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88화
뒤이은 정적이 파도소리에 삼켜져간다.
소금기가 어린 바다내음이 바람에 실려와 피부를 쓰다듬고, 그 촉촉한 감촉마저 주변의 물살에 흘러가듯 사라진다.
그 고요함 속에서 셰인은 베르디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내가 삶을 포기한 이유를 들려주겠다.'
4년 전부터 줄곧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그걸 알아야만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다 여겼으니까.
'하지만 왜 이제 와서…?'
4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그 이유가 자신을 의존하는 거였으면 하지만…….
'…아마도 아니겠지.'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그녀의 사정을 아는 자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다들 답을 거부할 리는 없었을 테니까.
'셰인. 의사도 신자와 같은 인간이겠지?'
오직 한 사람.
교단에 속하면서도 신뢰관계를 쌓은 레온만이, 이제까지의 사이를 생각하며 경고를 내어줄 뿐.
그 경고마저 당시엔 굉장히 뜬금없다 느껴졌었다.
베르디의 사정에 대해 물어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런 철학적인 질문이 돌아왔으니까.
'…설마 신성력도 없는 놈은 인간이 아니다, 그런 소릴 하려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비꼬듯 이어진 말장난도 레온은 진지하게 되받아쳤다.
이어지는 말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인간으로써 네가 베르디를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
'……난 네가 베르디를 경멸하는 걸 원치 않는다.'
경멸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으면 그런 말이 나오는 걸까?
"왜……."
막상 그걸 알 때가 찾아오니 조금 겁이 들었다.
"이제 와서 말해줄 생각이 든 거야?"
그럼에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줄곧 방관해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고, 그가 이 이단의 땅에 있을 시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 불안한 심리를 읽지 못한 듯, 베르디는 여전히 바다를 응시한 채 속삭일 뿐이었다.
"얼마 전에, 셰인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에겐, 들려줄 필요가 있다고."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아니, 그건 이후 설명을 듣게 되면 알 것이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니, 베르디가 조용히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그 위에 놓인.
모든 구슬의 색이 다른 로자리오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베르디 하트리스. 그게 제 이름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의 서문을 장식한 건 본명에 대한 것이었다.
하트리스…….
만난 지 4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성이다.
레온과 같은 신자 가문을 제외하곤, 교단에 들어선 자들은 교단에 모든 것을 바치기에 제 성을 버릴 것이 강제되니까.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저는 한 농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농장에서……. 제 오빠의 뒤를 이어 태어나게 되었죠."
"…오빠가 있었구나."
"저보다 4살 정도 많은 분이었어요. 그리고 저를 많이 괴롭히셨죠."
그래, 그 나잇대 아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한창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부모의 관심이 막내에게 쏠리게 되면 질투심을 자제하지 못할 테니까.
"그때마다 저는 울었고, 어머니께선 저를 끌어안고, 오빠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쳤죠. 농장의 일을 거드시는 분들께선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고는 했었어요."
당시엔 억울하고 슬펐던 기억.
그럼에도 베르디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그 또한 다정한 추억이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빠의 괴롭힘도 끊어졌어요. 그런 일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 훈훈히 끝났을 이야기라면 애초에 교단에 신세를 질 일도 없었겠지.
"그런 일이라는 건……."
"……성경에는 이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지닌 4명의 기사가 세계를 방황한다고 적혀있죠. 셰인도 알고 계시죠?"
"어, 뭐……. 알고 있지."
흔히 묵시록의 4기사라고 불리는 존재다.
역병을 퍼트리는 병마의 백기사.
분쟁을 강제하는 전쟁의 적기사.
대지를 죽여 작물을 앗아가는 기근의 흑기사.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관장하는 죽음의 청기사.
그 모든 것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재해'를 표방한 것으로, 신조차 그들을 몰아내려면 세계의 존속을 포기해야 한다 평해질 정도다.
그러니 인류는 그들과 공존하며 살아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폭리를 취한다 할지라도, 신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그들을 한낱 인간이 대항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
"그 중 병마의 기사가 저희 농장에 도래했다고……. 어느 날 교단에서 찾아오신 분들께서 말씀하셨었어요."
병마.
말 그대로 악마의 소행이라 여겨지는 병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신성력이라는 만능 치유의 힘이 실존하는 시대, 그런 이름이 붙을 만한 종류의 병은 하나뿐이다.
'돌림병.'
그 또한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문제는 신성력에 의한 치유는 '체내의 바이러스나 세균을 배제하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 병원균에 적응할 수 있는 '항체'를 생성하며 적응할 수 없으니, 병이 치유된 사람도 다시 그 병에 걸릴 확률이 비약적으로 늘게 된다.
신성력에 호전된 사람들에게 다시 병이 발발한다는 것.
그렇게 돌고 도는 병이 전체로 퍼져, 이내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당시에 오빠와 저는 마침 농장에서 벗어나 있었죠. 저녁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가니 성직자분들께서 그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만류하셨어요. 그리고……."
잠시 말꼬리를 흐리는 베르디.
하지만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게 아무리 충격적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얼마 안 가 교단에선 그 농장을 전부 불태워버렸어요. 그 화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도 함께 겸하고 있었죠."
"……."
"……너무하다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과한 처사라도 어쩔 순 없다.
아이헨발트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병이 퍼진 장소는 불태우는 걸로 해결해왔으니까.
병균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오직 그것만이 해결책으로써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거야?"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짧게 대답한 베르디가, 제 손에 쥐어진 로자리오를 차차 쓰다듬어갔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 행위를 매개로 삼아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듯.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죠."
기도를 드리는 의미를 몰라도 빵을 주니까.
봉사를 하는 이유를 몰라도, 그 날에 주는 스튜에 고기 한 점이 더 늘어나니…….
"하루는 한 아이가 스프의 고기를 한 점 먹겠다 빼앗았다가, 다음날엔 고기향만 겨우 남은 오트밀을 먹으며 울음을 터트렸죠. 그런 아이가 안쓰럽게 보여 고기를 한 점 덜어주니, 미안하다며 제가 할 일을 대신 해주기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차차 이어지는 회고는, 그 나잇대 아이들이 흔하게 할 만한 고민과 행동이 묻어나 있었다.
정말로 사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
그런 소소한 추억조차 그녀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그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불안 역시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가진 미련이 커질수록.
이후 벌어진 일의 충격도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그리고 그날에 수행이 시작되었죠."
그런 술렁임이 느껴지는 가운데, 이야기는 어느 샌가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다.
'때가 왔다.'
어째서 이 소녀가 마음을 닫았고, 어째서 자학적인 심정으로 제 목숨을 하잘것없이 여겼는지를 알 때가.
"제가 속했던……. 크리스탈 수도원에선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의식이 있었어요. 수행원들이 하룻동안 암실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죠."
"암실에서……? 그냥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곳에서 수행원들만이 모여 기도를 드리는 거죠. 정식 사제분들은 암실의 밖에서 아이들이 버텨낼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고요."
종교적 단식.
정신수양이나 신앙의 증명 등의 이유로, 시간을 정해두고 섭취를 금하는 행위다.
블레이즈와 같은 곳에도 신앙의 개화를 위해 수행원들이 찾아오는 시대.
수도원에 따라 그런 고된 활동을 연례행사로 삼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모아둔 후에, 사제들께선 문을 앞두고 난 뒤 '그럼, 하루 뒤에 봐요'라고 말씀하시며 문을 닫으셨죠."
의사로썬 추천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성장이 바쁜 아이들을, 하루뿐이긴 해도 굶기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 당장 듣기에는 그 정도의 문제라고…….
"그리고 문이 열린 건 한 달 뒤였어요."
이어지는 말을 듣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뭐?"
일순간.
셰인은 베르디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파도소리가 너무 심해서인가.
저 하늘에 차차 먹구름이 드리워져 주변이 어두워진 데에 시선이 팔려서?
"방금, 뭐라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금식제가 하루가 아닌 한 달이 이어졌다고 했어요. 문이 열리지 않은 곳에서 1달간."
"아니……."
"셰인."
베르디가 셰인을 불렀다.
아직 제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에게.
"사람이 1달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한가요?"
그렇게 평소처럼 무뚝뚝히 물어왔지만, 평소와 달리 셰인은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기에?
확실히 그렇긴 하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건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
하지만 그 당시 금식제에 참여했던 건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신성력을 이용해 영양실조에 의한 붕괴를 늦출 수도 없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1달 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생존하는 게 가능한가?'
만에 하나라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뭔가 있었어?"
그러니 무언가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리라.
이를테면 숨겨진 식량이나, 혹은 수맥…….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추측마저 베르디는 단호히 부정해버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건 아이들뿐이었어요."
그렇게 담담하게, 소녀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긴 이유를,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였다.
그 순간 몸이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의해…….
멀미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바람이 조금 거세진 듯 했다.
어느덧 밀려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을 보니 한바탕 쏟아질 듯하다.
그 전조로 배의 흔들림이 거세진다면……. 그래, 지금 느끼는 구역질은 그렇게 생긴 걸지도 모르지.
그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손이 입으로 향해졌지만…….
"아무리 입구를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그런다고 베르디의 말문이 막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가선 모두가 사제분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힘을 잃고 쓰러져갔어요."
하늘이 번쩍거리고.
쿠르릉대는 소리가 뒤늦게 그들이 있는 배까지 전해져왔다.
그 전율에 심장이 덜컥거리는 때, 베르디가 셰인에게 차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덧 한 아이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모두를 설득했어요."
'이건 더 이상 우리의 친구가 아니야.'
"……라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온이 말했던 대로, 이건 의사나 성직자 간에 운운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릇되었다 여길……. 그런 부류의 이야기.
"누군가가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왜 이 지경이 되었는데, 신은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 거냐고."
교단에 거두어진 아이가, 신앙을 키우기 위해 참여한 시련에서 각오하지 않은 괴로움을 겪었다.
그건 개화되려던 신앙을 갈취하는 일.
더욱 나아가 그들을 향한 증오와 불신마저 키우는 일이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죠. 이런 상황이라도……."
"너는."
차차 구체성을 띠어가는…….
그 무덤덤한 참극을 듣던 남자가,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질문을 건네었다.
"배르디 넌……. 거기서 뭘 하고 있었어?"
그 물음은 희망을 잡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무지러져가는 정신에서 튀어나온 말실수인가.
비극을 겪은 이에게 그 현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직접 말하라 하다니…….
"……기도를."
그것이 불쾌히 여겨질 법 합에도, 베르디는 그저 눈을 감으며 제 양 손을 맞댈 뿐이었다.
아주 익숙한 자세다.
"기도를, 드렸어요."
그 자세만은 신성력을 발하는 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의 소녀 역시 그런 자세를 취했다면…….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때는 그냥……. 무서웠으니까요. 모든 게 다 끝나길 기다리며 손을 맞잡고 기도를 드렸어요."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가 아닌가.
애초에 10살의 아이가,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 빛을 품을 수 있을 리 없거늘…….
"그러더니 몸이 따스해지는 것이 느껴졌죠. 눈을 감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턴 비명도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죠."
그 순간 소녀의 몸에서 빛이 일었다.
그건 신성력인가?
"그때의 그건 주님의 보은이었을까요?"
아니, 그저 번개였다.
그마저도 머지않아 소녀의 배후에서 사라지고, 그 뒤를 잇듯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란조차 시간이 지나니 거짓말처럼 사라져갔다.
이윽고 찾아온 공허 속에서, 소녀는 제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그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