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63화 (63/255)

의무병의 환생 63화

블레이즈 방벽.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뻗어진 그 벽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외세의 침공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방어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철통같은 방어로도 어찌 못하는 고난이 있었으니, 바로 겨울날마다 덮쳐오는 극심한 추위다.

"으으, 추워."

성벽 내의 초소.

그곳에 상주하는 감시병들은 눈보라가 치는 벌판을 둘러보던 중, 들이닥치는 냉풍을 버티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어대었다.

"주님께선 왜 인간을 만드실 때 털을 조금만 주신 걸까?"

"여름에 더워지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이 정도로 징징대지 마라. 최전방에 나가는 놈들은 간간이 손 발 한 두 쪽 씩은 두고 오는데 우리 정도면 양반이지."

실제로 겨울 중의 초소근무는 그나마 편한 일에 속한다.

이 변방의 땅에 덮쳐오는 추위는 마물조차도 삽시간에 얼어붙을 정도.

이런 와중에 보초가 아닌 정찰을 나가는 이들은 죽음마저 각오해야 한다.

"솔직히 마물 상대하는 것보다 눈보라가 더 무섭다니까?"

"그렇긴 하지만 뭐……. 그것도 작년까지만 그랬지. 올해는 이거 덕에 조금 덜한 편이고."

곧 병사가 손에 주무르고 있던 주머니를 동료에게 전해주었다.

수개월 전 연구반에서 새로이 만든 겨울 대비품.

근래 병사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손난로’라는 도구였다.

"얼마 전에 설원 훈련 갔을 때 한 개씩 나눠줬는데, 이거 하나 껴안고 자면 텐트에서 하룻밤 지새는 것도 거뜬하더라고."

"캬~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게 마나도 없이 이리 따끈해질 수 있지?"

손난로를 비비는 순간 발산된 열기가 그들의 피부를 녹여주었다.

탄소가루가 쇳가루와 반응하여 발생하는 ‘산화’현상을 이용한 것.

철이 산화되는 원리를 이용하기에 1회성으로밖에 쓸 수 없지만, 사용 시간이 부족하다면 하나 더 챙기면 그만일 뿐이다.

"연금술사들도 참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매 년마다 이렇게 뚝딱 신기한 걸 만드는 거지?"

"연금술사니까 그런 건 아니지. 마탑 출신 놈들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잖아. 만들더라도 귀족들 전용으로만 만드니 우리가 수혜를 볼 일이 없는 거고."

"그런 사치품도 챙겨주는 걸 보면 이 영지가 참 살긴 좋은 거 같은데……."

-퍼엉!!

환희를 내뱉기 울려 퍼지는 폭음.

그들이 있는 초소와는 정반대편의 성벽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성벽에 장치된 대포를,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마물에게 발포시킨 것이었다.

그 진동을 느끼자니 이곳에 터를 잡고 산다는 생각이 싹 사라지게 되었다.

"에휴, 이 지긋지긋한 군 생활은 언제 끝나려나?"

"아쉬워도 참아야지. 넌 딸내미 대학 보낼 돈 모아야 한다며."

"아, 그렇지, 우리 예쁜 딸을 위해서라도……."

"아이고 저, 저거 자리 비운 사이에 또 딸 자랑 시동 걸려고 하네. 야, 내가 쟤 앞에서 딸 얘기하지 말라 했지?"

푸념을 늘어놓을 무렵 누군가가 배후에서 말을 걸어왔다.

마찬가지로 같은 초소에서 감시를 서는 동료.

손에 쥔 보따리엔 초소 감시 중에 먹을 식량이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선생님 좀 보고 오느라 늦었지. 딸자랑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오늘 식사는 뭐야?"

"육포랑 찐 감자."

"켁, 또 그거냐?"

"겨울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 시기엔 신선한 고기는 구하기 어려우니까."

"이것도 감지덕지해라. 먼 옛날엔 악마의 열매네 뭐네 해서 먹지도 않고 다 굶어 죽었는데."

"300년도 전이잖아 이 새끼야.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이 왜 그리 늙다리 마냥 주절대?"

"근데 요새 먹을 때마다 속이 거북해지는 걸 보면 악마 소리가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네."

모여 앉은 병사들이 잡담을 나누며 허기를 달래어갔다.

소감은 불만족.

간은 잘 되었지만, 역시 같은 것만 몇 주 째 먹으니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마누라가 만들어준 양배추절임을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진짜."

"그러게 말이다. 요새 이런 것만 먹어서 그런가, 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고……."

"아프면 사제한테 가보지 그러냐?"

"그것보다 선생님 약이 더 효과가 좋더라고. 먹다가 속 답답하면 이거 한 알씩만 먹어봐."

이전에 외출을 했던 병사가 꺼내든 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알약. 근래 영지에서 유통되는 게 허락된 ‘소화제’였다.

그들 역시 얼핏 들어본 내용을 떠올리며 감탄을 흘렸다.

"이 쪼끄만 거 하나만 먹어도 속이 거북한 게 나아진다 이거지?"

"다른 녀석들 말 들어보니까 효과는 좋다더라. 아, 그렇다고 성직자들에겐 보여주지 마라."

"하긴. 그놈들은 이런 걸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신성력으로는 공복을 해소할 수 없으며, 이는 심리적인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음식을 자꾸 먹으며 물리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다는 것.

반면 소화제는 알약 하나를 입에 넣기만 해도 그러한 문제를 해소시켜 주니, 매번 같은 음식을 먹는 병사들에겐 당연히 각광받을 수밖에 없다.

"이야, 이거 효과 좋네. 씹어 먹으니까 좀 쓰긴 하다만……."

"뭔 소리야. 효과 보려면 1시간은 걸린다던데."

"1시간 뒤에 느낄 거 지금 느껴도 되지 않나?"

"선생님이 아시면 까무러칠 말이네. 그리고 씹어 먹지 말고 이거랑 같이 삼켜먹으래."

곧 식량과 약을 가져온 병사가 새로운 걸 꺼내었다.

검은 액체가 담겨있는 유리병.

코르크마개를 열자 안쪽의 검은 액체에 거품이 끓어올랐다.

"그건 뭐냐?"

"선생님께서 약이랑 같이 먹으라 주신 거야. 코카나무 잎이랑 콜라나무? 거기서 나온 걸 탄산수에 타서 만들었다고 하던데?"

"코카 잎?"

병사가 눈을 껌뻑였다.

"그거 찻잎 아니야?"

"찻잎이면 끓여먹으라는 거겠네. 줘봐, 데워줄 테니까."

"야야 잠깐, 그거 데우지 마. 데우면 탄산 빠진다고 차게 식혀서 먹으래."

"탄산이면 맥주거품 아니야?"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라고?"

"맥주가 아니라 약주야 이것들아. 근데 다른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맥주랑 달리 취하지 않는데 톡 쏘는 맛이 단맛을 엄청 좋게 해준다더라고."

"톡 쏘는 맛? 뭐야 그게."

"마셔보면 알겠지."

투덜거리는 녀석들에게 그가 콜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입 안에서부터 톡톡 쏘는 느낌이 단맛을 보다 부각시키며, 목 안으로 넘어가며 생겨난 청량감에 속이 게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야, 이거 괜찮은데?"

"육포 먹느라 느글거렸던 속이 게워지는 느낌이야."

"크으! 이게 바로 맛이지! 취하지도 않아서 근무 중에 마시기도 좋을 것 같은데?"

콜라에 대해 병사들이 하나 같이 만족감을 토로했다.

그 순간 창밖에서 휘잉, 하고 대차게 불어오는 바람.

약주를 마신 병사들의 몸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야야 이러다 얼어 죽겠다."

"빨리 손난로 가져와!"

그렇게 손난로에 몸을 녹이며 식사를 이어가는 세 사람.

지겨운 육포와 감자를 먹었음에도, 평소와 달리 속이 한결 풀리는 감이 있었다.

소화제의 도움도 있지만, 그보단 약주가 가진 탄산과 달달함의 체감이 큰 덕이었다.

"선생님 참 대단하지 않냐? 어떻게 이런 신기하고 좋은 걸 매번 만드시는 거지?"

"정체가 뭘까?"

"글쎄다."

4년 전 죄수병으로 온 소년.

하지만 현재의 그는, 이 영지 내에선 누구보다도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공학이나 마법과 달리,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생물학에 정통해 있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같은 범인들이 넘볼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교단에게 싸움을 걸 정도니."

"정작 그런 사람이 사제복을 입고 다니는 건 웃기긴 하지만."

"그렇긴 해."

키키킥.

겨울날의 지루한 보초에는, 늘 그렇듯 시답잖은 잡담이 동반되고 있었다.

정작 화두에 오른 싸움이 현재진행형이란 걸 알지 못한 채.

* * *

-쿵!

회의실을 뒤흔드는 굉음.

그와 함께 회의의 참석자들의 시선이 어느 한 군데에 집중되었다.

회의실의 한가운데, 금발에 사제복을 걸친 청년이 표정을 왈칵 우그러트리고 있었다.

영지 내의 연구반 중 생활의약품 분야를 담당하는 자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 제안을 거부하는 겁니까!?"

셰인 골드리안.

그가 회의 중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는 건 흔히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물론 이곳에 모인 것은 블레이즈 영지군의 책임자들.

그 구성원은 연구 담당자와 군장교, 귀족 등 각 분야의 고위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런 권위자들인 만큼 셰인의 태도가 불쾌히 여겨질 법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중 선뜻 나서는 자가 없는 건, 그들조차 지적하는 것도 포기할 정도로 빈번이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시작이군.’

말로 해서 들어먹질 않으니 그런 생각만 떠오를 뿐.

그건 분쟁의 대척점에 있는 자에게도 적용되는 바였다.

"이 영지에서 마약의 유통을 허락하는 건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라 내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반박한 건 핀들레이 주교.

현 신성지원부대의 책임자로, 오늘은 유독 셰인의 말에 거세게 반발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약유통? 네, 말 잘 하셨네요. 제가 지금 거론한 모르핀이 이 콜라에 들어있는 성분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건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코르크 마개에 막힌 유리병.

그 안에 고여 있는 검은 액체는 코카잎과 콜라나무의 원액, 카라멜 등을 탄산수에 섞어 만든 물건이었다.

명칭은 콜라.

주재료 중 하나인 콜라나무에서 이름을 딴 약주였다.

"이 콜라를 만드는 데에 쓰인 코카나무의 잎사귀는 마약 성분이 들어있지만, 제국에서도 엄연히 찻잎으로 유통되는 상태입니다. 그것도 이제까지 별문제 없이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코카나무의 잎은 진통효과를 통해, 허브와 같은 정신안정과 피로회복을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피로회복을 유도하는 물질 중 하나가 바로 코카인.

제국이 그토록 경계하는 마약성분 중 하나로, 정제를 할 경우 셰인이 허가를 바라는 모르핀과 마찬가지로 인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물건이다.

"마약이라 한들 사용하기에 따라선 긍정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회의하기 전에 보내주신 논문에 이에 대한 관리법을 적어뒀을 텐데, 설마 여기오기 전에 숙지하지 않으신 겁니까!?"

"당연히 읽었지! 몇 번이고 읽었고말고!"

핀들레이가 서류뭉치를 책상에 내리찍었다.

쿵, 하는 소리.

감정이 실린 손짓이나, 내리친 서류에는 구겨진 자국과 손의 떼가 탄 흔적이 적잖게 묻어나 있었다.

몇 번이고 읽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하지만 자네가 이번 회의에서 거론한 건 양귀비가 아닌가?"

"그 또한 코카잎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기에 따라서……."

"아니, 코카잎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찻잎으로 우려도 별문제가 없는 코카잎과 달리, 양귀비는 생으로 사용해도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공정을 거쳐서 마약으로 가공하는가, 생으로 사용해도 위험한가.

거기엔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제국은 화학적 지식을 갖춘 연금술사들을 제외하면, 물질에서 무언가를 추출한다는 것 자체를 엄두를 내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이 논문을 읽어보니 코카잎에 포함된 마약성분은 극히 미량……. 그중 인체에 해가 될 정도의 양만을 모으고, 정제해 유통할 정도라면 필시 막대한 예산과 집단성이 전제되지 않겠나?"

그런 집단성이 전제되는 물질은 은밀히 유통하기가 쉽지 않은 법.

그건 제국의 군사비 중 절반가량이 투자되는, 이 영지의 공장지대만 둘러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편의 주재료인 양귀비는 그 즙만 짜내어도 마약효과를 누릴 수 있는 식물이지. 기르기만 하면 누구나 마약효과를 누릴 수 있는 만큼, 사용을 허가하는 순간 유출 시의 위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을 간과하는 겐가!?"

"그 관리법도 이번 보고서에 적어놓은……."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 개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리법이지. 자네 외의 사람들이 그 외의 방식으로 악용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입술을 깨무는 셰인.

거기에 뭐라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핀들레이가 셰인을 외면하며 사샤에게 으름장을 토해내었다.

"사령관! 이 영지에서 양귀비의 유통을 정식으로 허가한다면, 내 교단에 그 사실을 보고하여 이 영지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도록 하겠소!"

다른 건 몰라도 마약의 유통만은 허락할 수 없다.

그에 강경책마저 쓰겠다는 선언을 들은 사샤가, 한숨을 흘리며 셰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셰인 골드리안. 아편의 사용은 각하하겠다."

"……망할."

욱하던 셰인이 입술을 깨물며 제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정리하였다.

그를 지켜보던 학자들과 장교들이 실실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투기장은 결국 핀들레이의 승리인가?"

"아까웠군. 양귀비만 아니었으면 가능성은 있었을 텐데."

"이 사람아. 난 이 때까지 찻잎에 마약이 있다는 것도 몰랐단 말이네."

"그럼 저 콜라라는 것을 금지하면……."

"아니, 이제까지 문제없이 쓰이지 않았나? 경계해야 할 건 코카잎 자체가 아니라 정제법이겠지."

"그건 그렇고 파라켈쿠스. 자네 제자가 벌이는 설전은 언제 봐도 재밌구려."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내 제자가 아니라네. 더 빨리 만났어도 지금 제자를 갈아치웠겠지만."

회의의 참여자들은 대부분 셰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치외법권지라 한들 교단은 여전히 치유를 전담하는 상태.

그런 귀중한 전력의 대표자에게 설전을 벌일 자는 셰인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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