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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61화 (61/255)

의무병의 환생 61화

[번외편-그가 없는 곳에서(中)]

"…도착했습니다."

성의 지하에 위치해 있는 연무장.

그 연무장의 곳곳엔, 대륙 내에서 검이라 분류에 속하는 무기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상태였다.

그 중심에 다소곳이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 자 역시.

"세실 아가씨. 도전자가 찾아오셨습니다."

볼레로의 환생.

현 제국 내에 그런 이명으로 불리는 여인이, 이윽고 시종의 물음에 반응하며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펼쳐지자 접혀 있던 드레스의 주름이 차차 펴져간다.

고풍스러운 옷을 덮는 은빛이 흐르는 장발.

그 빛을 감싸는 귀여운 리본에선 소녀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세실리아를 본 이들의 첫인상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뒷모습의.

"라인하르트 가문의 현 계승자,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조용한 목소리와 마주서는 그녀. 상대를 응시하는 눈은 그 어떤 명검보다도 에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당신이, 이번 도전자인가요?"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얼어붙을 것 같은 독기.

그 오싹함을 느낀 알랭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빛나는 보석이구나.’

강욕.

그 감정은 그의 아비가 누누이 강조해 왔던 사항이었다.

다름 아닌 이 제국을 지도하는 현 황제로부터.

‘허락되는 선에서의 모든 방법을 쓰며, 너희들이 가지고자 하는 모든 것을 쟁취하라.’

그 가르침의 의도는 경쟁을 유도해 최고의 지도자를 만들어내기 위함.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만큼 알랭 역시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자라났다.

그 어떤 보물도, 어떤 인재도 제 손에 거머쥐며.

그리고 그건 반려 역시 예외가 아니게 될 것이다.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그녀는 이단의 비호를 받아 장애를 극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였지.’

4년 전에 있었던 재판.

그곳에서 이단으로 몰렸던 소년은 제국을 대표하는 5명의 배심원단을 통해, 이단의 가능성을 시험한단 이유로 전쟁터에 보내진 상태였다.

그 비호를 받은 세실 역시 모두가 지켜본다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정작 교단은 그 후 라인하르트 가문과 그 지지자들과 척을 지기에 이르렀다.

교단에선 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단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그리고 공작가와 그 지지세력에선, 교리만을 들먹이며 암살행위를 묵인하려 했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런 신경전은 나에겐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면 금지하고, 변경에서처럼 필요하다면 기용하고자 할 뿐.

중요한 건 그런 굴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가 나타났단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재보란, 언제나 남의 손에 쥐어진 물건인 법.’

셰인 골드리안.

장애를 극복하게 해준 그 소년은 이 여인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며, 알랭은 이 혼약 결투가 그를 잊지 못해 펼치는 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녀는 그 연심을 지키고자 무를 길러왔다고…….

‘언젠가 누군가가 거머쥘 때를 기다리며 가치를 키워온 진주라니, 이보다 귀한 물건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진가를 알아본 자들의 경쟁이란 재보의 가치를 드높이는 법.

그것이 욕망에 충실한 태자가 가진 사상의 주축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교단과 척을 질 각오를 하면서 눈앞에 있는 여인을 갈망한 이유였다.

"다시 만나 반갑구나, 라인하르트가의 여식이어. 그대, 설마 짐을 잊어버렸다 하진 않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자님."

3년 전 공작이 약혼 결투를 선언했던 곳은 황실의 무도회.

당연히 당시엔 태자인 알랭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런 자리가 마련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거늘, 세상일이라는 게 참 모를 일이로구나. 그대도 꽤나 놀랐을 거라 생각한다만……."

"…별로 신경 쓰진 않습니다."

"하하, 보기와 달리 부끄러움이 많아 보이는군."

그런 게 아니다.

부끄러움이 아닌 익숙함.

이제껏 많은 이들이 자신을 노리고 들어왔고, 그 중엔 명문가의 자재나 기사가문의 후예가, 평민임에도 은둔고수였던 자도 있었다.

제각각 다른 신분과 출신, 그리고 목적을 지녔던 상태.

그 대상이 황태자라고 한들, 세실에겐 그저 도전자의 분류 하나가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라이."

"네."

일라이가 세실의 손에 쥔 책을 건네받으며 물러섰다.

그 후 그녀를 등지며 연무장에 박힌 검을 뽑아드는 세실.

선택한 건 날카롭고 곧게 뻗어있는 레이피어였다.

땅에 박혀 있음에도 여전히 예리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본 알랭이 호탕히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은 이 몸과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어도 될 터이거늘, 참으로 성급하구나."

태자를 상대한다곤 생각할 수 없는 태도.

하지만 그의 어미가 그렇듯, 황제의 반려가 될 자라면 그만한 포부를 지녀야 하는 법이다.

"마일즈."

호기 있게 지시를 내리자, 자신을 뒤따르는 호위기사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이 이끌고 온 것은 표면이 덮은 순금과 보석으로 덮인 상자.

그 상자가 열리며 나타난 검을 본 순간, 세실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건…… 클라우디아?"

성검 클라우디아.

유일교의 창시자이자, 제국의 초대 황비라 불렸던 성녀 클라우디아의 피가 깃든 무기.

제국의 탄생과 그 역사가, 더욱 나아가 이 제국의 지지기반을 상징하는 최고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알랭이 그 진가를 알아보는 세실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디까지나 모조품이다. 진품을 다루는 게 허락된 건 오직 황좌에 앉은 이뿐이지."

클라우디아는 초대 성녀의 피를 이어받은 무기.

당연히 당대 이후에는 둘 이상 만들어질 수 없으며,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클라우디아의 열화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모조품이라곤 하나 현 시대 최고의 장인들과 성직자들이 사력을 다해 만든 무기이다. 그보다 못할 뿐이지 명검이라는 점에선 변함이 없지. 그에 비하면……."

알랭의 시선이 연무장의 주변으로, 땅 곳곳에 박힌 무기들로 향해졌다.

특별히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나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질 좋은 군대의 병사들에게나 쥐어줄 법한, 그런 ‘양산품’에 불과한 무기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이라면 가문의 보구 하나 정도는 있을 법 할 텐데……."

"공교롭게도 저희 가문엔 보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만큼이나 정말 수수한 가문이로구나."

알랭이 큭,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에 따라선 비웃음이라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은 반응.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에 세실이 바로 냉담히 반박을 가했다.

"이 가문에서 보구라 한다면…… 그건 가문의 검술을 익힌 일원들 전체라 할 수 있겠죠."

검술 명가 라인하르트.

그들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문의 비전을 계승하고, 그것을 매 순간 꾸준히 발전시켜온 검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 전통의 가치는 분명 제국의 보물인 클라우디아를 넘어서리라.

제국의 검이라 불릴 정도의 ‘인간문화제’란, 그 정도의 포부를 지녀야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좋구나. 그 모습."

그 모습을 꺾어 누르는 순간을 생각한 알랭이 희열을 표하며, 연무장의 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규칙은 알고 계십니까?"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신분과 출신에 상관없이 도전할 수 있다. 도전에는 어떤 종류의 검이라도 불문하며, 상대가 패배를 선언, 혹은 사망할 경우 싸움은 그 즉시 중단……. 이라고 했었지."

살인까지 허용되는 일대일의 싸움.

최고의 신부를 거머쥐는 내기엔 뒤따라올 만한 조건이지만, 정작 근 2년 간 세실이 상대했던 이들 중 죽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살인이 허락된다는 룰은 그저 실력을 돋보이기 위한 수단일 뿐.

그건 현재 그녀가 걸친 복장 역시 마찬가지다.

"헌데, 그러한 상태로 결투를 할 생각인가?"

드레스는 물론 머리의 뒤에 매어진 리본 역시도.

도저히 전장에 선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 또한 제가 감수하기로 한 조건입니다."

오만인가, 아니면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탐이 나는 것은 전력으로 쟁취한다. 태자에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자신감이 클수록 정복감도 큰 법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얕잡아보는구나. 나 역시 오늘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왔거늘.’

허락되는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왔으며, 근 몇 년 간 교양으로만 여겼던 검술을 전력으로 배웠다.

거기에 더해 황실의 기사 중엔 한때 라인하르트의 기사단에 속해, 그 비전을 전수받은 검사들도 적잖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의 나는 그들에게 배우며 이 가문의 검술이 가진 파훼법을 완벽히 숙지한 상태지.’

그러니 이번 결투는 시작부터 결과까지 모두 유리하게 진행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뭐지, 저 자세는?’

결투가 시작되기 전, 알랭은 세실의 자세를 보고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비틀면서 고개를 정면으로.

세검을 쥔 쪽의 팔을 굽히되, 그 검의 높이는 눈높이까지 맞추며 반대쪽 팔은 뒤로 늘어트리고 있다.

‘저런 자세가 있었던가?’

알랭이 알고 있는 바, 라인하르트 가문의 검술은 4개의 자세에 따라 구사하는 초식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다 하였다.

맹공과 거합에 특화된 제1자세 태검(太劍).

방어와 반격에 특화된 제2자세 풍류(風流).

다수를 상대할 때나 다인전에 특화된 제3자세 난무(亂舞)

검을 쥐지 않은 무검류에 특화된 제4자세 투로(套路).

각 자세마다 확실한 개성과 스탠스가 잡혀 있으며, 이 자세를 전환하는 순간이야말로 라인하르트 검법에 큰 허점으로 다가온다 하였다.

그러니 승기를 잡고자 한다면 결투가 시작된 후.

교전 중 자세가 전환되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고 들었지만…….

‘라인하르트 류에 이런 자세는 없었어.’

그래, 지금 세실이 취한 자세는 근 500년간 라인하르트 가문에 전수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투술이라는.

이 시대에 존재치 않은 기술을 검술로 승화시킨, 세실리아 고유의 자세였으니.

‘제5자세-투검(鬪劍).’

마나의 호흡이라는 특유의 마나 운용법을 활용한 자세로, 그것이 특화된 분야는 다름 아닌 단기전.

시작부터 그 자세를 취했다는 건, 이 싸움을 그리 길게 이어가지 않겠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린 건 오직 그녀를 오래토록 지켜봐온 시종 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내 일라이가 시작을 선고한 순간. 그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몸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몸에 받아들인 마나의 물리력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

그 기세는 세실보다도 알랭이 훨씬 거대했다.

"클라우디아여! 머지않아 이 제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자로써 명하겠다!! 이 몸에게 영광스러운 승리와 재보를 가져올 것을!!"

그 외침이 신호가 되듯 보검에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신성력이라고 불리는 힘.

하지만 그건 신앙이 없는 태자에 의한 것이 아닌, 검 자체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생명검-클라우디아.’

그 검은 자아가 없을 뿐 살아 있다 할 수 있으며,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신성력을 발산하거나 마나를 받아들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건 모조품에 불과한 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바.

신성력을 통해 불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내구성과 재생력을 자랑하며, 그 검에 내재된 마력회로는 사용자가 구사하는 마나의 써클을 몇 단계 증폭시키기에 이른다.

"제국의 검이어, 어디 한 번 이 전력을 감당해 보아라!!"

함성과 함께 이어지는 광명과 폭풍이 어우러진 질주.

그 방대함을 마주했음에도, 세실은 자세에 한 점의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고 다스렸던 호흡을 멈추었다.

‘무호흡.’

체내에 축적된 마나의 흐름이 일순간 정지되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손으로.

그 끝에 쥐어진 검을 향해 모이기 시작한다.

그 방대한 힘이 면에서 선으로, 이윽고 ‘점’으로 밀집된 순간.

세실이 제 팔에 집중시킨 힘을 추진력으로 뒤바꾸었다.

‘기본(基本).’

4년의 가르침과 4년의 단련.

그 끝에 개화시킨 경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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