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58화 (58/255)

의무병의 환생 58화

‘……성이 카일이야?’

‘아 네. 카일 가(家)의 메디슨입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널 지도하게 될 대장인 카일 페터슨이라고 해.’

‘네, 잘 부탁드립니다. 카일 대장…… 네?’

‘이름이 카일이라고 했어. 내가 그 쪽 가문에 데릴사위로 가면 카일 카일이 되겠네.’

‘네, 네네!?’

‘농담이야.’

정말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애초에 전쟁터에서 구르다 보면 그런 걸 느낄 새도 없고, 뭣보다 상대는 자신 같은 길거리 한량 출신이 넘볼 만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카일 가문이면, 그 유명한 제약 업체 아니었던가?’

약사조합 메디칼리아.

카일 가문을 필두로 이루어진 조합으로, 아이헨발트에서 유통되는 약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나온다 봐도 무방하다.

자신의 부관으로 차출된 자는 그런 명문가의 일원.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열세에 몰린 전장에 서지 않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가문에선 반대했어요. 제가 여기에 오겠다고 한 거요.’

당연히 그러겠지.

아무리 후방이라도 자기 딸내미가 전장에서 궂은일을 하겠다는데, 누구라도 말릴 것이다.

‘그런데 굳이 왜 여기에 온 거야?’

‘누군가는 해야 한다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배운 지식들은 엄연히 사람을 살리는 것들인데, 이런 때를 위해 배운 걸 저 하나 지키자고 썩힐 순 없잖아요?’

‘…….’

‘…오, 왜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아니 뭐, 비슷한 소릴 하는 사람이 있거든.’

메디슨 카일.

그녀 역시 자신의 스승처럼 참된 의사의 정신을 가진 자였다.

그런 면모는 카일에겐 동경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스승의 부재가 더욱 크게 체감되었기에, 그런 마음 역시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라면…….

반푼이인 자신과 달리, 스승과 같은 제대로 된 의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당시의 카일은 그런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정작 전혀 관련 없는 미련 하나가, 그 소망을 어그러트리리란 걸 알지 못한 채로.

* * *

‘대장. 마투술이라는 거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느덧 휴식 시간 중 돌연히 이어진 물음.

그건 카일이 남 몰래 되뇌고 있던 ‘미련’의 흔적이었다.

‘……그거 어디서 봤어?’

‘아, 그……. 대장님 책상 정리하다 전장 호신술이라는 걸 발견했는데. 그거 대장님이 집필하신 거 맞죠?’

‘…….’

‘대, 대단하세요! 내용만 봐도 학계에 논문으로 제출해도 될 정도예요! 기용된 마나 운용부터가 기존의 체재를 재해석한 수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직 미완성이니까.’

그저 스승이 남기고 간 민간요법서와 무협지를 참고하고, 의사가 되기 전에  활동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만든 것일 뿐.

그 모든 것은 환자를 돌보는 데엔 필요치 않은 헛짓거리였다.

그런 걸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정작 부관은 그런 기술에라도 매력을 느끼고, 자신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르쳐달라니, 격투기를?’

‘아 그……. 일단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이런 상황이니까, 자기 몸을 지킬 능력 정도는 가지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전장에 섰다면 비전투원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 의견만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며, 그건 기술을 전수해준 카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뭣보다 이걸 익히면, 유사시에 환자들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선 안 됐다.

고작 그런 목적으로.

그 정도의 감상으로 가르쳐선 안 됐다고 누누이 생각해왔다.

그런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카일은 그런 후회를 불러일으킬 일을 당시에 자각 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의 그는 세상이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정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으니…….

* * *

‘이 미친 새끼들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호출을 받고 본대에서 떨어진 사령부에 향했을 무렵.

카일은 자신이 속한 부대를 활용한, 자신도 모르던 계획을 뒤늦게 접하며 그들을 향해 증오를 터트리고 말았다.

적군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극명한 살의였다.

마주하는 적들은 이름도 사정도 모르지만, 상부는 제 앞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페터슨 대장. 이 자리에서 그런 과격한 언동은 삼가도록 하시오. 이곳에 있는 건 연합국의 수장들과 군의 지휘자들이니.’

‘그딴 게 중요해!? 지금 니들이 작전이라고 떠들어대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돌아보고나 씨부려!’

전쟁에 있어 병력의 충원보다 중요한 건 보급과 인명구조.

그 둘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군대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결국 전멸하게 된다.

그리고 연합군의 장교들이 노렸던 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병력을 전선에서 교묘히 이탈시키고, 부상자들을 미처 본대로 호송하지 못해 그 자리에 남는 부상자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미끼로 삼는다.

그렇게 적들의 주요 병력을 일망타진해 승리를 위한 초석으로 삼는다는, 그런 정신 나간 작전.

‘이걸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대가 이끄는 부대가 살릴 사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오?’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지에서 직접 목숨을 거는 자들이지, 결코 탁상공론과 숫자놀음에 정치질을 끼얹는 머저리들이 입에 담을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머저리이기에 그런 말을 생각 없이 입에 담을 수 있던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아이헨발트의 지원부대는 제국의 신성부대와 비교하면 그 능률이 떨어지지. 전쟁이 이어진지도 10년을 훨씬 넘긴 마당에, 그들과 우리간의 차이는 크게 벌어지지 않고 있소?’

‘그런 열악한 존재라도 적들은 경계하니 그들을 미끼로 하여, 적들의 주요 병력을 일망타진하는 게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최적의 방도겠지.’

‘카일 페터슨, 그대는 우리 군에 오래 봉사해 온 장교임에도 어찌 대국적인 시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오?’

대국은 얼어죽을.

제국은 고작 전선 하나 무너진다고 꺾일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다.

그런 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그 당시 연합군을 이끄는 수뇌부란 녀석들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며 패전한 자들이 책임을 진 채 사임하고, 그 빈자리를 정치에 미친 무능한 놈들이 채워갔기에…….

그런 녀석들에게 있어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은, 그저 제 출세들을 위한 제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머지않아 멸망할지도 모르는 나라에서의 출세를 위한……. 그런 무의미한 희생양으로.

‘그딴 소리를 자기 부하 면전에 대고 떠들어대니까, 군대의 주적이 간부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이 빌어처먹을 새끼들아.’

항명을 가장한 욕을 내뱉은 후, 카일은 사령부를 벗어나 다시 전선으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이후 뒤에서 처형이네 뭐네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래도 좋다 생각했다.

정녕 자신이 틀렸다면 전쟁은 그걸로 끝나고, 그렇게라도 전쟁이 끝난다면야 이 목을 얼마든지 목을 내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저 멍청한 놈들의 머리에서 나온 피로 무고한 희생자들의 묘지를 적셔주리라.

당시의 카일은, 그런 반란의 계획마저 품으며 뒤늦게 제 부대로 복귀하였다.

정녕 그 뒤에 있는 광경이, 그런 증오마저 죽이게 되리란 것을 알지 못한 채.

* * *

‘부관! 부관 어디 있어!’

사령부를 이탈한 카일은, 이후 홀로 본대로 돌아와 미친 듯이 그곳을 누볐다.

진작 모든 사건이 종결된 현장.

하지만 그곳엔 그 어떤 고통도, 비명도 난무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죽어서?

아니, 정말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가 돌보고 있던 환자들도, 부하들도 죽은 사람은 소수였다.

그리고 그걸 이룬 것은 자신의 부재를 대신한 자.

적의 정찰부대를 단신으로 저지함으로써, 이곳의 주둔병력을 과대평가하게 하여 제국군을 물려낸 자가 존재한 덕이었다.

‘대장, 거기에 계신가요?’

폐허가 된 주둔지.

그 앞에 자리한 평원에, 메디슨 카일이란 이름을 가진 병사가 홀로 선 채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지만 분명 살아있었다.

살아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저,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그 피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환자의 것도 아니다.

‘사람들을 살리려고…….’

그녀의 발밑에 자리한 적군들의 피…….

그들 중 살아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장이 가르쳐준 대로 했어요. 그, 호신술 덕에……. 환자들을 지킬 수 있었어요.’

날카로운 손은 경동맥을 정확히 자르고, 손아귀에서 일으킨 전류는 그들의 신경을 태워 마비시켰다.

머리통을 깨부수거나, 붕대로 목을 감아 질식시키고.

상대의 몸에 열기를 주입해 수분을 끓어오르게 하거나, 독극물을 주입해 죽이는 등…….

그런 사인이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나 확실하게.

그녀는 적들의 숨통을 자신의 손으로 차례차례 끊어내었다.

‘이게, 옳은 거겠죠?’

자신이 가르친 호신술에, 이제껏 익힌 의학적 지식을 접하여.

자신보다도 의사에 걸맞은 인재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게 옳은 건데, 왜…….’

‘메디슨. 진정해.’

‘대장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신 거예요?’

‘아무 말 하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그렇기에 듣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기에 이 가혹한 땅에 들어오길 택한 자.

가진 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에도 그 모든 걸 버리고 이곳에 왔음에도,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학살을 저지르고 만…….

‘대장.’

그 계기를 마련한 자신에게 돌아올 원망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기에.

‘대장, 전 어째서…….’

하지만 카일은 그 뒤를 잇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며.

그녀는 더 이상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의사인데 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건가요?’

……그래.

그 한 마디야말로, 그의 삶에 있어 최악의 과오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 생에 와서도 결코 떨쳐놓을 수 없는…….

그런 저주와 같은 기억으로.

* * *

"…사령관."

그리고 이 순간.

셰인 골드리안은, 자신의 전생인 카일 페터슨의 기억을 빌려 사령관을 향해 물었다.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제 머리를 무자비하게 땅에 내친 사령관의, 그 손을 부러진 손가락들을 억지로 펼쳐 움켜쥐면서.

"당신은, 그런 말을 하는 녀석에게 칼을 쥐어줄 수 있어……?"

구제를 위해 전장에 들어온 자에게, 그 지식을 빌어 적을 죽이라 명할 수 있는지.

그게 전장이라는 잔혹한 공간에서도 허락되는지를 묻는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래, 당연히."

답을 들을 것도 없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그랬는데, 당신이라고 안 하고 배기겠어?"

그런 거라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부하들이 죽을 테니까.

그들이 살릴 수 있는 사람들마저 죽게 될 테니까.

"그렇게, 의사 딱지 단 놈들에게 칼 쥐어 보내니……. 능률 하나는 제대로 올랐지. 시체나 겨우 끌어안고 오던 부대가, 부상당한 아군이랑 적군의 모가지를 같이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장교 녀석이 싫다고 하겠어?"

성과만큼은 전임자가 대장으로 있었을 때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런 성과를 내는 것이 말단 간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리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과를 올리면, 이 전쟁도 더 빨리 끝날 것이라고…….

"…아주 제대로 된 착각이었지."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자조가 절로 터져나왔다.

공적을 쌓을수록 그들은 더 잔혹한 임무를 강요받지 않았던가.

산 채로 잡은 포로는 고문관들에게 넘기고, 동료의 시체는 수레에 담아 실험용 카데바로 신나게 써먹으며…….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도 제국을 몰아내지 못하였고, 그들은 더욱 잔인한 방법을 그들에게 강요하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시체를 요구하고, 그것을 빌미로 더 잔인한 병기를 만들면서…….

"당신도, 아마 예전의 나처럼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거야.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더 빨리 끝나는 게 전쟁이라고……."

그러니 전쟁에선 윤리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 시대에도 그런 풍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이 땅은, 그때의 과오를 200년에 걸쳐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것도, 결국 빨리 끝내야 의미가 있는 거지……."

상황에 따라 윤리를 져버린단 행위는 마약과 같다.

처음엔 효율이 좋아도 사용할수록 무언가 결여된다.

그게 장기전이 되면 더욱 도드라지는 법.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나고, 초기의 주모자들마저 그 전란 속에 사라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자들만이 영문도 모른 채 서로에게 포탄을 갈긴다.

그게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만이 남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와는 전혀 연이 없는 이들만이 전장에 남아, 그저 서로에게 이유 없는 증오만을 퍼트린다.

그렇게 모두가 미쳐갈 뿐인…….

결코 ‘전쟁이니까’라고 일축시켜선 안 됨에도, 그렇게 일축시킬 수밖에 없는 장소.

"하지만 그런 곳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당신이라도 알고 있을 거야…. 이런 돼먹잖은 곳에서라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건……."

"무슨……."

"전쟁이라고 효율 좋은 것만 쫓을 거였다면, 지금 나를 패대기칠 게 아니라 고해실에 있는 성직자들부터 설득하러 갔어야지."

일순간 사샤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고 있기에.

"신성력도 쓰는데 총까지 쓸 수 있다니, 치료랍시고 산 채로 뼈를 뽑는 백정새끼보단 더 제대로 된 병력이잖아?"

이 시대의 전장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총을 쥔 성직자를 보았다.

교리를 진리로 섬기며 신앙을 갈구하면서도, 차마 잔혹한 현실에 굴복하며 목에 피가 고여라 읊어대는 기도를 총성으로 지워대는 자들을 마주했다.

그 또한 살육에 익숙해진 의사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시대엔 결코 받아들여질 순 없는 존재였다.

"……그래,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 설득하지 않는 거잖아. 아무리 전쟁이라도, 결코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혼란이 있긴 하지만, 이단자인 자신을 치료했을 정도의 고결한 의지를 발휘한 그들이라면 분명…….

머지않아 신앙을 회복하고 다시 전선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고 신성력과 총기, 둘 모두를 다룰 수 있는 효율적인 병력의 양산을 생각할 수 있을 터임에도……. 어째서 사령관은 그런 걸 고려조차도 하지 못한 것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 마음을 둔 곳은 이 변방의 전장이 아닌, 그 전장에 세워진 벽이 지키고자 한 광활한 대지라는 걸.

"그래, 아까 말했잖아. 당신과 내가 경험한 건……. 애초에 근본부터가 다른 거라고."

폭격에 의해 제 고향조차도 불태워지고, 피난로에 있었을 때에도 매일 같이 벌벌 떨며 지낼 수밖에 없던 시대.

밭조차 불태워져 전장에 서지 않는 이들은 굶주림과 싸우고, 하루 때울 끼니를 찾아 군량이 가득한 전장에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결국 어디를 가더라도 전장에 설 수밖에 없던 시대에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기술조차도 전쟁에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시대와는 달리.

그래, 지금은……. 신성력과 의술조차 전투에 써먹었던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시대이다.

"이 시대엔…… 그래도 돌아갈 곳이라는 게 존재하잖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전장에 설 자유라는 게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죄수병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목숨을 걸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에, 어찌 윤리를 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이곳이 아니라면, 당신이 말한 것 따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왔는데……. 지식의 활용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게 보여?"

신성력을 가진 자는, 설령 전장에 서더라도 총을 쥐는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왜 의사인데 사람을 죽여야 하냐는 둥.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자신이 보았던 그 참혹한 짓을 다시 재현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정, 이런 시대에도, 당신이 말한 그 엿 같은 짓거리들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렇기에 이 두 번째 생이 깃든 몸을 빌어 외친다.

전장에 서는 것이 선택인 시대에, 윤리를 져버릴 것이 강요되는 자가 필요하다면…….

"그런 건, 다른 사람 휘두를 거 없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이런 시대에도 돌아갈 곳 하나 존재치 않는.

"나 하나만 감당하면, 충분한 거잖아……."

그런 과거의 망령 하나면 족한 것이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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