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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70화 (70/255)

의무병의 환생 70화

"…일 좀 쉬엄쉬엄하지 그래?"

내어준 다과를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중에도, 사샤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서류에서 손이 떨어지는 건 다과를 대신해 물은 담배를 떼어낼 때 정도.

후우, 연기를 내뱉은 사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 손은 언제나 서류에 고정되고는 하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 성벽이 무너질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면 여기서 서류를 정리하면 되는 몸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선배님이 더 걱정됩니다만."

"나는 왜?"

"성장기의 몸으로 여러 현장을 뛰어다니는데다, 밤을 새가며 연구를 하고 계시니까요."

"알면 일 좀 줄여줘라. 개인적으로 연구할 시간도 바쁜데."

"송구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정예병 중 가장 신뢰하는 것이 선배님이니까요. 오히려, 선배님께서 연구시간을 줄이며 휴식에 힘을 써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만……."

예의는 차리되 공적인 부분에선 가차 없이 부려먹는다.

개인적으론 얄밉지만, 애당초 그녀는 이 방어선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황명도 거부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수틀리면 황제의 면전에도 쌍욕을 퍼부을 수 있다 호언장담하는 몸이거늘, 존경하는 자를 부려먹는 건 애교라 봐줄 일이 아니겠는가?

"허허, 나 같은 반푼이가 가장 신뢰하는 녀석이라니. 어지간히 부하들에게 신뢰를 못 받나 보네. 퇴역병도 반란군으로 전락하는 마당에……."

거기에 괜한 심술이 들어 툭 내던진 셰인.

하지만 뒤늦게 말실수를 자각하고 제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아.’

이전까지 서류를 뒤적이던 손짓이 잠시 멈춰졌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살짝 씹은 느낌.

턱에 힘이 실린 것이다.

‘이 녀석, 의외로 속에 담아두는 게 많았지.’

영지를 지키기 위해선 범죄자나 이단자도 등용하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뒤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해소하지 못하기에 속에 담아두는 게 많은 편.

아무리 굳센 나무라도 몇 번이고 두드리면 무너지듯, 사샤의 심리상태 역시 마냥 괜찮다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잡아온 자……. 바스타드라고 했죠."

특히나 인간관계의 경우에는 더욱이.

다른 사람과 있을 때엔 내색하지 않던 그녀는, 유독 셰인과 있을 때면 지금과 같은 아쉬움을 보여주곤 하였다.

"제대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녀석입니다. 특히나 공학에 관련된 부분에서 여러모로 기여를 해주었던 친구였죠."

유능한 군인이자 연구원.

가끔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던 그가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로썬 적잖은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셰인이 그 아쉬움에 기대어 물었다.

"그 녀석, 어떻게 처리할 거야?"

"반란군의 간부는 대부분 사형입니다. 야망을 가진 녀석은 살려둔다면 다시 반란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옛 부하한테도 가차 없네."

"이 성벽을 지키기 위해선 뭐든 해야 하니까요."

사샤가 냉정히 말했다.

이전까지의 회의감이 무색하게도, 그 말에서만큼은 진지함과 살벌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영지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슬슬 은퇴를 생각해보는 건 어때?"

하지만 그런 태도도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는 게 느껴지고 있다.

사샤 역시 자각이 있는 듯 씁쓸함을 곱씹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아직은 무리입니다."

"어째서?"

"제 뒤를 이을 인재가 없기 때문이죠."

인재.

블레이즈 영지이기에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개 귀족작위는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법으로 지정되었지만, 이 영지는 치외법권지이기에 그런 법에 구애되지 않아도 되니까.

미혼인 사샤라도 후계자를 선택하는 데에 문제는 없다.

"본래엔 일라이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었지만……."

돈 때문에 가출한 수양딸 겸 직계 제자를.

"……망할 년."

그녀를 떠올리던 사샤가 표정을 구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애매히 웃는 것도 잠시.

"선배님께선……."

다음 후보를 생각하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

이후 말꼬리를 흐린 사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제가 실언을 했군요."

다시 작업에 들어가는 사샤.

아쉬움이 적잖아 묻어난 건 자신을 후계자 후보로 고려하고 있기 때문일 터.

하지만 제국에 변혁을 가져오겠단 의지를 존중하기로 한 마당에, 어찌 그의 신변을 이 땅에 구속할 수 있을까?

"선배님께선 이 영지를 벗어난 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지향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지의 성벽은 당신을 가두기엔 너무나도 작으니까요."

뒤의 창을 통해 보이는 성벽.

그곳을 슬쩍 돌아본 사샤가 마저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셰인이 쓰게 웃으며 내어진 차를 들이켰다.

‘한 20년만 일찍 환생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좀 더 과거에 만났다면, 남들 앞에서도 서로의 관계를 편히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사샤가 셰인에게 서류를 한 장 건네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후에 있을 임무에 대해 상의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야, 나 일 마치자마자 보고하러 온 거 알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임무는 눈이 그칠 시기로 잡혀 있으니까요."

겨울이 완전히 가려면 앞으로 2달은 남은 상태.

그건 앞으로 2달간은 셰인의 자유 활동을 보장한다는 의미겠지만, 반대로 2달이나 준비를 걸칠 정도로 영지에서도 중대히 여기는 일을 맡기겠단 것이다.

"기한은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별 다른 변수가 없다면 선배님께서 이곳에서 치를 마지막 임무가 되겠군요."

마지막 임무.

죄수병에겐 이보다 좋은 말이 또 없겠지만, 정작 셰인이 느낀 건 아쉬움과 조급함이었다.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겠네."

아무리 이 영지에서 모든 걸 이룰 순 없다 해도, 이 영지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 * *

2달.

그 시간 동안 셰인이 할 일은 이 영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해 가는 것.

신성지원부대의 활동지에 향한 건 그 작업에 들어가기 전의 시찰을 위해서였다.

"이, 이단!"

물론 신성지원부대에 속한 성직자들은 셰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4년간 지켜봐온 고참들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험한 곳이다 보니 장기적으로 근무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렇게 교체된 이들은 여전히 제국에 물들어 있는 상태. 사실상 부대 내 셰인에 대한 취급은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크리스틴이 있었을 때엔 그래도 편했는데.’

주교 크리스틴.

아니, 이제는 추기경이라고 불려야 할 사람이다.

그는 1년 전 이곳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갔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까.

‘그만한 인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니 이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앞으로 1년은 더 여기에 있어야 하는 참.

그 동안만이라도 그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적잖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런 마음으로 지나가는 성직자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네니.

"히익, 이단!"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몸을 움츠리며 무릎을 꿇었다.

늘 있는 반응이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이어지는 기도문 역시도.

"오, 주여. 부디 이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저기 있는 환자 길이나 인도해 주세요."

치료해야 할 환자가 가득한 마당에 뭐하는 건지.

속으로 투덜거릴 무렵 누군가가 호통을 치며 달려왔다.

"거기 뭣들 하고 있나! 이쪽에 환자가 있는 게 안 보이나!?"

주교 핀들레이.

그 역시 셰인과 마찬가지로 이 영지에 머무른 지 4년이 지났으며, 크리스틴의 뒤를 이어 신성지원부대의 책임자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아, 네, 네! 죄송합니다!"

"하여간, 정식 신자라는 자들이 병자들을 앞두고 한눈을 팔아서야……."

떠나가는 사제들을 보던 핀들레이가 한을 흘렸다.

말투에서부터 고지식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또한 독실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표현의 방식을 생각하면 크리스틴처럼 남들의 호의를 사기엔 어려운 태도라 할 수 있었다.

"…이단 녀석."

그리고 그런 태도는 척을 지는 자에겐 유감 없이 드러나는 법.

배려라곤 쥐뿔도 없는 인사말에 셰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회의 이후로 간만이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놈만 없었다면 좋을 참이었다."

"우연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서로를 향한 비아냥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매 회의 때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니 당연하겠지만, 회의가 아닌 중에 신경전을 벌여봐야 서로만 피곤해질 뿐이다.

그건 핀들레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터.

지금 못마땅함을 보이는 건 마약과는 별개 된 부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내 누누이 얘기했을 텐데? 이곳에 이단인 네가 들어오면 사제들이 혼란해하니 자중하라고."

"그거야 조건부였죠. 그때 약조를 잘 수행하는지를 확인하러 온 겁니다."

교본을 작성하던 당시.

구급법의 경우엔 영지에서 먼저 사용하는 걸 허가했지만, 그 책을 영지 밖에 출판하겠다 했을 때엔 거센 반대가 있었다.

작성 의도가 올바르다는 건 인정하나, 그 근간이 이단의 지식에 있는 만큼 제국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출판을 강행하려 했을 때 핀들레이가 내건 조건이 신성지원부대에서의 퇴출.

이유는 새로이 들어온 신자들에게 있어, 셰인의 존재가 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의도는 납득이 되지만 치료에 간섭하지 못하는 건 의사에게 뼈아프게 여겨질 상황.

그렇기에 셰인 역시 핀들레이에게 역으로 조건을 걸었다.

‘영지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들에게 구급법을 숙지할 의무를 부여하라.’

순수한 신성력만으로 치료를 하던 성직자들에게 새로운 치료방식을 전수한다.

비록 이 영지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새로운 지식을 배척해온 교단에게 있어선 쉬이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실 반 정도는 핀들레이의 무리한 제안을 물리고자 했던 것이지만…….

‘……수락하지.’

정작 핀들레이는 그 날 회의에서 조건을 내었을 때에 바로 수긍을 했고, 이후 블레이즈 영지에 온 상제들에 한해선 구급법을 숙지하도록 만들었다.

그 교육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수월히 이루어졌다.

심폐소생을 제외하면 교리에 반하는 것은 전혀 없었던 데다, 사용량이 한정된 신성력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 환자들의 구제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

전장에서 활약하는 성직자들에게도 절실한 기술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건 그걸 전파해준 게 크리스틴이 아닌 저 노친네라는 거지.’

못마땅하여 눈치를 주자 핀들레이가 발끈하며 등을 돌렸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그렇게 떠나가는 핀들레이가 주변을 지나는 사제들을 붙잡고, 그들의 행실에 대한 훈계를 이어갔다.

성을 내며 따박따박 지시를 내리는 모습.

사제들은 그에 기겁하면서도 실수를 바로잡으며 처치를 제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저 인간은 할 건 다 하면서 왜 저리 욕을 입에 달고 사나."

그래도 제 부하들을 면전에 대고 등신 취급하던 옛 상사들보단 훨씬 낫네.

셰인이 피식 웃으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 *

그 후에도 마저 성당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잠시.

문득 기도실에서 몇몇 신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셰인의 눈에 들어왔다.

‘꼬꼬마들?’

교단의 수행원들.

셰인이 개인적으로 ‘꼬꼬마들’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새로이 들어온 아이들도 있지만, 셰인과 비슷한 또래인 소년소녀도 적잖게 보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익은 건 베일로 머리를 뒤덮고 있는 수녀 한 명.

‘…주근께.’

수녀 메어리.

그녀가 양 손을 맞잡은 채 신상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자세만큼은 고결한 성직자 그 자체…. 아니, 자세만이 아니다.

그 몸에선 분명 빛이 나오고 있었다.

"우, 오오오!"

주변에 있는 수행원들이, 메어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며 하나 같이 감탄을 흘렸다.

그건 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용케도 각성했네.’

미성년에 신성력을 각성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곳에서 4년을 넘게 보내온 셰인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보자, 미성년에 신성력을 각성한 사람이라 한다면 레온이랑 또…….’

떠올리던 중 셰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젤라. 그 여자였지.’

심문관 안젤라.

영지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자였다. 그야 자신이 이 영지에 올 계기를 마련한 자가 그녀였으니까.

그 정도로 독실한 신자가 자신의 정의를 위해 권력을 얻고자 친구를 배신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감옥에 있으려나.’

"아, 셰인 씨군요."

안젤라에 대해 생각할 무렵 누군가가 말을 건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앞으로 고개를 향하니, 다른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메어리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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