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72화
‘아쉽네, 4년간 한 게 고작 이 정도라는 게.’
4년간 베르디에게 한 일이라곤 사탕을 건네주고 가끔 얘기를 나눈 것뿐.
하지만 그런 행동도 성과가 있는지, 그 날 이후로는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는 태도는 자중하게 된 상태였다.
아주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때 이후로는 무언가 긍정적인 변화는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지. 아직 이 애가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도 모르니까…….’
근 4년.
베르디의 사연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물었지만, 대부분은 모른다 말하였다.
사정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할 뿐.
그나마 언질을 줬던 건, 지금은 이 영지를 벗어난 크리스틴 정도였다.
‘셰인, 베르디에 대한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에겐 전해줄 수 없습니다. 전해주더라도 신앙을 개화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란 신뢰가 있는 자들에게만이 가능한 것이죠.’
교리를 규율로 삼는 교단 사람들에게 있어선 구두약속조차도 절대적인 것.
모두가 침묵을 한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약속이란 것이며, 그걸 공유할 자는 같은 신자. 혹은 죄를 참회하는 고해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 주교의 말에 셰인은 신자들로부터 베르디의 사정에 대해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 역시.
‘그래도 괜찮다면…… 그 아이를 계속 지켜봐주세요. 어쩌면 셰인이라면, 저희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셰인도 원정에 대한 공고를 들으셨나요?"
뒤늦은 물음에 회고가 끊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마주한 건 사탕을 자신을 올려다보는 베르디의 모습.
머쓱함을 느낀 셰인이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뭐……. 아까 사령관에게 듣고 왔지. 장기적으로 진행될 거라 들었는데, 교단에도 연락이 왔어?"
"네, 함께 갈 성직자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셰인도 가실 건가요?"
"가야지 뭐. 사령관이 직접 명령했으니까. 베르디 넌……."
"갈 거예요."
이어지는 즉답.
한때의 원정에서 몸을 버리려는 시도를 본 적이 있기에 더욱 탐탁찮게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베르디는 개의치 않고 나름대로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번 원정은 신자분들에겐 무척 힘든 곳이니까요. 손이 될 수 있다면 따라가는 게 좋다 생각해요."
다른 신자들이 들어서기 어려우니 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빈자리를 충당해 주겠다.
4년 전이었다면 자기희생이 아닌 자포자기로 받아들였을 말이겠지만…….
"말리실 건가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말리겠어."
그래, 지금은 그때랑은 다르지 않은가?
심정지도 4년 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는 마당.
순례원정 때와 달리 제대로 된 준비를 거친 만큼, 마냥 위험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말려야 할 건 괜한 위험이나 무리를 저지를 때 정도겠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원정에 왈가왈부할 순 없으리라.
"가는 건 좋지만, 그때처럼 무리하면 안 된다."
머리를 툭툭 건드려주고 자리를 벗어나는 셰인.
베르디는 떠나가는 셰인을 노려보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4년.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반성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도 이젠 아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더욱이.
그런 녀석을 위해 희생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 * *
눈이 녹고, 땅 밑에 숨어있던 싹이 솟아오를 준비를 취하는 시기.
그 따스함과 더불어 항구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만끽한 셰인이 기지개를 펴갔다.
"정말 항해하기 딱 좋은 날이네."
남은 형량 1년.
셰인은 블레이즈 영지와 협력관계에 있는 해안지대의 영지, 마리안 백작령에서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수개월 간 바다를 누비며 이루어질 해상원정의 준비를.
"…마지막 원정이랍시고 던져준 게 해상 원정이라니. 부려먹기도 엄청나게 부려먹네."
쓰게 웃은 셰인이 사령관이 들려주었던 얘기를 떠올려보았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이 해역 인근을 지나며 있는 섬들에 교역품을 전달하며, 벽외지역에 자리한 주둔구역을 정찰하고 오는 것입니다.’
‘주둔구역? 바다 쪽으로?’
‘수십 년 전부터 시도했고, 5년 전에 적당한 터를 하나 잡는 데에 성공했죠. 보고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고대에 사용했다 추정되는 유적지에 터를 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표로 한 곳은 변경지대의 중심부와 인접한 섬으로, 그 섬에 주둔하여 변경지대의 심층부를 상륙하는 구조인 듯하였다.
확실히 성벽에서부터 나아가는 것보단 효율적이겠지만, 해로를 통한 활동에는 여러모로 많은 투자가 오갈 수밖에 없다.
배의 관리는 물론이고 지상과 달리 토벌도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
마물의 습격이 잦은데다, 자칫 난파되기라도 하면 물자와 생존자의 회수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여러 문제가 따르니, 해로를 통해 나아가는 건 군대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라 불리는 이들 뿐일 것이다.
‘그럼 이번 원정은 그쪽의 보급을 위해서 가는 거야? 아니면 증원?’
‘아니요, 정찰입니다.’
‘정찰?’
‘1년 전부터 이곳과 영지를 오가는 왕복선이 돌아오질 않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보낸 보급선과 정찰선 역시도.’
‘…….’
‘……그렇기에 최대한 준비를 해서 갈 예정입니다.’
최대의 준비…….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연락이 끊어졌다는 정황 자체가 사실상 궤멸마저 염두에 둬야 할 일이니까.
‘…이유는 알아?’
그 위험은 자신들에게도 노출될 터.
그렇다면 하다못해 무슨 위험이 있는지를 물어보니, 사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셰인에게 종이 한 장을 내어주었다.
‘얼마 전, 배에 탑승했던 전서구를 통해 온 쪽지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검은 안개를 조심하라.]
망망대해를 통해 날아온 전서구가 전해준 편지 한 장.
전서구가 통신장비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나 쓰는 최후의 수단임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미 사건이 끝난 후 한참이나 뒤에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원정에 참여하는 자들은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그들의 구출은 사실상 무리일 것이고, 아무리 최대한의 준비를 거쳐도 얘기치 못한 사태를 마주할 위험이 있다는 걸.
"……마지막이라고 빡센 일을 시키는군."
그녀답다면 그녀답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물품이 든 배낭을 들며 항구를 누비는 가운데, 문득 한 장소에 갑옷을 입은 이들이 여럿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블레이즈 영지에 상주하는 성기사단들.
그 무리를 지도하는 이 중 한 명은 셰인도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 레온."
"아, 셰인인가?"
이름을 부르자 레온이 바로 환대해 주었다.
큼직한 거구에 갑옷을 두르고 있는 남성.
셰인과 동갑임에도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체격을 지니고 있다.
키는 물론 근육 역시.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이번 원정의 참여자들 중엔 성기사단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의외네. 성직자들은 배 위에서 활동하기 버겁다고 참여율이 적다 들었는데……."
"그 또한 시련으로 받아들일 뿐이지."
그리 말한 레온이 제 배후로 시선을 향했다.
따라붙은 건 30명 정도 되는 성기사들.
그들은 셰인과 대화를 나누는 레온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레온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신경 쓰는 것처럼.
레온이 시선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지금의 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이니, 남들이 어려워하는 곳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지. 이런 나를 따라 와준 단원들에겐 고마움만 느낄 뿐이다."
태양 기사단의 부단장.
그것이 현재 레온이 올라있는 자리였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그가 그 자리에 오른 건 놀랍지만, 실상은 책임자의 부재와 세습제가 엮이며 생긴 결과물이었다.
본래 태양기사단은 대대로 아슬란 가문원이 단장에 올라왔으니까.
그 전통이 4년 전 단장의 자격을 가진 자가 사망했기에, 그 다음으로 예정되었던 레온을 어쩔 수 없이 부단장의 자리에 올린 것이다.
이전 단장인 레온의 아버지가 대신 단장을 맡고 있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현역으로 뛰기엔 무리가 있는 상태.
실제로 전장에 나서지 못하고 고문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으며, 이런 상징의 부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레온이 부단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은 자리에 꺾이지 않으나 걱정이 들었는데……. 그 철부지도 책임을 가지니 어른스러워지는 게 보이는군.’
4년 전만 해도 어깨뼈가 빠지고 울음을 터트리던 몸집만 큰 어린아이였거늘.
그래도 좋은 변화다, 생각한 셰인이 피식 웃으며 레온의 가슴을 두드렸다.
"상담할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친구끼린 돕고 사는 거니까."
친구.
그 말을 의외라 여긴 듯 레온이 눈을 둥그렇게 뜨다,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상대는 이단자.
자신은 신을 섬기는 몸.
본래라면 척을 져야 하는 몸이지만, 지금의 감사인사만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이단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테니까.
‘어디, 그 밖에 또 누가 타려나.’
항구에 정박한 배를 앞둔 셰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용인원만 해도 1200명에 달하는 대형 항해선.
그 중 절반 가까이가 본래 배에 타던 선원과 전투원들이며, 나머지 절반이 영지군에서 채용한 이들이었다.
영지군에서 온 자들은 그 분포가 다양했다.
치유를 담당하는 성직자만 해도 100여명.
그 외에도 용병과 기사, 귀족은 물론 마법사나 연구직에 속한 학자들도 적잖게 보인다.
미지에 대한 탐구심이 강한 그들에게 있어, 정찰이라곤 하나 벽외지역의 심층부를 확인할 기회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눈에 익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콧대가 날카로운 표독스런 인상의 노인.
‘케이미 스승님도 타시네.’
연금술사 파라켈쿠스.
같은 연구동을 쓰는 케이미의 스승으로, 근 4년간 셰인에게 여러 지원을 해준 자였다.
사실상 셰인의 연구에서 가능성을 발견해 주고 밀어준 것도 그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생활의학’이란 생소한 분야의 연구반을 창설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케이미는……. 어쩔 수 없이 영지에 남게 된 건가.’
이곳에 오기 전에 같이 가고 싶다고 징징거렸던 게 기억이 남았다.
정작 스승의 과제가 남아 있어 영지에 남았다고 하는데……. 설마 그 스승이 이번 원정에 참여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바빠 보이니까 인사는 나중에 해야겠네."
마저 인근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문득 배의 짐칸에 실어 넣는 인부들이 셰인의 눈에 들어왔다.
상자에 그려진 마크를 보아 식량으로 추측이 되었다. 셰인이 그 주변을 슬쩍 지나치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으, 이 냄새 뭐야?"
"뭔가 신 냄새가 나는데. 상한 건가?"
"식초에 졸인 채소 같은데?"
"왜 굳이 이런 걸 넣으라 한 거지?"
"사령관님 명령이니 따라야지. 후딱 실어 넣자고."
냄새를 호소하면서도 일이라 여기며 짐을 실어 넣는 일꾼들.
셰인이 그들이 나아가는 곳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부탁도 잘 들어준 것 같네.’
식량의 추가.
이번 원정에 자신이 참여하는 조건 중 하나로 선정했던 것이다.
무리할지도 모르는 부탁이거늘, 다행히 잘 들어주었다 생각한 셰인이 가방을 손에 쥔 채 배의 갑판으로 향했다.
널찍한 갑판에서 준비를 하는 선원들.
바다와 이웃한 항구의 경치를 감상하는 승객들.
그들의 사이를 누비던 셰인이 선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 문득 앞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코델리아! 꾸물대지 말고 빨리 안 따라와!?"
"죄송합니다 류드라 님."
소리를 지른 것은 웨이브가 진 금발에 드레스를 걸친 여인.
겉으로만 봐도 귀족으로 추측이 되나, 손에 쥔 스태프는 흔히 마법사들이 장비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마법반에 속해 있는 귀족 출신의 마법사.
그런 여인의 뒤를 따르는 건 야비한 인상의 집사와, 무거운 배낭을 잡아끄는 추레한 로브의 소녀였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녀…….
그런 소녀가 끙끙대는 게 짜증나는 듯 귀족 여자가 혀를 차대었다.
"하여간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니까. 마법도 제대로 못 쓰고 머리도 나쁘고……. 그럼 힘이라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야?"
"덴 가문 녀석들이 그렇죠 뭐. 무능한 주제에 이상만 커가지고."
키키킥, 장단을 맞추는 집사가 여자를 마저 뒤따랐다.
배낭을 쥔 로브의 소녀가 주먹을 틀어쥐었지만, 이내 그들의 뒤를 담담히 뒤따랐다.
셰인은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귀족이 자신의 종자나 일꾼에게 핍박을 하는 건 흔한 일.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접근하는 건 오지랖이 되겠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이 쓰였던 건 로브를 쓴 여성을 부른 호칭이었다.
‘……덴?’
일라이 덴.
한때 마주했던 여인과 똑같은 성이지 않은가?
"슬슬 출항 준비시간입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진동이 거세지니, 승객여러분들께선 최대한 빨리 짐을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력에 반응하여 소리를 퍼트리는 통신장치.
그 소리가 배 전체에 울려 퍼지며 셰인의 행동을 부추겼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지만, 일단은 제 방을 찾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뭐,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겠지.’
아무리 배가 크더라도 결국 같은 공간이고, 동시에 같은 원정대에 속한 동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