. 이걸 이제 어째야 하나.’
까놓고 얘기하면 셰인은 어린아이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육아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온 만큼, 제 앞의 아이들을 어찌 대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까.
비유를 하자면 병아리를 손에 쥐었을 때 터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도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성수병을 쥔 셰인이 힐끗, 하고 제 뒤에 있는 이를 돌아보았다.
베일 밑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분홍 빛의 머리카락.
수녀복을 입은 동태눈의 소녀가,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셰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알아본 것이리라.
‘치료할 때엔 혼수상태라 기억이 애매했을 텐데, 용케도 알아보는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셰인이 다시 자신을 둘러친 어린 수행원들을 돌아보았다.
"이, 이단?"
"이단이라니, 정말로?"
"이 녀석이 그 사술을 부려서 죽은 사람들을 살렸단 말이야?"
"우리랑 비슷한 나이인데……."
"멍청아 그런 게 중요해?"
이래저래 서로 떠들고 있지만, 그 누구도 셰인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안젤라와 같은 어른들에게 이단은 죽어 마땅한 존재지만, 힘과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단이란 두려워 마지못할 존재일 테니까.
"너, 너너…… 네가 정말 마녀의 수하라는 거야?"
이윽고 용기 있게 나선 소년이 셰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마녀의 수하.
셰인의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마녀?"
"그래! 지금 마녀를 지키려고 나선 거잖아!"
마녀라니.
설마 자신이 심정지에서 회복을 시켰기에 마녀로 불리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얼핏 들었을 뿐이지만, 이들이 제 뒤의 소녀를 이렇게 취급한 건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듯했으니까.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굳이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듣고 싶진 않네.’
아이들의 따돌림이란 아무리 가학적이어도, 그 계기는 사소한 경우가 많으니까.
뭣보다 핍박을 가하는 이유가 ‘마녀’라니…….
"으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언제 적 마녀 타령이냐."
이윽고 한숨을 내쉬는 셰인.
그를 마주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