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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39화 (39/255)

의무병의 환생 39화

"괴롭히는 건가요?"

베르디가 셰인과 바닥에 쓰러진 레온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과정을 지켜봤다면 모를까, 결과만 본다면 셰인이 일방적으로 때려눕혔다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셰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야."

"아이들이 셰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망쳤어요."

"자기가 멋대로 와서 시비 걸다가 겁먹고 도망친 거야."

셰인이 한 건 그저 시비 받아주고, 뽑힌 뼈 다시 끼워주려고 했던 것뿐이다.

물론 상황만 본다면 오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베르디가 슬며시 셰인과 레온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 분은 내버려두세요. 괴롭힘이라면 제가 대신 받을 테니까요."

"……."

"…안 되나요?"

"안 되고 자시고 애초에 괴롭히는 거 아니라니까."

고개를 기울이는 베르디에게 셰인이 바로 일갈을 가했다.

오해라고는 하나 대신 벌을 받을 걸 자처하는 건 기특하게 여길 일이다.

자기희생이란, 특히나 종교적인 세력에 몸을 위탁한 자들에겐 그 가치가 더욱 드높아지는 법이니.

‘근데 얘는 자기희생 같은 게 아니잖아.’

정작 자신을 마주하는 눈동자엔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나 신념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는 건 공허뿐이다.

그저 자신은 어차피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니, 겸사겸사 남을 배려하며 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

"베르디 너……."

그런 부정적인 태도에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건 한숨에 어린 답답함뿐이었다.

"……됐으니까 갈길 가봐. 이 녀석은 내가 알아서 사제님들에게 보여줄 테니까."

이런 상황에 카운슬링이고 관계 쌓기고 가능할까?

그런 건 훗날을 도모하자, 생각한 셰인이 자리를 조용히 이탈했다.

베르디는 그 등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주 잠시뿐.

이윽고 그 관심마저 꺼진 베르디가 마저 할 일을 하고자 성당 지역을 거닐었다.

그 발걸음엔 미련 따윈 없었다.

지금의 소녀에게, 셰인 골드리안이란 그 정도에 불과한 자였다.

* * *

‘장수를 쏘려면 먼저 말부터.’

그 격언에 따라 셰인은 레온을 통해 성기사단과 연결고리를 만들었으며, 어찌어찌 그들과 함께 단련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적대감이 돌았지만, 정작 그 적대감이 향한 방향은 셰인을 향한 모진 핍박이 아닌 ‘빡센 훈련으로 그 정신머리를 고쳐주겠다’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상마초집단이라 다행이었지.’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훈련담당자가‘왜 이렇게 삐쩍 말랐냐!’라고 걱정했을 정도니까.

어쨌든 지원부대의 일도, 훈련 쪽에서도 별 문제는 없어졌다.

블레이즈 영지에 온 후 1달이 지났을 무렵에 내린 성과.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난 후, 셰인은 마침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게 되었다.

‘1달간의 성과를 인정한 사령관님께서 외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성벽 인근의 거리에 한해선 자유롭게 배회하실 수 있을 거예요.’

평소처럼 크리스틴과 병자들을 돌볼 무렵 찾아온 사령관의 부관, 존이 들려주었던 것이었다.

죄수병인 만큼 활동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몸.

그런 마당에 외출허락까지 내어준 건, 이 영지 내에서도 특별 케이스라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완전히 자유를 보장받진 못하지만.’

거리를 거니는 내내 셰인의 뒤엔 감시자가 따라붙고 있었다.

숫자는 한 명 뿐.

사전에 들었지만, 막상 감시가 따라붙으니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뒤따라오는 것보단 그자의 잠입실력이 의외로 뛰어났기 때문에.

예전에 마주해 본 바가 있던 뒷세계의 소녀처럼.

‘쟈드는 잘 지내고 있을까?’

당시 여러모로 많은 협력을 구했던 소녀.

객지에 오니 그 소녀의 방정맞은 모습도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뭐, 살아서 나가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런 그리움을 뒤로하며 들어선 곳은 도시에 위치한 한 시설.

성당 인근 거리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슬슬 시작하려는 준비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모으고자 찾은 곳이다.

"…뭐냐, 교단 녀석이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의가 다분히 느껴지는 목소리.

슬쩍 고개를 돌리자, 카운터에서 책을 한 권 펼쳐 읽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우락부락한 체형에 금속이 덕지덕지 붙은 가죽재킷. 투박한 손은 이제껏 많은 무기를 쥐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본래 군인이었다 은퇴한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 관심이 가는 곳은, 그 뒤에 배치된 벽걸이에 걸린 길쭉한 도구였다.

‘총이라고 하던가.’

영지군의 주축을 이루는 기술 중 하나인 공학.

그로부터 만들어진 총기는, 기계적인 구조로 설립된 무기를 이용하여 납탄을 고압으로 사출시키는 무기였다.

살상력과 능률만 따져도 2~3써클에 준하는 수준.

마법에 조예가 없는 일개 노동자조차 그만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저런 걸 들고도 밀리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성벽 밖이 막장이긴 한가 보네.’

치료 중에 병사들에게 들어본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생각되지만.

"의외로군, 교단 녀석들은 성경 외의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데 말이야."

"아 뭐……. 이 영지에선 책을 가려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제복을 걸치고 있는데 성직자가 아니라 설명하기도 좀 그렇다.

대강 얼버무린 셰인이 그를 향해 물었다.

"여기엔 어떤 책을 모아뒀나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걸 취급하지. 제국에선 구할 수 없는 고문서들을 한가득 말이야."

고문서.

그건 현 시점에선 제국의 영토라고 할 수 없는, 성벽 밖의 마경에서 발굴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중 일부는 200년 전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갈아버린 역사의 잔재.

즉, 고대의 서적과 그걸 성벽 밖에서 지금까지 계승하거나 발전시켜온 ‘이단자’들의 성과였다.

"그리고 이곳에 교단 출신이 들리는 건 대개 심문관을 지망하는 경우지. 이단을 벌하기 위해 이단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게 필수적이니, 사전에 그걸 예습하는 목적으로 말이야."

이단의 지식을 습득하길 희망하는 자는 심문관이 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교단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어본 바, 교단에 소속된 이단심문관 중 대다수는 이 블레이즈 영지에서 수행한 사람들이 차지한다고 하니까.

반대로 정식 심문관들은 도리어 출입금지를 먹은 상태다.

이단의 문화로 가득 찬 이곳에 심문관들이 활개 치게 두어봐라. 그걸로 영지의 근간이 붕괴될 게 뻔한 일이다.

당연히 심문관 지망의 사람은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네가 여길 벗어나 심문관을 하건 뭘 하건 좋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그에 대해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네 뭐……. 주의할게요."

뭐가 됐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들락거리는 데엔 문제는 없게 되었다.

셰인은 도서관의 안으로 들어서고 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단의 책을 모아두었다고 했는데…. 역사서나 문학서적은 없는 건가.’

도서관에 들이는 서적들은 대체로 정리본과 참고서적, 혹은 그 편집본들이다.

그 중에 타국이 주로 연구하던 분야가 엿보이긴 했지만, 정작 그 연구결과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혹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과학사와 발견자’에 연관된 내용들은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다.

‘치외법권지라도 정보의 통제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는 건가.’

반대로 정보의 절제가 거의 없는 분야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공학.

공학의 경우에는 오히려 군의 주축으로 삼을 정도로 다양한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것도 일단은 마도문명이기에 통제된 부분은 없다.

연금술에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화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학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문제는 없다는 거지.’

비록 정제된 약의 레시피는 없지만, 그 기반이 되는 화학에 대한 자료만 있다면 약을 제조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히.

‘심장질환을 호전시켜줄 치료제도 분명히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래, 친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의 제조도 빼먹어선 안 되겠지.

그것을 위해 필요한 서적을 들고 좌석을 찾아가던 중, 문득 근처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펜을 사용하는 소리였다.

‘여기에 누가 또 있나?’

향하고자 하는 좌석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잘 정돈되지 않아 여기저기가 툭툭 튀어나온 장발에, 사이즈가 맞지 않은 하얀 가운을 몸을 두르고 있는 여인.

그 배후에서 무엇을 하나 보자 노트에 글을 끼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질소, 산소, 탄소 등등…….’

각종 원소를 의미하는 글자에 수식. 화학의 기본이 되는 화학식이었다.

정확히는 공식이 잘못된 화학식.

"거기 틀렸어요."

셰인이 그 점을 보자마자 바로 지적을 해주었다.

뚝, 하고 멈추는 손.

잠시 펜을 놓은 여인이 셰인을 슬쩍 돌아보며 안경을 치켜세웠다.

"틀렸다니요?"

"암모니아의 화학식은 수소 셋에 질소 하나예요. 그런데 거꾸로 적혔잖아요. 제가 알기로 그런 조합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어머, 정말이네?"

노트를 마저 확인한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수정하곤, 몸을 돌려 셰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적해주셔서 고마워요 꼬마사제님."

마주한 외형은 셰인의 입장에서도 특이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이나 입을 법한 하얀 가운에, 구불거리고 잘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는 안경까지.

성인인 듯하나,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소매가 아예 손을 감쌀 정도로 몇 사이즈는 크다.

‘안경알도 너무 두꺼워서 눈이 안 보일 정도네.’

그런 독특한 외형의 여인이 소매로 안경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꼬마 사제님. 방금 전에 화학식이 틀린 걸 바로 알아보셨는데, 혹시 주기율표에 대해서 알고 계신 건가요? 어지간하면 마법사 출신이나 알고 있는 자료인데……."

"책 정도야 마탑이나 아카데미 외에서도 구할 수 있죠. 딱히 다른 학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독학 정도는 기회가 된다면 어디에서든 할 수 있고요."

"단순 암기면 몰라도 응용하는 건 독학으론 쉽진 않을 텐데…."

"그런 경우도 있는 법이죠."

대강 얼버무렸지만 그녀의 의문은 굉장히 타당한 것이다.

실제로 교단사람들은 연금술을 싫어하다 못해 배척할 정도니까.

그런 마당에 화학의 필수지식 중 하나인 주기율표를, 사제복을 입은 소년이 알고 있다면 누구나 의외라고 여길 것이다.

"음, 사제복을 입고 있는데도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고……. 굉장히 특이하신 분이네요."

‘그 쪽 만 하시겠습니까?’

속내를 숨기며 애매히 웃음을 터트리니, 여인 쪽에서 반가움을 표해왔다.

"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을 여쭈어 봐도 될까요?"

"셰인이라고 불러주세요."

"누나는 케이미라고 해요. 케이미 케미스트리."

싱긋.

반갑게 웃음을 지은 케이미가, 하얀 가운의 소매에 덮인 손을 들어올렸다.

나름대로 친근함을 표한 것이다.

"그런데 사제복을 입으셨는데 화학 지식을 접했고……. 혹시 심문관 지망인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애초에 이 영지에 온 것도 이단혐의 때문에 그런 거고."

"아하, 벌 받는다고 여기 와서 봉사를 하게 된 거군요!"

그걸 굳이 팩트로 때려야겠냐.

속내를 억누른 셰인이 마저 제 사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벌이라기보단 그냥 사정이 있어서 잠시 그 쪽에 신세를 지는 것뿐이죠. 교단사람들도 이단 혐의를 가진 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고요."

크리스틴이 없었다면 애초에 신성지원부대에 들어가지도 못했겠지.

그런 셰인의 발언이 도리어 반가운 듯, 케이미가 소매에 감싸인 제 양손을 탁, 부딪쳤다.

"교단 소속이 아니라면 화학에 대한 얘기를 나누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그럼~ 실례가 되지 않으면 제 연구에 대해서 조언을 구해 봐도 될까요?"

싱긋 웃으며 노트를 내세우는 케이미. 셰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저에게 조언을요?"

"셰인은 화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보여서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연구에서……. 여기, 이 공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나, 한 번 여쭤보고 싶네요."

노트 안에 적힌 건 악필로 적혀 있는 각종 화학식들.

고대문자마냥 난해하나, 다행히도 알아보는 데엔 별문제가 없었다. 셰인이 그 문자들을 하나 둘씩 훑어 읽어보았다.

‘탄산나트륨에 암모니아. 그리고 각종 질산화합물……. 음?’

낯익은 분자식들을 본 셰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다.

자료를 조사하기 이전, 대강 떠올리고 있던 ‘심장질환 치료제’에 쓸 것을 고려하던 물질성분들이다.

‘이 사람, 혹시 약제사인가?’

신성력의 존재로 의료가 도태되다 못해 핍박을 받는 시대.

이단의 영지에서조차 의학이 발전될 기미는커녕, 생화학 병기라는 이미지가 강해 기피되는 면이 큰 상태다.

이단의 지식을 모아둔 도서관에서도 의료서적은 흔적도 볼 수 없던 상황.

그런 마당에 약의 재료로 쓰이는 화학식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얼 만드시려는 건가요?"

어쩌면.

혹시나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런 셰인의 물음에 케이미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폭탄이요."

"아, 폭탄……. 네?"

"누나는 연구반에서 화약병기 제조를 담당하고 있거든요. 각종 폭발물이나 총기에 쓰이는 화약들을 제가 만드는 거죠. 어때요? 저, 보기보다 굉장하지 않나요?"

"……."

케이미 케미스트리.

우연히 마주한 영지의 연구원은 셰인의 예상대로 약제사가 맞았다.

‘화’약 제조사인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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