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46화
블레이즈 영지는 규모에 비해 교단 소속의 인원은 많지 않은 편.
성직자들은 이단의 영지에선 매 순간 신앙을 시험받으며, 교단 본진과도 거리가 있어 교류에도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즉 블레이즈 영지에서 치유를 전담하는 성직자들은 엄연히 고급인력인 셈.
그런 만큼 최소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참여하는 순례원정은, 영지 전체가 신경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중대한 행사라 할 수 있었다.
"순례원정에 참여하는 분들은 이게 전부입니까?"
"네, 최소인원과 수행원들을 제외한 전원 참가입니다."
성벽의 앞에서 원정에 필요한 물품을 마차에 실어 넣는 인부들.
그 앞에는 각각 100명씩 이루어진 3개의 성기사단과, 영지에서 치료를 전담하는 이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0여 명의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총원 400여명.
그 숫자가 적게 여겨진 듯, 핀들레이 주교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좋지 않군……."
제국 내에 교단에 속해 있는 이들은 총 제국민의 1/3 정도.
그 중 신성력을 다룰 자는 반절 채 안 된다곤 하나, 어쨌든 이 대륙은 교국이란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신앙을 중시하는 곳이다.
그런 마당에 권위만은 후작 못지않은 변경백의 영지에 있는 사제가 500명 채 안 된다니.
본래 활동지에서 집회 시에 수만의 신도들을 대면했던 걸 생각하면, 공허함마저 느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 올해엔 참여하는 수행원분이 두 분이나 되는군요?"
반면 기존의 원정에도 참여했던 이들에게 이번 원정은 의외라 여겨지는 일이었다.
본래 신성력을 다루지 못하는 아이들이 참여를 기피하는 걸 생각하면 의외라 여겨질 광경이었으니.
"크윽."
그를 기뻐하는 수녀를 보던 핀들레이가 작게 혀를 찼다.
수녀복을 입은 초췌한 소녀가 아닌, 그 옆에 자리한 금발의 소년을 보면서.
"……이단 녀석."
‘저 아저씨는 또 왜 저런다냐.’
마음 같아선 핀들레이 대신 크리스틴이 참여하길 바랐지만, 크리스틴은 이 영지의 최고참인 성직자이기에 유사시의 대응이 가장 원활한 사람이었다.
그마저도 혼자선 처리가 어렵기에 불려온 것이 바로 핀들레이 주교.
크리스틴과 마찬가지로 ‘차기 추기경’으로 점쳐지는 명망 있는 성직자 중 한 명이었다.
"네가 허튼 짓을 하는지 계속 지켜볼 것이다."
핀들레이가 그리 말하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현 원정을 주도하는 고위사제와 성기사단장들이 있는 곳으로.
셰인은 그런 핀들레이 주교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특이케이스일 뿐. 독실한 신자일수록 이단에 대한 혐오가 짙은 수밖에 없겠지.’
오히려 저게 당연한 거다. 생각할 무렵, 셰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베르디가 조용히 물었다.
"주교님도 괴롭히실 건가요?"
"하겠냐."
할 마음이 있더라도 못한다.
교단도 군대와 마찬가지로 서열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니까.
* * *
"주님께서 말하시길. 설령 태어난 땅을 떠날지언정 그 흔적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며, 그 흔적을 기억해주는 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혼이 안식에 들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들은 이 제국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고자……."
출발을 앞둔 직후 연설을 하는 고위사제들.
성직자들은 그를 앞둔 채 조용히 묵념을 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숫자는 400명 남짓이나, 두 명을 제외한 전원이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성직자들이었다.
그건 같은 미성년자로써 셰인의 옆에 자리를 잡은 레온 역시 마찬가지.
그는 마치 어린 수행원들의 대표라도 되듯, 셰인과 베르디의 선두에 선 채 팔짱을 끼며 떳떳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내 이제껏 너에겐 몇 번이고 굴욕을 맛보았으나, 지금부터 있을 원정에선 다를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기사단을 따르며 실전을 겪은 몸. 이 원정을 끝마칠 때까진 너희들을 지지하는 방패가 되어줄 테니, 안심하고 나에게 의존하도록 해라."
"어, 응. 그래. 고맙다."
셰인이 껄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솔직하고 당당한 녀석이기에 더 부담이 되는 태도였다.
그리고 체험해본 바, 대개 성기사란 녀석들은 다 레온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연설을 한 고위사제의 옆에 선 이 역시 그랬다.
"내 빛을 신봉하는 기사단의 대표로써, 주님을 향한 충의와 신앙을 이 검으로 표하겠소."
찬란한 갑옷을 걸치고 있는 기사가, 태양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자신의 대검을 들어올렸다.
신성력에 태양빛이 더해지니 주변이 밝게 비춰졌다.
모두의 얼굴이 경외로 물들어지는 가운데, 자부심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 레온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저 분이 내가 속한 태양기사단의 현 단장님이자 나의 형이 되신 분이다. 이름은 라이너 아슬란. 내가 태어나기 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 영지에 와 신성력을 각성하고, 현재엔 은퇴하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단을 물려받았지."
"그래 대단하네."
젊은 나이에 기사단장이 된 것보다, 동생과의 나이 차이가 두 배나 난다는 게 더 신기하게 여겨진다.
"형님께선 이번 원정이 끝나면 잠시 기사단을 벗어나 혼약을 맺을 예정이다. 오랫동안 고대해 온 행사인 만큼 가문의 일원 모두가 참여할 예정이며, 나 역시 형님과 함께 잠시 양해를 구하여 영지를 벗어날 예정이지."
"그러냐."
"하지만 너는 참여하지 못하겠지. 그야 너는 죄수의 신분이니, 형기를 마치기 전까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래 정말 아쉽네."
"기념품이라도 가져오길 바란다면 내 아버지에게 말해 가문의 창고에서 하나 가져오도록 하겠다. 무엇이 좋겠나? 검? 아니면 갑옷?"
"프로틴으로 부탁할게."
"……프로틴? 그건 무엇이지?"
"있어. 마시면 근육 성장에 엄청 도움이 되는 거."
라인하르트 가문의 영약이 프로틴과 비슷했었지.
그에 셰인을 골리고자 했던 레온이 눈을 초롱초롱 뜨기 시작했다.
"근육, 프로틴……."
‘…나중에 하나 만들어줄까.’
그런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연설은 끝이 났고, 개방된 성문을 통해 원정대원들이 성벽 밖으로 나갈 준비를 치르게 되었다.
당연한 거지만 장기적인 원정이 되니, 행군에 익숙한 성기사들을 제외한 사제들은 마차를 타고 순항을 할 예정이었다.
그저 편히 이동하기 위해서가 아닌, 원정 중의 안전을 빌고자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신성력의 원천이 기도임을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 역시 실질적으론 원정에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성문을 개방하겠습니다."
"모두 대열 정비!!"
이윽고 서쪽 성벽의 문이 열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성기사단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는 거대한 짐마차.
셰인이 마차를 두르는 천을 슬쩍 걷어내자 성벽 밖의 풍경이 훤히 드러났다.
‘여기가 성벽 밖인가.’
본래에는 고원이었던 장소.
하지만 통행을 위해 다져진 길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모래와 자갈로 덮여져 있었다.
‘몇 번이고 뒤집어진 건가.’
이제까지 성벽 밖에서 무수한 격전이 있었고, 그 충격에 땅이 붕괴되어 사막처럼 바뀐 것이다.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엔 아직 깎이지 않은 고원의 땅이 있고, 그 곳곳엔 크고 작은 크레이터 구덩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구덩이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 마물의 살점일까?
본진과 가까우니 소강상태에서 시체들은 회수한 듯하지만, 군데군데에 보이는 핏자국은 이곳에도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많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베르디 역시 그런 처참한 광경을 셰인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성 밖은 이런 풍경이었네요."
베르디 역시 성벽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일 터이거늘.
결코 14세의 소녀가 보일만 한 반응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비단 셰인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굉장히 조숙하군요."
"네, 하지만 베르디는……."
두 사제가 말을 주고받다, 베르디를 향한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었다.
셰인은 왜 그들이 베르디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그들의 태도를 보며 베르디에게 얽힌 사연을 유추할 뿐.
"신이시어. 부디 저 아이에게 구원을……."
원정의 무운을 빌어야 하는 기도 속엔, 베르디에 대한 동정도 적잖게 차지하고 있었다.
* * *
당연한 거지만 셰인은 신을 믿지 않으며, 원정 중에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니 기도를 대신해 제 나름대로 할 일을 찾아 행할 뿐.
‘다음엔 뭘 만들어볼까.’
마침 가지고 온 소품 중엔 도서관에서 대여해온 서적들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읽던 중 필요한 내용을 노트에 차례차례 정리해갔다.
‘연고는 아직은 무리겠지만 피부 미용이라면 귀족들도 많이 쓰니 그 쪽을 통해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리고 프로틴도 영약을 참고해 레시피를 짠다면…….’
의약품 중 대다수가 교리에 걸리긴 하나, 모든 의약품이 교단의 반감을 사는 것은 아니다.
파스는 물론이고 반창고 역시 좋은 반응을 얻은 상황. 우회하며 접근한다는 행위가 나쁘지 않다는 건 증명된 바였다.
물론 그마저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이곳에 여럿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아무도 방해하진 않는군.’
신도들은 셰인이 뭘 하건 상관없이 기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처럼 셰인의 활동을 긍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순례원정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고자.
이단의 문화를 정벌하기보단, 자신의 신앙을 키워가는 행위에 집중할 뿐.
"주여, 부디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이 여정에 빛이 있으라."
그 기도문이 셰인에게도 그다지 나쁘게 여겨지진 않았다.
블레이즈 영지에 온 후 2달이 지난 현재, 교단 사람들의 기도문은 물소리나 새소리처럼 그의 환경에 녹아들어 있었으니.
"습격이다!!!"
그렇기에 정적이 깨어지는 순간 역시 즉각적으로 반응을 했다.
마차가 멈추고 난 후, 천막 너머에서 성기사들이 태세를 갖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라니, 순례 원정은 안전이 보장된 게 아니었던가?’
아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 날을 위해 한 달이 넘게 주변을 정찰했고, 성벽 밖에 자리한 각 주둔지로부터도 꼬박꼬박 보고도 받으며 시기를 모색했다.
영지군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한 셈.
그럼에도 위험을 전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벽외지역이란 것이다.
"저희도 나서죠."
무장한 성기사들이 태세를 바로잡은 가운데, 곧 사제들이 마차 밖으로 하나 둘 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나가야 할까, 생각할 무렵 마지막으로 나서던 사제가 베르디와 셰인에게 제지를 가했다.
"두 사람은 안에 있으세요. 여러분들은 이번 원정에 어디까지나 견학차 오신 것일 뿐이니."
배려인가. 아니면 행여나 아이들에게 위험이 생길까 불안해서인가.
어찌되었건 성직자들은 무장 하나 없이 위험한 장소로 나아갔다.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위험을 대면하는 것 역시 고행의 일종이라 여겼기에, 그리고 자신들을 지켜줄 성기사단의 강함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전열을 유지해라!!"
"사제님들을 지켜라!!"
총원 300여명.
그만한 숫자의 성기사단원들이 주변을 둘러치며 제 몸에 힘을 끌어 모았다.
은빛의 갑옷들이 신성력을 받아들이며 광명을 일으킨다.
창끝의 빛은 더욱 선명히, 날이 벼려진 칼은 더욱 예리한 섬광을 일으킨다.
그러한 빛이 모이며 생겨난 광명은 그들의 웅장한 위세를 더욱 크게 키워갔으니…….
-크와아아악!!
하지만 이후에 몰려드는 괴물들은 그에 주눅 들지 않고, 매료될 만한 이성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마물.
벽외지역에 주로 서식하는 생물로, 생김새는 물론 크기도, 생태나 활동도 전혀 일정치 않다.
심지어 번식마저도 출산이 아닌 분열로, 필요한 양분이 모이면 자신의 몸을 분리해 수를 늘려간다.
‘전쟁 이후에 돌연히 나타났다고 했었지.’
전쟁 후 제국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대대적으로 토벌이 이루어진 뒤엔 예외 없이 대륙의 변경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정확히는 구석까지 몰아 일망타진을 할 생각이었지만 실패했던 것.
대륙 각지에 흩어진 마물들을 한데 모으니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고, 도리어 좁은 장소에 모이니 집단성을 각성하여 마물로 이루어진 대군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즉, 벽외지역은 어디서 마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마경이라는 것.
그리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물이란 대형종이 아니라면 이 땅에선 위험 축에도 끼지 않는단 것이다.
‘사교도처럼 악의가 있지도 않고, 반란군처럼 작전을 세우지도 않으니까.’
그저 개떼처럼 몰려오고 식욕을 불태울 뿐.
병력과 태세가 갖춰진 군대엔 별 문제가 없는 적들이다.
‘뭐, 보잘것없는 놈들이니까 느긋하게 구경해도 되겠지.’
과연 이 시대의 성기사단은 과연 어느 정도의 전력을 지니고 있을까?
마차에 숨어서 지켜보고자 생각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셰인의 소매를 슬쩍 움켜쥐며 당겼다.
셰인과 마찬가지로 마차에 머무르게 된 베르디였다.
"셰인. 신성력을 쓸 수 없는 우리는 이 상황에 뭘 해야 할까요?"
기껏 따라와 놓고 가만히 있는 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셰인이 그런 베르디를 멀뚱히 쳐다보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으니까 사탕이나 까먹고 있자."
"……."
베르디가 말없이 입에 사탕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