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60화
[번외편-그가 없는 곳에서(上)]
18세.
가업을 잇거나, 고향을 벗어나 성공을 꿈꾸거나, 학벌에 맞는 아카데미를 찾아 입학을 꿈꾸는 때.
청춘을 즐기는 소년소녀가 어른이 될 준비를 거치는 시기는, 어느 소녀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온 상태였다.
"올리비아. 저길 보세요."
그러한 해의 겨울날.
그 소녀를 섬기는 시종은, 창밖으로 보이는 계절의 상징을 마주하며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쓰레기가 내리고 있습니다."
"…일라이. 저건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 고향에선 쓰레기라 불렀습니다. 고향을 벗어나기 전까진 쓰레기가 눈을 칭하는 고유명사인 줄 알았죠."
"아하하……. 일라이는 가끔 엉뚱한 소릴 하시네요."
올리비아가 애매히 웃으며 자신을 앞둔 자를 응시했다.
일라이 덴.
테라스 제국의 명망 높은 공작가.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10년째 근무 중인 시종이었다.
귀족가의 시종답지 않게도 얼굴과 손에 상처가 그려져 있으나, 막상 가까이 지낼 때에 느끼는 것은 두려움보단 엉뚱한 면이 많다는 것이었다.
"치우는 것도 꽤 힘들겠죠."
"그건 괜찮을 거예요. 눈이라면 화염계 마법에 정통한 분들을 불러서 녹이면 쉽게 정리가 되거든요."
"마법사들을 고용하는 것도 꽤 돈이 들겠죠?"
"네, 뭐 그렇긴 하지만……."
"그런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공할 수 있다니. 역시 라인하르트 가문은 대단합니다. 이 세상은 돈과 권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누누이 실감하곤 할 정도예요."
"……첫 눈을 보면서 그런 거 깨닫지 말아주세요."
무뚝뚝하게 비정한 현실을 읊는 일라이를 보며 올리비아가 쓰게 웃었다.
쌩뚱 맞기도 하지만, 각박한 가사노동 중엔 이런 대화도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오고는 한다.
아쉬운 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벌써 일라이가 온 지도 열 번의 겨울이 지났네요. 슬슬 고향에 돌아갈 시기였죠?"
"네, 예정에 두었던 계약도 끝나고 있으니……."
10년.
이번 겨울이 끝나면 계약기간은 만료되고, 그녀 역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치르게 된다.
정말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연을 맺은 친우와의 주종관계도, 그자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를 보살핀 것 역시.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너무 헤이해지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올리비아의 말을 참조하여, 기사분들의 조교일 역시도 마지막까지 최선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훈련강도를 세 배로 올리면서……."
"그건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덤으로 제가 시켰다는 듯이 말하지 마시고…… 음?"
냉기가 어린 창문을 걸레로 닦고 있을 무렵, 문득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비춰졌다.
광활한 숲에 난 길을 가로질러 오는 차량. 말처럼 말을 끌어주는 짐승이 없음에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탈것이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길에도 거침없이 전진하는 건, 그 차량 안에 내장된 마나엔진으로부터 열기가 발산되었서일 것이다.
"……일라이."
"네, 보이는 대로예요."
진지한 부름에 일라이가 심각성을 눈치 채며 고개를 숙였다.
마차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것은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 매.
다름 아닌 황실에 소속된 자들만이 그리는 것이 허락되는 것으로, 저 마크를 달고 있는 마차가 여럿 온다는 건 그만한 권위를 지닌 자란 뜻이다.
일라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심각히 말했다.
"지금 저기에 제 2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마차들이 성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습니다. 유지비만 해도 제 한 달 치 연봉이나 되는 물건이 잔뜩……."
"네네, 귀하신 분이 또 오시나 보네요."
대충 흘려들은 올리비아가 걸레통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지금 황실의 방문자가 오시다니 곤란하네요. 공작님께선 근래엔 영지 밖으로 나가시는 일이 잦으신데."
"…그 부분에 대해선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창문에 어려 가는 김.
일라이가 그것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창 밖에서 다가오는 마차를 조용히 째려보았다.
"근래에 이 영지에 오는 이들의 목적은 한결 같았으니까요."
* * *
눈이 수북이 쌓인 정원.
그 입구를 지키던 호위들은 몰려드는 마차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검문을 하는 것조차도 의미가 없었다.
마차의 표면에 그려져 있는 붉은 매의 인장은, 그 자체로 그들의 신분과 위상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이곳이 라인하르트 공작가인가."
이윽고 호위와 함께 마차에서 빠져나온 건 자신감에 찬 인상을 가진 청년.
금색의 곱슬머리에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지만, 그 피부색은 태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얼마 전 열대지역의 섬에서 휴가를 보낸 흔적일 뿐.
"…검소한 곳이군."
그런 청년이 시종이 펼친 양산에 보호를 받으며 눈밭에 선 채, 성의 꼭대기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대부호가 머무르는 저택을 넘어서는 장소이나, 청년의 기준에선 보잘것없기 그지없는 건물이었다.
"별 다른 장식도 없고 시종도 그리 많지 않아. 성이라는 건 허울뿐이었던 건가? 나머지 두 공작과 비교하면 권위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군."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 영지에서의 권위란 건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청년의 말에 답하며 정원에 섰다.
눈밭위에 선 것은 얼굴에 상처가 그어진 시종 한 명.
청년과 달리 양산은커녕, 주변 호위들처럼 로브로 제 몸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러한 여인이 눈밭에 선 채,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방문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시종, 일라이 덴이라고 합니다."
"……시종?"
청년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거 참, 라인하르트 공작은 들었던 평판에 비해 꽤나 예의가 없는 자인 것 같군. 손님이 행차했는데도 고작 시종 하나만을 달랑 보내오다니……."
"송구하오나, 공작님께선 사정이 있어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방문예정을 잡으셨다면 필시 그분께서 배웅하셨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예정도 잡지 않았고, 하물며 황실의 마크를 드러내기까지 한 상태다.
그날의 재판 이후로 황실과의 유대가 돈독한 교단과 사이가 틀어진 입장상, 그들이 부정적인 이유로 방문했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순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신분을 밝혀주시지 않겠습니까?"
안경으로도 감추어지지 못한 예리한 기백.
청년을 둘러친 호위들이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강함을 읽어내었지만, 청년은 여전히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리 궁금하다면 당연히 대답해줘야겠지."
곧 그가 씨익 웃으며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의 이름은 알랭. 이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자이다."
"위대한, 피……?"
그 말을 들은 일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졌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것일까?
일라이가 안색을 창백히 물들이고, 실언을 했던 제 입을 움켜쥐었다.
"호, 혹시 교단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수혈을 저지르신 분입니까? 그것도 황실의 일원을 대상으로 그런 일을 벌이다니……."
"…무례한 말을 참 엉뚱하게 하는 녀석이구나."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를 이단으로 몰다니.
자칫 모욕으로 처형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그런 엉뚱한 면이 의외로 웃음보를 자극해주었다.
궁정 광대는 아무리 모욕적이어도 사형하지 않는 법.
위대한 피를 이은 그 역시 그 정도의 관대함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알랙산드로스 테라스. 그 이름을 모른다 하진 않겠지?"
테라스 제국의 현 황제 앨버트로스 테라스의 세 아들.
그 중 장남인 알랭은 앨버트 황제가 물러설 시, 그 다음으로 이 제국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제 1계승권자’였다.
그 위상은 황실의 일원을 제외한 그 누구도 거스르는 게 허락되지 않는 존재.
그건 공작도, 교단원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알았다면 당장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죄를 구하도록 하거라. 거기에 정중함이 느껴진다면 짐도 관대함을 발휘하여 단두대로 보내는 것만은……."
"태자님, 잠시."
주제를 가르쳐주려는 중, 태자의 직속 호위기사인 마일즈가 알랭의 귀에 속삭였다.
이야기가 이어진 후.
이내 일라이를 응시하는 알랭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여졌다.
"……그렇군, 이자가 소문으로 들었던 ‘변경 굴지의 단두대’인가?"
변경 굴지의 단두대.
대륙 내 유일한 전쟁터라 불리는 곳에서도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렸던 소년병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부터, 태자는 눈앞에 있는 여인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걸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마물을 길들일 수 없듯.
인지를 초월한 괴물에게 예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
"단두대가 아니라 일라이 덴입니다."
정작 일라이는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자잘한 건 제쳐두도록 하지. 이 몸도 목적이 있어 이곳에 온 것이니……."
모욕감을 지운 알랭이 진지하게 일라이를 쏘아보았다.
그가 찾아온 의도는 대강 짐작했던 바.
일라이가 조용히 되물었다.
"목적이라 하면 역시 혼약입니까?"
"그래, 이 가문의 후계자와 맺어질 자는 결투로 정한다……. 3년 전에 있던 황실의 무도회에서 공작이 직접 선언했던 거였지."
귀족사회에 있어 어린 나이에 약혼을 맺는 건 드물지 않은 일.
하지만 라인하르트 가문은 그 수단을 사교회에서의 만남이 아닌 결투로 정했고, 그 소식을 대륙 곳곳에 퍼트리길 희망하였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계승자는 현 계승권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로 선정하겠다.’
조건은 비혼에 미성년자일 것.
그것만 충족한다면 누구라도 도전할 수 있다.
귀족은 물론 평민 역시도.
"그 결정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반대를 했었지. 그야 공작의 후계자로 ‘아무나 좋다’고 결정했을 뿐 아니라, 이 가문의 여식은 가녀리고 병약하단 인식이 퍼져 있었으니까."
4년 전의 재판 이후, 가문의 유일한 계승권자가 저주에 걸렸다는 소식은 대륙 전역에 퍼진 상태였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중대사를 결정하는 건 누구나 경솔하다 여길 일……. 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백이 넘는 도전자가 찾아왔음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하지."
세간이 말한 제국의 검이 녹슬었다는 판단이 날이 갈수록 뒤집어지는 순간.
아니, 오히려 상대했던 자들은 하나 같이 ‘볼레로의 재림’이라 부를 정도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하다 칭해지는 검사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났다고.
재판 이후에 실추되었던 명예는, 그 딸이 일으킨 성과를 통해 다시금 급부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태자님께선 그 소문에 흥미를 가지고 아가씨에게 직접 도전하러 오셨다는 거군요."
"단순 흥미가 아니다."
태자가 바로 부정했다.
"엄연히 나와 맺어질 반려를 진지하게 찾아 이곳에 온 것이지. 설마 공작이 부재중이라 하여 먼 거리를 찾아온 나를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아뇨. 가능합니다."
공작은 결투에 있어선 어디까지나 관찰자일 뿐.
실제 그 결투를 진행하는 건 계승권자인 세실리아 라인하르트니까.
"결투를 위해 찾아오셨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야 거리낄 건 없지. 오히려 마차에서 쉬기만 하느라 좀이 쑤신 상태였는데 잘됐지 않은가?"
알랭이 그리 말하며 제 어깨를 슬슬 돌려대었다.
누가 보더라도 여유가 가득한 모습.
일라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 뒤에 있는 뒤편의 마차를 응시하였다.
먼 길을 누비더라도 피로 하나 쌓이지 않게 해준 값비싼 탑승물을 향해.
‘이것이 돈과 권력…….’
꾸욱. 일라이의 주먹에 힘이 실려 갔다.
이후의 결투와는 하등 상관도 없는 열등감이었지만 어쨌든.
"그런데 태자님께선 왜 아가씨와의 혼례를 바라시는 겁니까?"
이후 성 안으로 들어가 길을 안내하던 중 일라이가 돌연히 물었다.
뒤따르던 알랭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여 답했다.
"탐이 나기 때문이지."
"……섬기는 입장에선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마치 물건이라도 취급하는 것처럼 들렸기에.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은 자는, 다름 아닌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인물이었다.
"너무 불쾌히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이 탐을 낸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니."
황실의 일원은 언제나 최고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식사는 물론 무장과 보물도, 그리고 반려 역시도.
"그녀를 세간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아는가? 누구도 공략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 칭호를 들었을 때, 그녀야말로 이 제국을 이끌어야 하는 자에게 가장 걸맞는 황비가 될 거라 확신을 가졌지."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
그 가문의 계승권자라는 것만으로도 황실의 일원이 될 자격은 충분하며, 그녀는 더욱 나아가 타 가문의 후계자와 비교를 거부할 정도의 성과를 올렸다.
역사 속 성자와 비견된다는 평가는 그만한 일이었다.
"확실히 태자님께서 혼약을 바라는 건 가문에 있어서도 영광으로 여겨지는 일이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결정에 대해선 여러모로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일라이가 슬쩍 알랭의 배후를 따르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황태자의 말이나 행동에 별 간섭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현 황태자의 의견이 입장상 위험히 여겨질 수 있음에도.
알랭 역시 그런 분위기가 재밌게 여겨진 듯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물었다.
"무엇이 걸리는지를 말해 보거라."
"먼저 아가씨께선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가문에선 계승권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 경우, 그 이상의 반려를 두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지요."
무의 길을 거니는 자는 여색에 미쳐선 안 되고, 오직 자신의 피를 이어줄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에겐 숙명과도 같은 일.
그 가훈을 철저히 하는 공작은 앞으로도 첩을 두지 않을 예정이니,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가문의 계승권자는 세실 한 명 뿐이게 될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태자님께선 제국의 제1계승자가 아니십니까? 언젠가 폐하의 자리를 계승할 분께서 이 가문에 도전을 한다는 건……."
"하하! 그대는 광대도 아니면서 짐을 재밌게 만드는구나!"
알랭이 진한 미소를 그렸다.
"내가 그녀에게서 이긴다고 황제의 자리를 포기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그럼……?"
"라인하르트 공작가가 대단한 곳이긴 하지만, 그 또한 황실을 위해 존재하는 가문이지. 이 몸이 하겠다는데 거부할 순 없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황제가 될 자신에겐 영지의 법 따윈 종잇조각이나 다름없는 것.
그들에게서 법을 논할 수 있는 건 교단의 영역과 제도의 재판장, 그리고 치외법권지인 블레이즈 영지뿐일 것이다.
"물론 그녀를 반려로 들인다 해도 500년을 계승해 왔으니 그 이름은 유지되어야겠지. 하지만 그런 문제야 훗날 계승에서 밀려난 자식을 이 영지의 후계자로 만들면 될 뿐인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건……. 폐하와 아가씨께서 혼약을 맺으신다면, 가문을 계승하는 일을 한 세대 미루겠다는 거로군요."
"다름 아닌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니 이 가문에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물론 자식이 성장하기까지엔 라인하르트 공작이 수고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마치 농담하듯 말하는 알랭.
하지만 일라이로선 마냥 좋게 들을 순 없는 농담이었다.
‘불쌍한 질리언.’
일라이의 눈에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는 정말로 연약한 남자였다.
소년병 시절만 해도 자신과 팔씨름을 했다 팔이 부러지고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황족의 억지에 맞추고자 은퇴시기마저 미뤄야 하다니.
정말로 그런 미래가 펼쳐진다면 안쓰러울 테지만, 그 동정은 어디까지나 태자의 취급에 대한 것으로 그칠 뿐이었다.
‘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요.’
일라이 덴.
변경의 전설이라 불렸던 그녀는, 자신의 두 번째 주군이 이 철없는 태자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