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76화 (76/255)

의무병의 환생 76화

해적.

본능에 충실한 괴수들과 달리, 직접적인 악의를 가지고 항해선에 접근해오는 바다의 주 위험군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위험은 어디까지나 무역선이나 규모가 작은 항해선에 한한 것.

엄연히 군함에 해당하는 영지군에 접근해오는 경우란 극히 드문 일이다.

-저 깃발은…… 수염이 흰 고래 해적단입니다.

그 존재를 확인한 파수가 통신석을 통해 선장에게 보고를 전했다.

드레이크 옆에 선 셰인이 함께 보고를 들으며 의문을 표했다.

"흰 수염고래 해적단?"

"흰 수염고래 해적단이 아니라, 수염이 흰 고래 해적단이라네."

"…무슨 차이입니까?"

"저쪽 선장이 흰 수염고래라고 말하면 화내거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망원경을 내어주는 드레이크.

그것을 통해 확인한 바, 검은색과 흰색으로 무늬가 칠해진 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달린 것은 흰수염이 나있는 고래가 그려진 거대한 돛.

본래 흰수염고래 자체가 ‘대왕고래’를 의미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해적기 자체만 보았을 때엔 ‘수염이 흰 고래’라고 부르는 편이 정답이란 것이다.

‘근데 그런 거 구분 짓는 데에 의미가 있긴 한가?’

수염이 희건 흰 수염이건 약탈자라는 건 변함이 없는 것을.

‘그건 그렇고 이름 잘못 부르면 화를 낸다는 걸 보면…… 아는 사이인 건가?’

수배서를 외우는 걸로는 개인사까진 알지 못할 텐데?

의문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답해줄 드레이크는 이미 통신석으로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자 모두 위치로. 지금부터 저 해적 놈들을 떨쳐낼 준비를 취해라!!"

"돛을 더 크게 펼쳐라!!"

"마력엔진을 가동해!"

지시를 받은 선원들이 돛을 펼쳐 바람을 모으고, 마법반에 속한 이들이 배의 하부에 배치된 엔진을 가동시킨다.

마력 엔진은 마나를 주입하여 힘을 발휘하는 장치.

고급 인력인 마법사들을 대동해야 하는 만큼 사용할 때마다 큰돈이 깨지지만, 그런 물건이라도 써야 할 때는 써야 하는 법이다.

-샤아아아아!!

엔진이 가동되며 보다 빠르게 나아가는 배.

그 속도는 피부에 바람이 닿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해적선과의 거리가 좀처럼 멀어지질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장기 항해를 염두에 두어 보급에 신경을 쓴 이 쪽과 달리, 상대는 그 보급을 약탈로 충당하는 해적선이었으니까.

-적들이 따라붙고 있어!

-슬슬 대포의 사정거리다! 포격반! 견제 사격 준비해!!

-퍼퍼펑!

측면의 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

그로부터 시작된 공방은 원정대가 적극적으로, 해적 쪽이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상대는 약탈을 목적으로 하기에 배를 침몰시켜선 안 되지만, 이쪽에게 해적이란 서둘러 치워야 할 방해물일 뿐이니까.

"이익! 하나도 안 맞잖아!"

"제대로 조준하고 쏴!"

"그게 쉬운 줄 아냐!?"

하지만 어째서인지 포격반의 사격도 제대로 맞질 않고 있다.

조준실력이 형편없어서인지, 아니면 해적들이 배를 이끄는 실력이 뛰어나서인지.

어느 쪽이건 이 양상이 지속되면 포탄만 낭비될 뿐이다.

"적들의 포격이 중지되었다."

"잠시 포격 중지!!"

소강상태로 접어든 포격전.

아직 떠났다곤 할 수 없지만, 앞으로 갈 길이 먼 마당에 귀중한 포탄을 무턱대고 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레이크가 통신으로 파수를 향해 물었다.

"적들의 동향은 어떻지?"

-그게…….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애매한 보고지만, 뭐가 됐건 속도를 올렸다는 건 배를 맞대는 걸 노린다는 것이다.

노리는 건 백병전.

약탈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다.

"적들이 뒤따라오기 전에 따돌린다. 전원, 전방의 암초무리로 배를 돌려라!"

"뱃머리를 돌려라!!"

향하는 곳은 망망대해에 자리한 바위군집.

그 중간의 비좁은 틈새로 가는 게 아니라면 빙 둘러가는 데에도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항해선은 그곳을 통과할 자신이 있는 상태. 해적들이 그곳을 우회해 나아간다면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그것을 노리고 암초지대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셰인의 관심은 해적선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얀색과 검은색……. 굳이 저런 도색을 한 이유가 뭐지?’

그저 흰 수염고래……. 아니, 수염이 흰 고래를 상징하기에 저런 줄무늬를 그린 것일까?

그런 이유일 가능성이 크지만, 마냥 그렇게 느끼고 넘어가기엔 기시감이 꽤나 크게 느껴졌다.

다름 아닌 200년 전 전쟁시대에 느꼈던 기시감이.

"돛 위의 파수에게 묻겠다. 해적들이 물러나는 게 보이는가?"

-어, 그게……. 잠깐만요. 보다보니까 눈이 엄청 아파서.

-에휴, 파수질로 꿀 빨면서 그거 하나 못 보고 있네.

-그럼 네가 보든가!

망을 보는 이들의 말다툼.

뱃사람들 사이에선 흔히 있는 마찰이지만, 옆에서 그 통신을 엿들은 셰인은 그 내용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눈이 아프다……?’

망원경으로 목표물을 주시해야 하니 눈의 피로감이 덮쳐올 터.

하물며 해적선은 줄무늬가 칠해지기까지 하니, 계속 지켜보면 눈의 피로가 커질 것이다.

만약 그 피로가 해적들이 의도한 것이라면?

‘이런 망할!’

수염이 희냐, 흰 수염이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뒤늦게 의도를 알아차린 셰인이 드레이크에게 소리쳤다.

"선장님! 당장 암초지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 녀석들 위장술을 펼치고 있어요! 실제로 노리는 건 따로 있습니다!"

"위장이라니, 바다 위에서 무슨 위장을……."

-쿠궁!!

거센 진동이 이는 배.

마치 암초라도 들이받은 듯 하지만, 이 구간은 항해선을 통해 몇 번이고 지나온 전적이 있는 곳이다.

풍향과 파도에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조타를 잡은 이들이 실수할 리 없을 터.

그런 확신이 있음에도 배가 도중에 멈추었다는 건, 그 외의 외부적 요인이 이 배를 덮쳐왔단 것이다.

"…그렇군, 오히려 이목을 집중시키는 위장인가."

"네, 그 말대로……."

셰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해적선의 줄무늬를 응시했다.

"200년 전에 제국이 상대했던 고대민족들이 썼던 위장술이죠."

대즐 위장(현혹 위장).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 오히려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도 ‘착시를 유도해’ 교란을 주는 위장술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게 주목적이니 화려한 무늬나 색 조합을 사용.

그렇게 관심이 사로잡힌 이들은 관찰 중에 정신력이 크게 소요되어 잦은 오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나라라고 불렸던 곳에서 쓰였던 전법이지. 저격수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별동대를 투입하기엔 저만한 작전이 없었으니까.’

확실히 상식 밖의 의표를 찌르는 발상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당시 제국군은 정찰 없이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는 전략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대즐 위장은 소규모 핵심전력을 현혹하기 위한 전략.

당연히 대규모로 몰려드는 군대에겐 효율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다 위라면 다르다.’

함대 단위로 오는 게 아니라면 관찰 대상은 배 한 두 개 정도.

그만큼 집중하기도 쉽지만, 바다 특유의 파도에 의해 줄무늬의 움직임도 자연스레 흔들리게 된다.

포격반의 조준이 빗나가는 것도 유일한 관찰수단이 육안뿐이기 때문.

당연히 착시효과가 상시로 일어나니, 관찰하는 동안 큰 피로감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장님! 배가 움직이질 못하고 있습니다!"

"암초사이엔 끼지 않았을 텐데……."

"설마 해저에서부터 마물이라도 습격해 온 건가?"

"아닙니다! 바다 밑에서 이상한 기구가 보이고 있어요!"

항해선의 밑, 수면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

파도를 통해 희미하게 드러난 모습은 마치 오크통처럼 둥그런 몸체에, 쇠로 이루어진 장치가 가득 달린 기이한 기계장치였다.

그런 장치들이 사이사이에 두터운 사슬을 이어, 배의 움직임을 봉하고 있었다.

대즐 위장과 달리 과거의 전쟁에선 본 적 없던 물건이다.

"저건 또 뭐야……?"

"잠수정."

의문에 답한 건 드레이크.

그는 배 밑에 자리한 것을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벽외에 해안지대에 상주하는 기술자들이 만든 물건이지. 저런 건 본 적 없나?"

"……이제까지 활동한 건 육지 뿐이었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하지만 공학이란 현 시대에도 대중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

벽외지역엔 기술의 편린이 퍼져있긴 하지만, 그걸 크게 발전시키기엔 사회가 구축된 장소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걸 자각한 건 드레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 만들기도 어려운데다 비용도 드는 걸, 어떻게 해적녀석들이 배 하나를 구속할 정도로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드레이크의 말대로 위장은 몰라도, 잠수정을 이용한 포박은 일개 해적단이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투자다.

거기에 더해 항로를 예측하고 매복까지 할 정도.

어쩌면 저 해적들의 금전과 작전을 지원해준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지금 고려할 바가 아닌가.’

배후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알아도 된다.

지금은 당면한 위기에 대처해야 할 상황.

이후 드레이크가 자리를 벗어나며 통신석을 들어올렸다.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다시 포격준비를 할까요?

"아니, 이 정도로 준비를 했다면 근거리 포격에 대한 대처도 되어 있겠지. 저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자고."

해적들의 목적은 약탈.

배를 침몰시키지 않는 이상, 노리고자 하는 것은 근거리에서의 전투뿐이다.

"무기고를 개방해!!"

"저들에게 블레이즈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무장을 하며 갑판에 서는 기사와 용병, 그리고 선원들.

마법사들이 후위에서 마력을 충전하는 때, 드레이크는 항해실에 배치된 통신석으로 선 내 전체의 보고를 전해 들었다.

"아래에 있는 잠수정을 떨쳐낼 방법은 없나?"

-사슬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녀석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저항을 하려들고 있습니다.

-워낙 단단해서 총알 정도는 튕겨내고 있어요. 배 밑에 있기에 폭약을 쓰면 배에 구멍이 날 위험이 있습니다.

"해적 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군."

그래, 해적 주제에 군함을 상대로 함정을 팠을 정도.

어수룩한 마음으로 시비를 건 건 아닐 테니, 이후 백병전 역시 상당한 준비를 거치고 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적들이 가까워집니다!

-마법으로 요격할까요? 화염마법을 이용하면 도달하기 전에 침몰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마법반은 실드의 전개에 힘을 쓰도록 해라."

마법을 쓴다면 해적선이 오기 전에 불태워버릴 수 있겠지만, 그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목적은 해적선의 침몰이 아닌 항해선의 수비.

배에 가해지는 피해는 조금이라도 최소화시켜야 한다.

-실드, 전개!!

선언과 함께 배의 측면을 막는 물리력의 방벽이 생성되었다.

빛마저 일그러트리는 강대한 물리력의 파도.

그 방벽이 쳐지기 무섭게 해적선에서 쏘아진 불덩이가 장벽에 맞닿고,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불길한 녹빛이 띠는 불꽃.

제국의 마법체재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공격이다.

"……야만족들인가."

그래, 보통 귀족출신인 제국의 마법사들이 해적에게 합류할 리는 없을 테니까.

마법을 기용한다면 야만족들을 대동했을 터.

그리고 그건 이후 백병전에 참전하는 것도 야만족일 가능성이 크단 것이다.

-쿵!

이윽고 서로의 배가 충돌하고, 그 사이에 판자를 세운 해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항해선으로 뛰어들었다.

"약탈의 시간이다!!"

검은 피부에 야만족 특유의 거구.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까지.

누가 보더라도 제국민보다 훨씬 강해보이는 몸이나, 제국군에겐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무장과 지휘체계가 존재한다.

"전위대! 전방을 사수해라!!"

"모두 사격 개시!"

갑판에서 전위가 앞을 막는 가운데, 후열에서 쏘아지는 총탄들이 해적들의 몸에 처박혔다.

발달된 육체조차도 맨 몸이라면 총알은 치명적.

주술사들을 제외하면 마나에 대한 조예도 깊지 않다.

총알 몇 발은 버티더라도, 심장이나 머리 등의 급소에 맞은 녀석들은 맥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맛이 어떠냐! 이 해적놈들아!"

"아직 방심하지 마! 비집고 들어오는 녀석들이 있다!"

해적들의 숫자는 수백 단위.

후열에선 방벽을 향해 지속적으로 마법을 쏴대고 있으며, 마법반은 그들에게 신경을 기울여야만 한다.

커틀러스와 산탄총을 쥐며 다가오는 거구의 야만족들.

그들을 마법의 지원 없이, 직접 몸으로 부닥치며 상대해야 한단 것이다.

"크하악! 내, 내 팔!!"

"부상자는 빠져!"

"어서 사제들에게 데려가!"

손이 남는 선원들이 부상자들을 끌어 선실로 나아간다.

신성력으로 빠르게 회복한다면 다시 전장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외도에 들어선 범죄자들은 신의 자비에 기댈 수가 없다.

무장 상태도 이 쪽이 우위.

피해가 아주 없진 않겠지만, 난전상태로 유도하지 않고 장기전에 돌입한다면 필시 저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확신을 가진 순간, 돛대 위의 파수가 갑판에 선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위쪽을 주의해라! 해적들이 무언가를 추락시키고 있다!!"

일제히 하늘로 겨누어지는 소총수들의 총구.

보고대로 무언가가 갑판을 향해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날개와 같은 것을 퍼덕이는 장치를 등에 매고 있는 사람이.

"해적의 별동대인가!?"

"강습부대다! 저 녀석들이 위에서부터 노리는 거다!"

확인하기 무섭게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소총수들.

그것을 눈치 챈 추락자가 다급히 경악을 내질렀다.

"자, 잠깐! 쏘지 마! 난……."

-타타탕!

비명을 무시하며 가하는 사격에 피를 흘리며 추락하는 남자.

이미 숨은 끊어졌지만, 전위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야만족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이 사람, 야만족이 아니라 제국민이야."

"뭐, 뭐야 그럼, 제국 출신인데 해적질에 가담한 거야?"

"그게 아니라 다른 데에서 납치한 민간인……. 이런 씨발!"

한 선원이 시체를 보다 눈을 번뜩였다.

그의 몸에 매어져 있는 무언가로부터 길게 돋아난 선.

그것이 불씨에 의해 타들어가며 몸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폭탄이다! 모두 엎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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