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74화 (74/255)

의무병의 환생 74화

절임채소(피클).

냉장 기능이 귀한 현 시대에서 주로 쓰는 보존방식 중 하나로, 소금물이나 식초 등으로 채소를 절여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양배추는 이 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채소 중 하나.

귀족들이 먹는 음식이나 데코레이션엔 신선한 양배추가 늘 따라오며, 서민들 역시 장기 보관을 위해 피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셰인은 이번 항해에 탑승하기 전, 사령관에게 부탁하여 양배추절임을 대량으로 제조하고 보급으로 삼아 달라 하였다.

매 끼니를 양배추로 때운다면 굳이 비타민제를 정제하지 않고도, 필요한 양만큼의 비타민을 ‘아주 싼 값에’ 주기적으로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비용면에서도 탁월한 해결책이다만……. 그게 쉽게 이루어졌다면 우리들도 저주 때문에 고생하진 않았겠지. 왜 우리가 이제까지 절임채소를 보존식으로 삼지 않았을 것 같나?"

‘영양학에 대한 지식이 쥐똥만큼도 없으니까 그렇지.’

쌀이나 밀과 같은 곡물이 활력을, 고기가 살을 찌운다는 개념 은 갖추고 있지만 그것 뿐.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효율적으로 수급할 채소의 인지도는, 기껏 해봐야 미용에 도움을 준다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요컨대 채소는 여성이나 겉치장에 신경을 쓰는 귀족,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 시들고 초라한 싸구려를 먹는다는 인식이 다분하다는 것.

뱃사람처럼 몸을 쓰는 일이 잦은 상마초들의 경우 차라리 딱딱한 비스킷을 씹지, 신선한 채소 따윈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풍조가 도는 것을 보면 이 원정의 미래가 암울하다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뭐 다 방법이 있죠."

이죽거리는 셰인.

왜인지 모를 구린 느낌이 풍기는 미소.

그것을 마주한 드레이크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그래.

자신과 책사의 기질이 말이다.

* * *

항해란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바다의 기후는 시시각각 변하며, 육지에 있을 때와 달리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도 없다.

활동 반경도 배가 전부.

해결수단도 배에 있는 장비로 처리해야 하며, 중도에 배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선원과 물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고 만다.

대형 항해선의 경우 수백 명이 꾸준히 관리해야 할 정도.

그 노동 강도는 당연히 육지 이상이며, 그런 만큼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식사와 휴식은 뱃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뭐야, 또 양배추야?"

그런 마당에 근래 식사시간에 늘 올라오는 양배추 절임.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선원들이 쏟아내는 건 아우성이었다.

"야야, 이런 거 내주지 말라고 했잖아."

"고기를 달라고!"

고기와 계란, 우유 등……. 짐승이 빚어 만든 모든 것이야말로 활력의 원천인 법.

반대로 채소란 열량의 보충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다.

노동강도가 높은 데에 비해 영양학에 무지한 선원들이기에, 더욱이 그런 편견이 크게 들 수밖에 없었다.

"선장님도 우리가 안 먹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양배추를 가지고 온 거지?"

"얼마 전에 그랬지. 이번 항해에서 식사에는 양배추가 끼니마다 들어갈 거라고……."

"에잉, 풀떼기를 먹을 바에야 차라리 내가 낚시해서 먹지."

다행히도 그들이 항해를 하는 곳은 바다.

호흡과 활동에만 지장이 있을 뿐, 육지 이상으로 생명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미끼는 양배추 쓰는 건 어떠냐? 어차피 먹지도 못 하는 거."

"우리도 먹기 싫은 걸 물고기들이 잘도 먹으러 오겠네."

"그럼 저 많은 배추들을 다 어디에 써 먹어?"

"산책이라도 시키지 그러냐?"

"예? 배추를 산책시킨다고요?"

깔깔깔.

으레 그렇듯 농담을 주고받으며 낚시를 시도하는 선원들.

숙련된 선원들에게 있어 물고기를 낚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오오! 대어다!!"

"여기도 하나 낚았어!"

"구워라! 파티다아!!"

그렇게 낚아낸 생선들은 굽거나, 향신료를 치거나 수프에 넣어먹는 둥, 온갖 방식으로 조리하며 든든한 식사를 공급해 주었다.

당연한 거지만 섭취는 양념을 치거나 굽는 등의 조리를 거친다.

날 것을 먹는 건 야만족이나 하는 미개한 방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귀족 놈들은 안에서 고오~급진 음식을 먹고 있겠지?"

"야야, 부러울 게 뭐가 있어? 생으로 낚아서 샤악! 구워 먹는 게 별미인 법인데 말이야."

"신선하면 뭐하냐. 냉동고에서 며칠 동안 묵혀 놓은 것 자체가 신선도가 떨어지는 건데."

그런 식으로 귀족들은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가십거리로 삼는 선원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막 탑승한 선원들과 달리 이전 항해에서도 괴혈병에 시달렸었다.

육지에 상륙한 시간도 얼마 안 되었던 그들에게 있어, 신선한 음식을 보급 받지 못했을 때에 따라오는 결과는 명확한 것이었다.

"그으으…… 죽을 것 같다."

항해 후 열흘이 지났을 무렵.

본래부터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렸던 선원들이 고통을 호소하였다.

"몸이, 무거워……."

"아, 갑자기 코피가."

"우웨엑!"

항해가 이어질수록 선원들의 입에선 아우성이 늘어갔다.

앓아누워 쓰러지는 선원들도 생긴 상태.

얼마 전 새로 원정대에 참여한 이들은 아직 증세가 괜찮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호전에 불과하리라 여겨졌다.

대략 3개월, 혹은 육지에 발을 붙이는 시간이 적을수록, 바다의 저주는 서서히 인간을 침범하여 그 몸을 무너트리려 한다.

장기 원정을 예정에 둔 이상, 그들 역시 몇 달 간의 항해 끝에 자신들과 같은 꼴이 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으아……. 이빨 빠졌다. 이거 사제한테 가져가면 붙여주나?"

"지금 사제들 멀미 때문에 죽어나가는 중이야."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도 위급한 녀석들을 우선으로 치료하고……."

가장 큰 문제점은 저주를 치료해줄 사제들이 배에선 활동이 어렵다는 것.

더군다나 근본적인 문제가 영양분의 결핍인 이상, 손상된 부분을 일시적으로 복원시켜도 머지않아 다시 재발하게 된다.

신성력만으론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가는 환자들을 모두 커버할 순 없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많이 타면 뭐하냐, 거의 치료도 못 하는데."

"이번 원정도 고생길이겠군."

성직자가 얼마나 되건 바다 위에선 저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그것이 저주에 시달리는 모든 선원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시달려야 하는 이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 전까진.

"무, 뭐야. 너희들 왜 그렇게 멀쩡해?"

"응? 그러게 말이다."

"원래 이때쯤엔 기운이 떨어졌는데 왜 이렇게 멀쩡하지?"

분명 항해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골골대었던 이들이거늘.

정작 항해 시작 후 열흘이 지났을 무렵, 그들의 얼굴엔 활력이 돋고 있었다.

"우효오오!! 몸이 날아갈 것 같구나!! 하하하!!"

"바닷바람 시원하고 좋은데!?"

급기야 몇몇 선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뛰며, 자신들의 몸에 도드라진 근육을 뽐내기에 이르렀다.

지속되는 구토와 탈수로 수척해진 환자들은 그들을 보며 부러움을, 동시에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너희들 어떻게 된 거야? 사제들한테 특별치료라도 받은 거야?"

"아니, 사제가 아니라 선생님한테 도움을 받았지."

"선생님?"

"그래, 출발할 때부터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는데, 선생님께서 주신 사탕 하나 먹고 잠 좀 자니까! 낫더라고~!"

"어, 그래. 나도 그랬어."

"그 사탕에 뭔가 있는 건가?"

재잘거리며 감탄을 흘리는 건강한 선원들.

사탕 하나에 회복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생각되었지만, 정작 그게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날이 갈수록 상태에 큰 차이를 보였다.

그 차이가 도드라질수록 커져가는 박탈감. 그리고 건강의 악신호.

그 모든 것을 버티지 못한 선원들은, 끝내 떼를 지어 셰인에게 몰려가기에 이르렀다.

"선생님! 우리에게도 사탕을!"

"제발! 저주 때문에 죽을 것 같아요!!"

홀로 성경책을 읽던 중, 셰인은 자신의 방에 찾아온 무수한 선원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떼로 몰려온 것도 모자라 무릎까지 굽히며 전력을 다해 호소를 해온다.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셰인이 한정된 비타민제를 선원들에게 나눠준 이유였다.

"죄송하지만 다 떨어졌네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타민제는 바닥이 난 상태.

셰인이 내세운 빈 병을 바라보던 선원들이 차차 절망을 토해갔다.

"전부 다 떨어졌다니……."

"그럼 우린 이번 항해에도 저주에 시달려야 하는 건가…?"

"젠장, 좀 더 빨리 올걸!"

마지막 희망이라 여겼던 사탕마저 없어졌다.

그에 선원들이 차차 좌절하며 쓰러져갔지만, 정작 셰인은 그들과 달리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애초에 사탕의 목적은 선원들 전부를 치료하기 위함이 아닌, 지금처럼 다수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아뇨, 방법은 있습니다."

"바, 방법이 있는 겁니까?"

"네, 이 배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죠."

선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말 한 마디에 모두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된 순간.

셰인은 그들의 앞에서 자애롭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제가 만든 사탕은……. 신성한 과실에서 추출된 물질로 만든 것입니다."

"신성한, 과실이라면……."

"라임을 말하시는 겁니까?"

라임.

어느 선원들이 무인도에서 발견한 과실로, 그 과실은 현 시대에서 유일하게 배의 저주에 해결책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반대로 그것만이 해결책이기에 선원들에겐 더욱 절망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라임은 매우 귀하고, 그 주스조차도 귀족이나 선장들에게만 겨우 배급되는 거니까.

그런 걸 일개 선원들이 어떻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라임일 필요는 없죠. 라임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몰아내는 성질을 가진 물품으로부터 공통된 성분을 추출하면 되는 거니까요."

"공통된 성분을……?"

"하지만 그걸 어디에서 구하라는 거지?"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지금 제가 먹고 있는 이 안에도 라임과 같은 물질이 들어 있으니까요."

셰인이 책상에 있던 것을 들어 올려 그들에게 내세웠다.

방금 전까지 먹고 있던 식사.

빵의 사이에 끼워 넣은 치즈와, 물에 삶아 부드럽게 만든 육포. 그 사이에 샐러드를 끼워 넣어 만든 샌드위치.

그중 셰인이 가리킨 것은 식초에 절여 만든 양배추였다.

"양배추……?"

"네, 그렇습니다."

얼마 전부터 식탁에 질리도록 올라왔던, 그들이 이제껏 먹지 않고 버려댔던 양배추.

셰인이 말하는 것은, 그 양배추에 라임과 같은 신성한 물질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양배추를 매 끼니 때마다 잡수시면……."

"웃기지 마!!"

설득을 잘라내는 고함.

어느 선원이 셰인의 말을 듣다 격노를 토해낸 것이었다.

"고작 양배추 따위에 신성한 과일과 같은 물질이 들어 있을 리 없잖아!"

"맞아! 우릴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라임은 신성한 과일이며, 그건 성경에도 적혀 있는 내용이다.

특별한 토양과 지속적인 관리 등, 그런 재배과정이 라임이 가진 특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할 정도.

그런 귀중한 과일인 만큼, 장기 항해에서 먹는 게 허락이 되는 건 귀족이나 선장과 같은 고위책들 뿐이었다.

"선생이라길래 왔더니 완전 사기꾼이네 이거!"

"그냥 식비 좀 아끼려고 그런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가뜩이나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밥까지 그렇게 주는 게 말이야 빙구야!?"

싸구려 채소를 꼬박꼬박 먹는 걸로 저주를 해제한다니.

지식을 갖추지 않은 자라면 누구나 이상하다 여길 일이다.

여파에 비해 해결법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니, 더욱 그런 기세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풍조를 셰인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래, 이놈들은 멍청한 게 아니야.’

셰인이 날뛰는 환자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냥 나잇살 처먹고도 디지게 편식하는 거지. 에라이 철부지 새끼들.’

애초에 편식 같은 거 안 하고, 식탁에 올라오는 대로 꾸역꾸역 먹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터.

하지만 그게 못마땅하다고 억지로 먹였다간, 선원들의 불만이 크게 가증되어 ‘선상반란’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육지와 동떨어진 곳에서의 반란이라니. 그건 장기항해에선 결코 이뤄져선 안 될 일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그들이 자발적으로 양배추를 먹게 할 필요가 있었다.

"……크흠."

곧 셰인이 이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어버렸다.

유일교의 신자들에게 배부되는 성경책.

그것을 뒤로한 셰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선원들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여러분."

그 모습에 선원들의 몸이 경직된 때 셰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을 믿으십니까?"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

이제껏 마주해온 성직자들과 같은 인자함에, 선원들의 분노가 삽시간에 접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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