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89화 (89/255)

의무병의 환생 89화

"……분명 저의 착각이었겠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며 빵과 스프를 얻어먹었을 뿐인 아이가, 어떻게 그런 곳에서 신성력을 각성하겠어요?"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여전히 공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도 무서워서 기다리기만 했어요. 다시 눈을 떴을 때에 모든 게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런 식으로 소녀는 제 감정을 죽여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 순간을 고통과 비명 속에서 살아야 했을 테니까.

베르디가 그러한 얼굴로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생각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홀로 남아 있는 오빠를 보았죠."

유일한 가족.

함께 수도원에 거두어지고, 당시 암실에도 함께 들어갔던 가족…….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요. 기도를 드리고, 다시 눈을 떠보니……. 사방엔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했어요. 그런 곳에서 움직이는 건 오직 오빠뿐이었죠. 그리고 기도를 멈추자마자, 오빠는 저에게 손을 뻗어왔어요."

머릿속에 자연스레 광경이 그려진다.

시체밭의 중심에 선 사람이 살을 씹으며 마주한 광경을.

그것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나질 않네요. 정신이 들었을 때 사제분들께서 저를 거두어들이셨다는 것만 알 뿐이었죠."

그런 충격에 의해 기억이 날아가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어린아이라면 자기보호를 위해 기억을 삭제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기억을 지운다 고, 자신이 있던 장소에 남은 흔적까지 지우는 게 가능할까?

결국엔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살아나오기 위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기억을 개인이 부정해도, 그 현장을 본 이들의 추측마저 없던 것으로 취급할 순 없을 테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당시엔 수도원이 반란군들에게 점거 당했었다고 해요. 교단에게 앙금을 가졌던 배교자가 주도하던……."

대체 어떤 원한으로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악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역질나는 사연 팔이 따위, 그런 건 지난 4년 간 이 영지에 있는 동안에도 질리도록 실감했던 것이니까.

"그 후에 사제분들에게 부탁해서 그 암실에 데려가 달라고 했죠. 아이들의 몸엔, 그 어디에도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죠."

그에 치가 떨릴 법 함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제 손에 쥔, 모든 구슬의 색이 제각각인 로자리오를 쓰다듬으면서.

"특히나 오빠의 몸이 아주 흉하게 파헤쳐져 있다고 했었어요. 기억을 되새겨본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건 저와 오빠뿐이었으니까……. 그건 그만큼 제 저항이 심했다는 의미겠죠."

보통의 성직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로자리오와는 판이하게 다른 물건.

그 물품이야말로 소녀가 지닌 기억의 매개체였다.

과거 희생자들이 착용하던 것을 분리하고, 그걸 하나하나 꿰어 만든 그 장신구야말로.

그렇게 소녀는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채,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계속해서 떠올리길 반복한 것이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계속.

"셰인."

-투두둑.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그 숫자가 차차 늘어가며 두 사람의 몸을 적셔가는 가운데, 베르디가 셰인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전……. 살아도 되는 건가요?"

교단이 내려주지 못한 답을 이단자에게 갈구하고자 한다.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닿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으니까.

"기억이 없다 해도, 제 손에 피가 묻었던 일이 없던 게 되진 않을 거예요."

그렇기에 조용히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아무리 이 빗물로 갈증을 채울 수 있어도, 제 입은 여전히 누군가의 피 맛을 알고 있을 테고요."

"아니야. 그건……."

그마저도 버티지 못해 입을 열었지만, 결국에는 되는 대로 내뱉을 뿐인 부정이었다.

그것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소녀는 침묵했다.

그렇게 뒷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올 리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정적이 길어지고, 고개마저 숙여지니…….

"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해요."

그것을 지켜보던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일에 처한 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타의에 의해 저지른 것을 어찌 죄라고 말할까.

하지만 그런 윤리관도 결국 개인에 한한 것.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 존재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한들, 거기에 약간의 무의식이라도…….

"그래도 다 보여요. 내심, 제가 또 무언가를 저지를까 두려워 한다는 걸."

단 한 순간이라도 이 소녀의 이야기에 혐오를 느꼈다면.

그 누구도 이 소녀가 죄인이 아니라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주장에 힘을 실어 넣어, 그 당시의 의지만은 자신의 것이었다 주장할지도 모른다.

악의가 느껴지고, 상황에 밀렸다 하더라도, 결국 순교를 택하지 않은 본인의 잘못이라고.

"한 번 깨끗해진 존재는 그것을 갈망하겠지만, 전 빛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죄를 범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건 다름 아닌 피해자 본인이었다.

그 때의 일을 몇 번이고 되새겨온 소녀가, 이윽고 제 멱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그래요, 전…. 셰인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차갑고 세찬 빗속에서.

혼이 담긴 그릇의 박동을 느끼고, 그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며.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더럽혀져 있었던 거예요."

입가에 그려진 자조를 더욱 선명히 바꿔간다.

억지로 감정을 부추겨 만들어낸 추하게 우그러진…….

그마저도 뒤덮는 빗물이 머리를 적시고, 눈시울을 가득 채우다, 이내 넘쳐흘러 다시 아래로 흘러내렸다.

"……늘, 생각해 왔어요. 셰인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 순간 셰인은 깨달았다.

왜 이 아이가 이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는지.

"그야,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두고도 교단 사람들에게조차도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건 동경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금기를 저지름에도, 모두가 구원을 부르짖는 힘이 없어도 누군가를 구제해온 자를 향한 동경.

그 지식을 보편화시켜 차차 세상을 바꿔가는 현장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마저 포용하는 그 아량도, 세상에 배척을 받았던 소녀의 재능을 개화시켰던 그 영광의 현장도…….

그 모든 것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겨온 자에겐, 너무나도 눈부시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절 경멸하시겠죠. 그 경멸마저 당신은 잘못되었다 말하겠지만……. 그래선 안 돼요. 당신은 저를 동정해선 안 돼요."

그러니 그 빛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길 바란다.

"저 같은 죄인마저 구제할 수 있다 주장한다면, 이 세상에 죄라고 부를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될 테니까."

그 빛이 자신을 비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 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그렇게 소녀는 구원을 거부하며, 제 생에 빛을 거머쥐지 않을 것을 소망하였다.

"…저는, 당신 같은 성자가 구해선 안 될 사람이니까."

그런 배교의 선언 또한 순교의 한 형태라는 걸, 어느 날 들었던 이단자를 위한 찬송가로부터 깨달은 상태였으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아이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가.

정작 소녀가 성자라 여기는 자에겐 와 닿지 못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동정하면서, 속으로는 경멸의 감정을 품고 있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제 옆에 있는 인간이,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처했다 한들 그런 짓을 저질렀단 정황이 남아있는데.

거기에 잠깐이라도 구역질을 느꼈던 자신이 성자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러니 지금의 부정은 결코 자신이 선인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한 것이 머릿속에 소용돌이 치고 있기 때문일 뿐.

'정말로 이 아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적어도 자신이 봐왔던 베르디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한 달 간 암실에 가두어졌다는 극한의 상황이 있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적어도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근거가 아닌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근거 없는 믿음만이 이 소녀를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런 거라도 이유로 삼아야만 했다.

"베르디, 난……."

그런 미련이 입을 열기를 부추긴 그 순간.

-비상!! 비상!! 당장 전투원들은 무기를 들고 갑판으로 집합해라!!

한 밤의 호우가 폭풍으로 이어지는 순간.

선내 전체에 떠들썩한 알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놀라는데? 술 안 줬다고 삐진 건……."

-닥치고 빨리 들어가!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고!!

연회를 치러지는 중에 난입한 다급한 목소리.

경보를 울리는 역임에도, 통상적인 절차나 격식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함이었다.

금세 심각성을 눈치 챈 선원들이 정신을 차리며 무기를 들거나, 선실 내로 들어가 위험에 대응할 준비를 취했다.

그런 위기감을 느낀 건 셰인 역시 마찬가지.

"검은 안개라면……?"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다.

벽외의 주둔지로 향한 정찰선이 전서구를 통해 보냈던 편지의 내용으로부터.

[검은 안개를 조심해.]

피칠갑이 된 편지 한 장.

그 위험을 암시하는 존재가, 지평선의 너머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차차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배를 돌려!! 당장 저 안개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선장인 드레이크마저 침착함을 내버린 채 통신석에 고함을 지르는 상황.

그로부터 심각함을 인지한 선원들이 다급히 각자의 위치로 향하였다.

"당장 배를 출발시켜야 한다!"

"폭풍 때문에 힘들 것 같은데……."

"그런 건 어떻게든 해야지! 돛을 내리고 닻을 올려라!!"

"반대야 병신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그럼 뭐가 중요한데!!"

"마력엔진 출력 올릴 준비 해! 마법반들 어서 엔진실로 집합!!"

배를 휘두르는 폭풍에 급증해가는 혼란.

소란이 가득한 현장 속에서, 셰인과 함께 바다를 앞둔 베르디가 어느 한 곳으로 손가락을 향했다.

"셰인, 저 쪽에……."

"…나도 보고 있어."

파수와 선장이 말한 대로 전방에 검은 안개가 퍼지고 있다.

다만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 현상이, 벌써 시야의 일면을 가득 채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

심각성을 눈치 챈 셰인이 베르디를 잡아 끈 후 선실의 입구로 나아갔다.

"넌 안에 들어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최대한 안전한 곳에 숨어 있고."

"셰인은 어쩌게……."

-쾅!

문을 닫아버린 셰인이 다급히 바다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밀려드는 검은 안개와, 그 속에서부터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를.

'저건, 배?'

그래, 분명 배였다.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크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데다 돛 역시도 완전히 찢어진 배.

바다 밑으로 수장되어야 할 난파선을 억지로 띄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나 당장 침몰해도 이상하지 않은 배이거늘.

어떻게 저런 상태의 배가 바다 위에 떠있을 수 있는 것일까?

"저거, 유령선 아니야?"

"말도 안 돼. 유령선이라니, 그런 건 미신……."

"유령선이건 뭐건 위험한 건 확실하잖아!"

-카르르, 카악.

당황하는 선원들의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마음을 자극하는 소리.

셰인을 포함한 선원들이 배 밑으로 시선을 향했다.

"저건, 뭐지?"

바다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기어오르고 있다.

배의 표면을 손으로 잡고 기어오르는 건 사지가 달린 인간…….

아니, 시체다.

움직이는 시체가 배의 표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언데드다! 언데드가 배에 달라붙어서 올라오고 있다!"

언데드.

이미 생명반응이 정지했음에도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이는 인지를 초월한 존재.

"뭐야, 언데드가 왜 여기서 나와!?"

"설마 유령선에서부터 헤엄쳐온 것인가?"

시체가 헤엄치다니.

말도 안 된다 생각되겠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벽외지역의 심층부에 인접한 해안지대다. 그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크르륵, 캬아악!

그것을 직시시키듯, 바다를 헤엄쳐온 언데드들이 항해선의 외벽을 오르며 갑판을 향해 다가왔다.

비정상적으로 검은 피부. 몸 곳곳에서 퍼져나오는 검은 아우라.

그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붉은 안광은 선원들에게 향해지고 있었다.

살과 피를 노리는 식탐에 젖은 눈빛을.

"뭐가 됐건 전부 떨쳐내! 절대로 배에 오르게 하지 마!"

"사격 개시!!"

타앙, 타탕!

비가 내리는 중에도 총성은 거침없이 울려 퍼졌다.

강체술을 쓸 수 없다면 영웅이라도 죽일 수 있는 공격.

하지만 상대는 애초에 몸 자체가 죽어있는 괴물들이다.

통각은 마비된데다, 사고와 감정을 느낄 이성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유일한 약점인 머리를 부수지 않는 한, 그들이 거리를 좁혀오는 것을 억제할 순 없다는 것이다.

"으아악! 내 팔!!"

그 질긴 생명력을 통해 올라선 언데드 한 마리가 배를 기어올라 선원을 물어뜯었다.

뒤늦게 그를 향해 달려간 셰인이 붕대를 휘둘러 언데드의 목을 잘라내었다.

갑판을 구르는 머리통.

그 머리의 턱이 제멋대로 딱딱대었으나, 그 흉측한 광경에 신경을 쓸 겨를 따윈 없었다.

"괜찮아요!?"

"으, 으윽……."

물린 선원이 신음하며 상처부위를 내세웠다.

그다지 깊게 파헤쳐져 있진 않지만, 어째서인지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독인가? 아니면 병균?

'아니, 전염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돌림병.

정말로 저 언데드들이 그걸 몰고 왔다면 이 원정은 그걸로 끝장날 수도 있다.

아무리 군대가 얼마나 강하건 얼마나 경험이 많건,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작은 세계의 존재들에게 대응할 방도는 이 시대엔 존재하지 않으니까.

"선장님! 파도 때문에 배 밑창에 균열이 가해졌습니다!"

"균열로부터 언데드들이 밀려옵니다!"

"이런 젠장!!"

폭풍우와 함께 나타난 유령선.

그로부터 튀어나온 언데드들이 배 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어오고 있었다.

그 위험은 해적들이나 크라켄과는 비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적어도 셰인만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난 외과전공인데 왜 이런 일들만 나오는 거야 건지……."

바다 위에서 전염병의 숙주와 싸우라니.

외과전공의 무투가인 그에겐 최악의 상황이지 않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