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62화
[번외편-그가 없는 곳에서(下)]
-콰창!!!
붕괴음이 울려 퍼졌다.
결코 검과 검을 맞댄 결투에선 결코 들리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무, 슨……?’
일순간 몸이 경직되며 알랭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검이 산산이 조각나고 있다.
손잡이를 쥔 손에서 일어난 경련은, 그만한 충격이 이 몸에 전해지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무슨…….’
거세게 뛰는 심장과 함께 머릿속이 가속화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순간 정지된 시간 속에서, 알랭은 제 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되새겨갔다.
방대한 마나와 신성력.
클라우디아의 복제품으로 발휘된 그 위세는, 그 자체로 견고한 성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내구성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했음에도 세실의 레이피어는 그 검의 끝과 정확히 충돌하고, 파고들었다.
검의 면도, 날도 아닌 ‘검끝’을 정확히.
그렇게 클라우디아에 주입시킨 마나를 폭발시키는 기교.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복제품이라 한들 대륙 내에 더 없는 명검이거늘.
그런 것을 고작 양산형 레이피어로 파고들어 터트린다니.
‘이건, 환술인가……?’
현실감이 동 떨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에 당혹성을 내지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제 목에 느껴진 서늘한 감각이 기도를 억눌러 막아버렸으니.
"무……."
"더 하시겠습니까?"
귓속에 싸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 제 사각으로 돌아 목을 노린 단검 한 자루.
이전에 취한 자세에서 뒤로 감추었던 손에 쥐고 있던 것이었다.
비장의 카드라기엔 너무나도 수수한 무기.
하지만 그조차도 사람의 숨통을 끊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고작 단검 한 자루의 위상이 단두대와 동격이 된 순간.
"더, 하시겠습니까?"
세실이 침묵하는 태자를 향해 번복해 말했다.
‘무례하다. 감히 이 몸에게 항복을 요구하다니.’
차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감내하고자 한 룰 때문이 아니다. 자존심도 아니다.
눈빛.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싸늘한 눈빛이 이 순간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있으니.
"져, 졌……."
그때에 알랭은 황태자라는 정체성을 망각한 채, 스스로를 강자에게 굴복한 사냥감으로 전락시켰다.
"졌, 습니다……."
힘겨이 흘러나온 패배의 선언.
그것을 가장한 목숨구걸에, 셰실이 목에 겨누었던 단검을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리는 알랭.
그때가 돼서야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황급히 그 주변으로 달려나갔다.
"태자님!"
모두가 그를 부르짖는다.
몇몇 이들이 태자를 살피며 세실을 쏘아보았지만, 그건 이 중에서 가장 급이 낮은 소수뿐이었다.
태자를 호위하는 이들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
그런 그들조차도, 방금 전 세실이 행한 기술을 방어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써클의 문제가 아니다. 저 공격은……. 방어가 불가능해!’
자세한 써클은 알지 못하지만, 그런 게 의미가 없다 평가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기교였다.
극한까지 예리하게 만든 칼날은 마나의 방벽이나 갑옷이 얼마나 두텁더라도, 자그마한 점에 해당하는 균열만은 만들어 낼 테니.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살의를 가지고 덤볐다면 태자는 물론, 이 자리에 선 호위기사들 중 일부가 희생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볼레로의 재림.’
이것이 차기 제국의 검.
당장만 해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 역량이 얼마나 더 크게 오르게 될까?
"일라이. 태자님을 부탁드릴게요."
정작 그들을 경악케 만든 장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제 시종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 연무장의 한 곳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렇게 훼방이 들어와 멈췄던 독서를 다시 이어간다.
제국의 검에게 있어, 이번의 결투는 고작 그 정도의 사소한 트러블에 불과한 것이었다.
* * *
달이 차오른 밤.
알랭은 라인하르트 성 정원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언제나 활기찼던 주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그런 모습에 호위들은 당혹스럽게 쳐다보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를 묵묵히 쳐다보는 건 오직 한 사람.
제 주인에게서 시중을 지시받은 일라이 뿐이었다.
"변경의 단두대여."
"일라이 덴입니다."
일라이는 그 별명을 싫어했지만, 태자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를 가르친 건 그대인가?"
"네, 일단은……. 현재에도 제가 수행을 보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러니 저런 강함을 지닌 것이겠지."
라인하르트 가문의 검술에 이어, 변경에서 최강이라 불렸던 자에게 가르침을 받기까지 했다.
최고의 재료에 최고의 장인이 최고의 제련법을 사용한 격.
그런 존재를 어찌 교양으로만 여겨온 검으로 이길 수 있을까?
자존심이 드높은 태자조차도, 지금의 패배가 완벽하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테지."
그렇기에 태자는 확신했다.
설령 이 대륙을 지배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한들, 오늘 자신이 느낀 그 충격은 제 삶에 더 없을 존재로 각인되리라고.
"그래,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니."
그 감정에 충실한 말이 황태자의 입에서 내뱉어지고.
"……네?"
그 주변에 모인 일동의 입에서 당혹이 터져 나왔다.
그 누구도 황태자가 그런 말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하지만 달을 올려다보는 태자의 두 눈엔 분명 선망이 어려 있었다.
일라이가 살짝 비틀어진 안경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태자님. 외람되오나…. 방금 전의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알랭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당당히 외쳤다.
"짐이 이곳에 온 것은 욕망에 충실하라는 아비의 말씀을 기억하기에……. 그리고 그녀야말로 이 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반려라 여겨, 그 욕망을 이루고자 이곳에 온 것이었다."
만남은 마음으로.
하지만 혼약은 조건으로.
그러한 풍조가 있는 귀족사회에 있어, 세실리아는 누구보다도 황제의 반려로 적합한 존재라 여겨졌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녀가 가진 가치는 결코 인간이 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그녀가 볼레로의 재림이라 한다면, 구시대의 황제가 어째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언제나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그 존재가, 마치 신기루라도 되듯 아득히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결코 환상 같은 게 아니다!!"
그 멀어져가는 형체를 뚜렷이 응시하려는 듯, 알랭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와 검을 맞대었을 때의 그 감각이, 이 손아귀에서 선명히 느껴지고 있으니!!"
"어, 태자님……?"
"아아, 떠올릴수록 내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지는구나! 그녀의 검이 나의 무기를 파고드는 그 순간에, 그녀가 숨겨둔 물건이 나에게로 겨누어졌을 때에, 그리고 그 눈빛이 나를 파고들었을 때를 떠올릴수록 이 몸의 떨림이 가증되고 있다. 그래! 이건 분명히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정의할 수 있단 말이냐!"
대답을 망설이는 부하들.
그가 느끼는 감정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고민하는 건 일라이 뿐이었다.
‘아가씨의 숨겨둔 물건이 태자님에게 겨누어졌다니……. 아니, 이게 아니지.’
일라이가 고개를 가로젓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요컨대 태자님께선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려온다……. 그렇기에 아가씨에게 사랑을 품었다고, 생각하시게 된 것이죠?"
"그렇다! 짐은 이제까지 사랑을 느껴본 적 없지만, 사랑을 느껴온 자들의 이야기는 여럿 들어왔지. 지금 내가 느끼는 증세가 그와 똑같지 않은가?"
두근거림은 사랑의 조건…….
틀리다곤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두근거림이란 어떤 감정이든 고조되면 생길 수 있는 증세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건 공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공포?"
"네, 특히 아가씨의 숨겨진 물건이 태자님의 급소에 겨누어졌을 때……."
단검이 목에 겨누어졌을 때.
"음……. 네, 공포겠죠."
그 단검이 숨통을 도려내리란 걸 느낀다면 누구나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러한 돌직구에 호위들이 흠칫 놀라며 일라이를 쏘아보았다.
오만이라면 하늘을 찌르는 황태자가 공포를 느끼다니.
자칫 모욕죄로 처형되어도 이상치 않은 발언이나, 정작 그들의 예상과 달리 알랭은 불쾌함 한 점 없는 태도로 일라이의 말을 부정하였다.
"두렵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짐이 살며 두려워한 것은 오직 식탁 위에 올라오는 녹빛의 악마들뿐이거늘!"
"편식은 나쁩니다. 채소도 꼬박꼬박 먹어주세요."
"에잇, 시끄럽다! 이 몸에게 그런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어마마마뿐이다!"
"태자님은 마더콘이셨군요."
다시금 이어지는 돌직구에 흠칫 놀라는 가신들.
반면 알랭은 그 말에 전혀 수치를 느끼지 않았다.
"그야 물론! 자식된 자가 아비를 이기고자 하는 것은 숙명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숙명을 따른다면 어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나 알랭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잘 알고, 그 감정을 느끼는 데에 일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은 진실된 사랑이리라.
알랭은 거기에 강한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러니 마일즈. 나는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며, 이 가문에서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에 필요한 무를 연마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그러니 당장 황실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도록!"
"네,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체류에 당황한 듯했으나, 그의 막무가내 행동에 끝내 익숙해진 듯 일사분란하게 지시를 수행하였다.
가문의 입장에선 집주인이 없는 사이 식객이 하나 늘어난 셈이지만, 상대가 태자라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라이도 그 점을 염두에 두며 태자에게 예의를 취하였다.
"그럼 저는 당분간 태자님께서 머물러 계실 방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이후 부하들과 함께 특훈에 들어간 알랭을 뒤로한 일라이.
그러면서도 성을 누비는 그녀의 머릿속엔 알랭이 했던 물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가르친 건 그대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대련상대가 되어준 것 뿐.
직접적으로 그녀를 훈련시킨 건 라인하르트 공작의 몫이었고, 그 이전에도 가르쳐준 자는 따로 있었다.
‘아가씨에게 있어 스승이라 한다면 제가 아니라 그분이겠죠.’
그를 떠올리는 일라이가 후후 미소를 흘렸다.
* * *
‘셰인 골드리안은 이단자다.’
4년 전 이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하나의 소식.
고작 서자에 불과하나, 제국의 경제를 주름잡는 명가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몇몇 이들은 골드리안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혹은 그들의 움직임이야말로 제국의 정세를 바꾸리라 평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평가는 라인하르트 가문 역시 마찬가지.
법적인 절차가 완전히 끝났음에도, 풍조에 따른 오명까진 지울 수 없었다.
‘제국의 기둥임에도 이단의 비호를 받은 가문. 이단을 옹호하기에 교단의 책임자를 고발한 가문.’
제 아비는 그런 수모를 처리하고자 그 날 이후 영지 밖을 배회하는 일이 잦아졌다.
성에 돌아오더라도 편히 쉬지 못한 채 딸의 훈련을 봐주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와만 맺어지겠다는 억지를 들어주기 위해.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 그 억지는 포부로 바뀌어 가문의 위신을 되살리기에 이르고 있었다.
천식이라는 병에 의해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의술이라는 이단의 기적을 통해 구원을 받음으로써.
의학을 모르는 소녀는, 그저 전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이 시대에 의학의 가능성을 증명해준 것이다.
‘셰인,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에요.’
그러한 여인이 지금 제 방의 침대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제껏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왔던 교본의 마지막 페이지.
그를 읽던 세실이 책을 덮었을 때, 표지에 적혀 있는 이름에 자연스레 시선이 향해졌다.
[저자-셰인 골드리안.]
교단 측에선 이단자의 서적이 출판되는 것을 극히 반대했지만, 끝내 많은 귀족과 더불어 일부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출판이 허락된 물건이었다.
그 활동의 중심엔 자신의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 대륙에도 존재하고 있어요.’
아직은 일부일 뿐이지만, 그 일부가 행한 성과 덕에 변화의 시작을 이룰 책은 이 제국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혀 있는 건 응급처치법과 가벼운 마나운용, 그리고 호신술뿐.
하지만 그런 가벼운 서적이기에, 출신과 재능을 불문하고 누구나 익히기 쉬운 접근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세실에겐 눈에 익은 것이었다.
이 책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의 근간은, 그와 함께 보내었던 어린 시절에 누누이 강조해왔던 것들이었으니까.
‘셰인. 저는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 흔적을 품에 안은 세실이, 제 방의 침대에 앉은 채 창밖의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눈보라를 흩뿌리는 구름의 사이로 환히 보이는 달빛을 눈에 새기며.
‘당신도, 저를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청춘의 한 때, 어른이 되어가는 소녀는 그와 올려다본 달밤을 추억해갔다.
머지않아 찾아올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또 고대하면서.
[번외편-그가 없는 곳에서(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