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51화
태양, 황혼, 불사.
현 순례원정에 참여한 세 개의 성기사단으로, 그중 불사의 이름을 가진 기사단의 단장 팔란은 산지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었다.
본래엔 각 기사단당 100명에 준하던 인원이 함께했으나, 정작 현재 그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은 2할 채 되지 않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날아든 바윗덩어리에 일대가 붕괴되고, 그 충격에 의해 본대와 격리되고 말았으니…….
"남은 건 열다섯인가……."
그 습격에 의해 함께한 일원 중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 반절 이상은 걷는 것조차도 버겁다.
함께했던 사제들은 진작 습격으로부터 목숨을 잃은 상황.
성기사 역시 신성력 보유자이지만, 그마저도 대개 응급처치 정도의 효과만 빠르게 보는 정도로 사용될 뿐.
기도로 신성력을 축적하는 성직자들에 비해, 그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단 것이다.
"분명히 이 주변은 안전하다 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겨우 숨통만 유지되는 상황에, 모래바람 너머에는 야만족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그림자가 얼핏 보이고 있었다.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
그런 암담한 처지에 신앙마저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그들을 둘러보던 단장인 팔란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모두 나를 따르라."
"따르라니, 무슨……."
눈을 부릅뜨는 부단장.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망설임을 읽었음에도 팔란은 제 의사를 강경히 밀어붙였다.
"이 중에 우리가 짊어진 기사단의……. 불사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모르는 자가 있는가?"
불사의 기사단. 통칭 불사대.
그들은 200년 전의 전쟁에서도 언제나 선두에 서며,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아군을 지켜온 자들이었다.
사지가 찢어지고 심장이 멈추더라도, 의식이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전장으로 나아가던 불굴의 기사단.
그 의지를 계승한 이들에게 있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절망 따윈 그 이름을 더럽히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의지를 이어받은 우리가 어찌 열세라는 이유로 절망한단 말이냐? 도리어 마지막이기에 우리들은 더욱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 한들, 우리가 발휘한 필사의 의지만큼은 천당에 닿게 될 테니!"
천당.
모든 생명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죽음의, 그 너머에 존재하는 연장선이자 신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곳에서 죽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올곧음을 증명한다면 빛은 천당으로 향하는 길을 밝혀줄 것이다.
그 믿음이야말로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죽음마저 불사르는 이유다.
"그러니 두려움을 버리고 각오를 굳혀라! 저 빌어먹을 야만인들을 한 녀석이라도 더……."
-투콰강!!
연설을 이어가던 중 울려 퍼지는 대찬 붕괴음.
그에 말문이 멈추고 만 팔란의 시선이 바위 밖으로 향해졌다.
야만족들이 거닐던 길목에 배치된 바윗돌이 산산조각 나있다.
그 파편 밑에 보이는 손과 발. 야만족들이 파편에 깔려 쓰러졌단 것이다.
그 범위 밖에 있던 야만족들이 동료의 죽음에 겁을 먹으며 언덕 아래로 도망쳤다.
"무, 무슨……."
"야 이 멍청아. 너 내가 자세 그따위로 잡이 말라고 몇 번 말했어? 알아서 합 맞춰줄 테니까 되는 대로 날뛰라고 했잖아!"
경계심을 느끼는 가운데 들려오는 목소리.
무너진 파편을 넘으며 다가오는 건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를 뒤따라 나온 누군가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난 평소처럼 했을 뿐이다. 오히려 네 움직임이 너무 난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럼 사방이 적인데 대련할 때처럼 정자세 잡고 싸우냐? 적들은 네가 바라는 그 쥐좆만 한 배려하나 안 해주는데, 그렇게 1:1 하듯 싸우면 나 죽여줍쇼 하는 거밖에 더 돼!?"
성난 목소리.
하지만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
적어도 야만족은 아니라는 의미.
다가온 둘 중 한 명을 알아본 팔란이 그 이름을 외쳤다.
"레온!"
레온 아슬란.
그 역시 팔란을 알아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그 옆에 서있는 자의 얼굴은 뚱하기 그지없었다.
"그 쪽은……."
"네, 이단 녀석입니다. 저도 제가 개자식인 거 아니까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빈정이 상한 목소리.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이단 딱지가 붙을 걸 경계하며 선수를 친 것이다.
야만족들이 원정대를 습격한 급박한 상황에, 약간의 긁어 부스럼에 할애할 시간도 아까운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거기, 생존자 몇 명이에요?"
잡설은 생략하고 중요한 것부터.
그런 강경한 태도에도 팔란은 경계심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서로 위기에 처한 마당에 척을 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포함해 열다섯……. 그중 반절 이상이 거동도 어려운 부상자다."
"상태 좀 보게 비켜 보세요."
대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셰인이 팔란의 옆을 지나쳤다.
그런 행동이 당혹스러운 한편, 그 이상으로 뒤를 지키고 있는 레온이 더욱 신경 쓰인다.
주변을 지키는 레온을 돌아본 팔란이, 이내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을 지긋이 응시하였다.
‘저 검은 라이너 단장의…….’
태양검.
분명 태양 기사단의 단장에게 대물림해 온 성유물이었다.
그 검을 레온이 가진 것만으로, 본 소유주가 어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지가 꺾이지 않고 있다.’
레온에게선 여전히 빛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 가족과 신자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가짐을 이 어린 소년이 혼자 이루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와 함께 자가 이끌어주었기에…….
"끄아악!!"
그 생각이 비명소리와 함께 단숨에 지워졌다.
당황하는 팔란이 다급히 셰인을 뒤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무, 뭘 하고 있는 건가!?"
"뭘 하긴요. 탈장이 났으니까 바로잡아주려는 거지."
손이 환자의 복부에 반쯤 파고들어 있다. 절개술로 배를 찢고, 그 내부를 헤집고 있는 것이다.
"이야, 참 더럽게도 꼬였네. 잠깐 좀 참아 봐요."
"끄으윽!!"
상처부위가 벌어지며 느껴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성기사.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단장이 다급히 세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당장 그만두게! 대체 뭘 하는……."
-쉬릭!
뒷말을 삼키는 마찰음.
셰인이 입고 있는 옷에서 실오라기를 뽑고, 그것을 손가락에 세운 마나의 바늘에 걸며 휘적이는 소리였다.
그 움직임이 춤사위라도 되듯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바늘이 피부를 뚫고, 찢어진 부분을 봉쇄하기까지에 걸린 시간은 고작 수 초.
상처부위가 빠르게 봉합된 직후, 그 상처가 환자 본인의 신성력 덕에 느릿하게나마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 끝. 자, 다음."
"무, 무슨……. 크윽!"
호통 치는 것마저 잊어버린 부단장이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셰인이 혀를 끌끌 차며 그의 무릎을 손으로 두드렸다.
"거 인대 나간 상태에서 이렇게 서있으면 쓰나. 부목 대줄 테니까 움직이지 말아요."
주워온 나뭇가지와 붕대를 이용해 다리를 묶어주는 셰인.
통증이 아주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절어대었던 다리의 떨림이 부목을 댄 순간 멈춰졌다.
그를 보던 팔란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이건, 용병들의 요법인가.’
부러진 뼈를 바로잡거나 상처를 꿰매어 출혈을 막는 등.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한 그들은 상처를 자체적으로 치료하기도 하지만, 그런 방편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처가 덧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단에선 그런 행위를 두고 ‘육체조작의 위험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생명이란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창조물이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인간이 쉬이 넘봐선 안 될 일이다.’
자칫 그 완벽함에 해를 입히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시대에서, 이 소년의 처치엔 미숙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접골과 봉합, 신경 마비를 치료하기 위한 충격요법 등등. 그 모든 것이.
"크, 으윽."
"아픈 거 저도 아는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 참아 봐요. 그 왜, 원정 중에 고통 참는 것도 고행이라면서요?"
그 핍박에 성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살을 찢는 등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치료라 말하고 있었지만, 막상 결과만을 본다면 신성력의 느린 회복에 의존할 때보다 빠르게 안정되었으니까.
그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감탄만을 내뱉는 가운데, 처치를 끝마친 셰인이 손을 털어내며 팔란을 마주하였다.
"…이걸로 끝낸 건가?"
"완벽히 회복한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응급처치고, 제대로 된 치료를 위해선 신성력을 장기간 쐴 필요는 있겠지만……."
-뿌우우우우~!!
"…아무렴, 저놈들이 기다려줄 리가 없지."
뿔피리 소리.
그 소리를 감지한 셰인이 다급히 바위 뒤편으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레온이 셰인을 향해 외쳤다.
"셰인. 주변에 적들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 후, 주변에 다수의 그림자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장 언덕 위로 보이는 놈들만 해도 수십 단위.
배후에서 몰려드는 녀석들까지 합친다면 백은 가뿐히 넘어설 것이며, 그 숫자는 소동이 커질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셰인이 기사들 중 부상이 가벼운 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거기 그쪽 네 명. 여기 부상자들 네 명 업고 뛰는 정도는 할 수 있죠?"
그 다음으로 지목한 건 기동조차도 버거운 이들.
싸움이 어려운 자들에게 치명상을 입은 자들의 호송을 맡기는 것이었다.
"어, 으응……."
하나 같이 떨떠름한 반응이나 일단은 긍정이 돌아왔다.
그 대답을 들은 셰인이 품에서 꺼낸 붕대를 손에 두르며 팔란을 돌아보았다.
"단장님.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의 지시를 부탁드릴게요."
"지시라니……. 설마 저들과 싸우려는 겐가?"
"싸우는 게 아니라 튀어야죠. 먹지도 못하는 놈들을 잡아 족쳐서 저희한테 무슨 득이 있다고."
셰인이 붕대가 감긴 손을 펼쳐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끝이 향해진 방향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장소.
두 개의 절벽이 마주보고 있는 협곡지대로, 그 너머엔 산봉우리에 세워진 건축물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제3주둔지. 블레이즈 영지에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운 곳이자, 본래 순례원정의 목적지가 된 곳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생존자들이 저쪽으로 모이는 걸 봤어요. 적들의 정확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기서 농성이라도 하면 인력차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겠죠."
"그건, 나도 알고 있다만……. 자네는 진심으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겐가?"
그게 불가능하다 여겼기에 이 자리에 뼈를 묻을 것을 각오했던 것이거늘.
"못 뚫으면 여기서 죽어야죠."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도 셰인은 굴하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죽어도 빛은 비추리라……. 당신들 교단에선 그렇게 가르치겠죠. 근데 이 중에서 당장 천당에 가고 싶은 사람 있어요?"
"그건……."
"천당에 한 번 가면 다시 이 땅에 돌아오지도 못할 텐데, 그럼 못 다한 거 다 하고 구할 사람도 다 구하고 떠나야지."
의사된 자가 천당을 긍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환생 이후에는 더더욱.
죽고 난 후에도 사후세계에 가본 적이 없으니, 아직까지도 셰인은 천당의 존재유무를 확실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하나만은 단언할 수 있다.
사후세계가 당장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의란,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위안뿐이라는 걸.
그러니 그 어떤 사람도,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리란 걸.
"주님도 천당에 오기 전에 신자들이 더 의미 있게 살기를 바라겠죠. 그러니 살아 있다면 끝까지 살아보자고요. 여유가 되는 선에선 다른 사람들도 지켜주고."
언젠가 죽는다면 의미 있게.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중요한 순간엔 잊어버리고 마는 결의.
"……그래, 네 말대로다."
그것을 14살의 소년이 한 말로부터 되새긴 팔란이, 이내 결심을 굳히며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소년이 지정한 대원들은 부상자들의 호송을 맡도록. 그리고 검을 들 수 있는 자들은 나와 대열을 맞춰 길을 열어라! 모두 협곡으로 이동한다!"
"우오오오!!"
이윽고 기사들이 부상자들을 업고, 검을 뽑으며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결사의 각오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