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38화 (38/255)

의무병의 환생 38화

"이, 이 자식. 사람이 말을 하는데 비, 비겁하게 기습을……."

"비겁은 무슨. 너는 전장에서 만난 적이랑 심판 끼고 싸우냐?"

쓰러진 레온을 내려다본 셰인이 진심 어린 짜증을 흘렸다.

애초에 멀쩡한 사람을 잡고 시비를 터는 놈이 좋게 보일 리가 없을뿐더러, 이 녀석이 난입하는 바람에 베르디와 얘기를 나눌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괘씸죄 추가.’

그래도 나이가 어리니 알밤 몇 대 정도로 그치자.

그렇게 생각할 무렵 레온이 곧장 제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크으!! 이 정도로 날 이겼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야, 그걸 맞고 일어나?"

오기를 부리는 레온을 보며 셰인이 감탄을 흘렸다.

마냥 비꼬는 건 아니었다.

강체술을 쓰더라도 당장은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의 충격일 텐데, 저 우락부락한 소년에겐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정식성기사가 어쩌구, 원정에 나갔다는 말도 했었지.’

어린 나이에 신성력을 다룰 뿐 아니라, 기사들에게 꿇리지 않는 무력을 가지고 있단 것이다.

그 점을 직시하고 나니, 이전에 이 소년이 했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바로 실감하게 되었다.

"아까 그 뭐냐, 교단을 지탱하는 성기사단을 창시한 후손이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그렇다, 솔라리온 아슬란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겠지?"

"아 뭐……. 대강은."

반은 거짓말이다.

셰인이 기억하는 역사 속 인물이라곤, 연합국 소속임에도 제국의 편에 붙어먹어 권력을 꿰찬 매국노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태양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후퇴전에서였지.’

당시 아이헨발트의 패배가 확정되었을 때.

셰인은 남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몰려드는 제국군을 막고자, 제 부하들에게 부상자들의 호송을 명령하며 홀로 협곡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

역사서에 적힌 볼레로와의 혈투가 바로 그때의 일.

그리고 태양기사단이란 이름을 접한 건 볼레로와 만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기고만장하게 먼저 달려들었던 놈들이 다 전멸했었고.’

선두에 서서 달려들었던 놈들을 죄다 제압했고, 그걸 본 볼레로가 속한 기사단이 뒤늦게 와서 보게 되었다.

역사서에서 나왔던 쓰러진 선발대들이 바로 그 태양기사단인가 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감히 내 선조의 자랑스러운 친우의, 그 후손들의 명성에도 먹칠해 버린 네 녀석을!"

"……뭔 소리야?"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아니 시치미고 뭐고……."

"라인하르트 가문의 선조인 볼레로 라인하르트! 그분께선 내 선조님이 이끌던 태양기사단과 함께 무수한 전장을 누벼온, 가히 영혼의 단짝이라 봐도 무방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너는 그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자들의 보은을 받고도 이단의 지식을 탐한다는 금기를 저질렀지! 그 친우 된 자의 후손이 그러한 부정을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

뭐라 웅장히 말하고 있지만, 조목조목 따져보면 셰인의 입장에선 어이없는 것투성이였다.

볼레로의 친구? 영혼의 단짝?

‘이야~ 역사 왜곡도 이 정도면 아주 예술의 경지네!’

자신이 기억하는 태양 기사단은 ‘잔당소탕에 미쳐 주님의 이름만 부르며 본대에서 떨어졌다 한 명에게 개털린 떨거지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어떤 경위로 구국의 영웅과 친구까지 먹게 된 건지 심히 궁금해졌지만, 그런 내막을 알기에 눈앞의 소년이 안쓰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당시 쓰러진 본대를 본 볼레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좀 즐길 만한 상대가 나타나준 것 같네. 얘들아, 저기 떨거지들 치워봐라. 싸우는데 방해되니까.’

……세실과 질리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볼레로는 역사서에서 서술된 것과 달리 인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녀석과 붙어 있었다면 고생도 꽤 심했겠지.’

선조의 눈물겨운 고생극을 짐작한 셰인이, 철없는 후손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측은함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나에 대한 걸 누구한테 주워들은 거야?’

시선을 슬쩍 옮기자, 레온의 배후에 있는 복도 모퉁이 쪽에 몇몇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수단과 수녀복을 입고 있는 소년소녀들.

셰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교단의 어린 수행원들이었다.

‘대강 알 것 같네.’

동네 아는 형에게 일러바치기.

참 아이들다운 해결책이다.

"야, 너 성기사단 출신이라고 했지?"

하지만 그런 귀여운 반항과 별개로, 셰인은 이 상황 자체에 그럭저럭 메리트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명예로운 태양기사단의 성기사! 지금은 말단에 불과하지만 먼 훗날엔 나의 아버지와 형님이 그렇듯 단장자리에……."

"그런 건 됐고, 결투 받아줄 테니까 내기하는 게 어때?"

"……내기?"

"결투에서 이기는 녀석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로."

장수를 쏘려면 말부터 쏘라는 말이 있다.

목표를 하는 것이 있다면 우회해 접근하라는 의미.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셰인은 성기사단의 협력을 바라고, 이 소년은 왜곡이 좀 있어도 현 시대에 명망 있는 성기사 가문의 후예인 상태.

나이가 어려 직급은 낮아도 그 영향력은 무시 못 할 터이다.

‘잘 구슬리면 이단녀석이라도 훈련 정도는 같이 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의 제안은 이단을 혐오하는 성기사에게도 매력적으로 여겨질 것이었다.

"크흐흐, 그래, 너 역시 이단이니 나와 같은 독실한 신자들을 희롱하고 싶겠지. 하지만 네가 이길 일은 없을뿐더러, 만에 하나라도 네가 이긴다 해도 나의 존엄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엿도 못 바꿔먹은 존엄을 무너트려서 뭐에 쓰겠냐.’

한 귀로 듣고 흘린 셰인이, 마침 복도에 장식된 장식용 테이블로 시선을 향했다.

내부 장식을 위해 배치시킨 꽃병.

그것을 바닥에 내려둔 셰인이, 곧 테이블을 끌고 와 복도 한가운데에 내기의 장을 만들었다.

"……뭘 하는 것이냐."

"아 뭐, 결투라고는 해도 대대적으로 난리치긴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심플하게 팔씨름으로 승부 보자고."

팔씨름.

양 손을 맞잡은 상태로, 상대의 손등을 먼저 바닥에 닿게 하는 쪽이 이기는 경기이다.

그 제안을 가소롭게 여기듯, 레온이 자신의 대흉근과 이두박근을 씰룩거렸다.

"크흐흐, 이 몸을 보고도 팔씨름으로 승부를 하자는 것인가?"

힘겨루기에 체급 차이는 절대적.

오히려 그가 왜 팔씨름 따윌 제안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전장은 비정한 법. 상대의 무지함과 오만을 이용하는 것도 전법의 일종이다.’

괜히 상대가 물리기 전에 진행해버리자.

그리 생각한 레온이 곧 셰인의 손을 맞잡았다.

"좋다. 내가 이긴다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대신 네가 진다면 네 죄를 인정할 때까지 반성문을 적게 해주마!"

"그래그래, 반성문이건 성경독후감이건 다 써줄게."

"500장을 쓰게 할 것이다!"

"손 운동 되고 좋겠네."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일 무렵 멀리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수행원들이었다.

"시작한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레온이 이기겠지. 저 근육을 보라고!"

"뭣보다 레온에겐 신성력이 있으니까. 저 나이에 정식 성기사에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 저 호리호리한 녀석에게 질 리가 없어!"

육체능력은 물론이고, 신성력에 의한 가호는 힘겨루기 중 가해지는 육체의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

아무리 상대가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근력은 물론 장기적으로도 결코 승산이 있을 리가 없다.

모두가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있었다. 오직 이 경기를 제안한 셰인을 제외하고.

"자, 준비하고…… 시작."

"으랴아!!"

이윽고 선언이 내뱉어지자 레온이 전력으로 힘을 실어 넣었다.

언제 어느 때에든 전력으로.

그건 레온이 속한 아슬란 가문에 익히 내려오는 가훈이었으며, 레온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가훈에 충실하고자 한 상태였다.

제국을 어지럽히는 이단을 벌하기 위해.

더욱 나아가 자신이 명예롭게 여기는 가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선조들의 관계를 모욕한 존재를 벌하기 위해서.

‘이대로 넘어트려 주마!’

그런 일념을 담아 전력을 실어 넣었음에도.

정작 시간이 지나도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 따윈 들리지 않았다.

"뭐, 뭐, 뭐……."

"왜 그래? 시작이라니까?"

얼굴이 붉게 물들어질 정도로 힘을 실어 넣은 레온과 달리, 셰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경악스러운 건 그의 팔이다.

분명히 성인기사에게도 꿇리지 않는 힘으로 밀어 넘기고 있거늘.

‘대체 어째서……. 마나? 아니, 마나에 의한 게 아니다!’

마나로 모종의 현상을 일으킨다면 진동이나 바람, 아지랑이 등의 현상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셰인에게 그런 현상이 보이질 않는다.

오직 육체의 능력만으로 자신의 힘을 버텨내고 있단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바위와 같은 굳건함은 대체……?’

인간의 힘으로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굳건함.

지금 레온은 셰인으로부터 그런 인식을 받고 있었다.

반면 셰인은 자신과 손을 맞잡은 레온을 냉정히 평가하고 있었다.

‘힘은 좋은데 근육 쓰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네.’

팔씨름은 그저 팔의 힘이 좋다고 해서 능사인 게 아니다.

손목과 손목 아래에 해당하는 전완근. 어깨 부분에 자리한 삼두근과 이두박근.

결정적으로 자신의 팔이 넘어갈 때에 버티거나, 상대를 역으로 밀어내기 위한 가슴팍의 대흉근과 등근육마저 이용해야 한다.

즉 팔씨름은 엄연히 ‘상체근육 전체를 활용할 정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종목이란 것이다.

‘엄연히 룰을 갖춘 경기인데 체급만 가지고 싸움이 되겠어?’

체급이 높을수록 유리하긴 하겠지만, 그 차이가 압도적이지 않다면 기술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은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무 턱에 힘주지 마라. 잘못하다 어금니 깨질라."

"크오오오오!!"

충고를 하려는 셰인을 무시한 채 비명을 지르는 레온.

얼굴이 더욱 험상궂게 우그러지자, 셰인의 손이 아주 조금이지만 떨리기 시작했다.

무력함을 느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열의를 발휘하는 데에 당혹을 느낀 것이다.

"야 잠깐."

"내가, 이 정도로 포기할 것 같으냐!? 넘겨주마!! 기필코 넘겨서!! 반드시 네놈이 라인하르트 가문에 가한 수치를! 주님의 앞에서 사죄하게 만들 테다아아!!!"

"마음은 이해하는데 너무 힘주지 마. 그러다 부러지면……."

-뚜둑!

기겁하며 만류를 하는 순간 관절음이 울려 퍼졌다.

마찰음 정도가 아니다.

여전히 손은 잡혀 있는 상태로 어깨만 주욱 늘어나 있었으니.

"끄아아악!!"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을 참지 못한 레온이 바닥을 미친 듯이 굴렀다.

셰인이 그 모습을 보며 제 이마를 움켜쥐었다.

‘망할, 힘조절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버티다가 알아서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거늘, 설마 팔씨름 하나에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다 어깨뼈가 탈구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끄, 흐윽……. 아악!!"

그런 녀석이 괴로워하며 바닥을 뒹구는 모습에 애처로움마저 느껴졌다.

셰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늘어진 팔을 들어주었다.

"가만히 있어."

"으으, 이, 이 녀석! 내, 내 팔에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긴. 뼈를 좀 끼워주려는 거지."

"뼈를 끼우다니, 무, 무슨 짓을 하려는……."

-우득.

"아아악!!!!"

관절부가 바로잡히기 무섭게 레온이 비명을 지르며 발광했다.

그 순간 다시 똑, 하고 뽑혀버리는 뼈.

셰인이 표정을 구기며 레온을 쏘아보았다.

"야 엄살 부리지 마. 너 원정까지 나간다면서? 위대한 용자의 후손이 이 정도로 징징거리면 안 되지!"

"끄아아악! 아아아악! 그마아안! 아아아악!!"

"진정해 이 녀석아. 잘못 끼우면 다시 뽑고 끼워야 되니까……."

"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짜악!

셰인의 손바닥이 레온의 볼을 후려쳤다.

떨리는 골에 뇌가 충돌하고, 이윽고 뇌진탕에 빠진 레온의 두 눈이 까뒤집혀졌다.

"좋아, 이제 좀 조용해졌군."

"꺄아악!!"

조용해지긴 개뿔.

셰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수행원들을 돌아보았다.

쓰러진 레온을 보는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창백히 질려 있었다.

"주, 죽었어! 레온이 죽어버렸어!!"

"이단이 레온을 죽여 버렸다!!"

"안 죽었어 이것들아."

뇌진탕으로도 죽는 경우야 있지만, 셰인은 힘 조절을 하는 데엔 장인의 경지까지 오른 자였다.

설령 후유증이 남더라도 신성력을 이용하면 어찌 회복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성직자들은 그런 걸 세세히 구분 지을 만한 재주가 없다.

"으아아!! 살려주세요!!"

"레, 레온이 살해당했어요!!!"

"으에엥! 크리스틴 누나아아!!"

이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도망쳤다.

그들의 빈자리를 보는 셰인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참나. 누가 보면 내가 먼저 시비 턴 줄 알겠네."

멋대로 시비 걸고 멋대로 떠나가기까지.

아무리 저맘때 아이들이 철없다지만 셰인은 패기 좋은 샌드백이 될 생각이 없었다.

또 시비 걸면 그땐 엉덩이라도 때려줘야겠다. 생각하며 상황을 정리하려던 것도 잠시.

"셰인."

흠칫.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셰인이 다급히 뒤로 등을 돌렸다.

배후로 시선을 돌리자 마주하게 된 건 익숙한 얼굴.

"베, 베르디?"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환자가, 한 소년을 때려눕힌 자신을 공허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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