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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11화 (111/255)

의무병의 환생 111화

참극이 있었다.

뒤늦게 그 참극을 마주한 신자들은, 모든 게 정리된 사태의 잔해를 보는 것만으로 신앙을 시험받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두려워 침묵으로만 일관하니, 누군가는 그 순간을 빌어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옳았음을 모두에게 증명해내었다.

이제껏 자신을 포함한 교단의 사람들이 극구 부정했던 학문의 순수함과 완전성을 보여주며.

'난…….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노을이 진 하늘.

바닷가에 위치한 절벽에서 바다를 응시하는 메어리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빛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 섬에 있는 내내 신앙이 자리할 곳엔 불온한 기운이 스며들었으니.

완벽하리라 여겼던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그 힘에 의존하고자 하는 소녀의 불신을 매 순간 가증시키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야."

그 순간 배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볼 부근에서 한기가 덮쳐오기 시작했다.

"으히얏!?"

볼을 움켜쥐는 메어리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에 들어온 건 유리병을 손에 쥔 금발의 청년.

메어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무, 뭐하는 거야!"

"뭐하긴,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부르긴 언제 불렀다고…."

"한참 불렀어, 이 녀석아."

쯧, 혀를 차는 셰인이 손에 쥔 유리잔을 메어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됐으니까 이거나 마셔."

"마시라니, 뭘……."

뜬금없이 튀어나와 놀라게 만들고 뭘 마시라 하는 걸까?

의문을 느낀 메어리가 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았다.

잔에 담겨있는 누런 액체. 표면에는 탄산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맥주?"

"교리로 금지된 거 뻔히 아는데 술을 주겠냐?"

식량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재료를 받고 만든 탄산음료일 뿐이다.

메어리가 그 정체를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안 타긴. 이거 콜라라는 거잖아. 교단의 사람에게 약을 권하다니……."

움찔.

컵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셰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시려던 잔마저 바닥에 내려두며 눈을 감싸는 모습.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을 보며 메어리가 당혹을 터트렸다.

"무, 뭐야. 너 왜 그래?"

"아니, 그냥 감격스러워서."

콜라는 약…….

정확히는 약이랑 같이 먹으라고 만들었던 소화 보조제 겸 자양강장제다.

하지만 정작 그 취급은 영지군 내에선 몰래 빼돌리고 돌려먹는 간식거리.

심지어 누군가는 박하와 카카오를 섞은 끔찍한 폐기물에 타서 먹기까지 한다.

그런 마당에 이 아이만은 약이라 불러주는데, 어찌 감격을 느끼지 않겠는가?

"미안한데 이건 콜라가 아니라 판타라고 하는 거야."

물론 그런 감격과는 별개로, 지금 그녀에게 음료를 내어준 건 순전히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판타?"

"그냥 탄산수에 과즙 좀 탄 거야. 알콜도 안 탔으니까 아무리 마셔도 취할 일도 없고……. 안심하고 마셔도 돼."

"…취하기는. 누가 보면 내가 술주정이라도 부린 줄 알겠네."

'주정이 아니라 땡깡을 쳤지.'

-쏴아아.

절벽에 나란히 앉아 석양을 감상하고 있자니 잔잔한 파도음이 들려왔다.

황혼을 비추는 수면이 파도를 타고 반사광을 일으키는 광경.

한편으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그 풍경을 응시하는 메어리의 눈엔 쓸쓸함만이 감돌뿐이었다.

병에 든 판타가 반쯤 비워졌을 무렵 셰인이 물었다.

"……아직도 신성력 회복될 기미는 안 보여?"

이 섬에 온 후 성직자들 중 상당수가 신앙을 잃었다.

전염병이 있었다곤 하나, 이 섬에서 벌어진 비극은 그들이 존중하는 '고결한 신자들'이 주도한 결과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런 신앙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구제를 이단의 지식으로 이루어내었단 것이다.

그 결과를 인정한다는 건 사실상 '신성력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나, 성직자 그만둘까봐."

그 깨달음을 간과하지 못한 소녀는, 이 순간 줄곧 고수해왔던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셰인이 표정을 구기며 메어리를 쏘아붙였다.

"신성력 좀 못 다루게 됐다고 거기까지 가면 안 되지. 다른 성직자들도 슬슬 신성력 회복하고 있는……."

"애초에 내가 성직자가 된 것도 가문에서 쫓겨나서 그런 거였어."

얄팍한 위로로 어찌 될 거였다면 애초에 신성력을 잃지 않았으리라.

그건 당장의 환경이나 불신이 아닌 스스로의 자학에서.

빛을 받아들이기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다는, 그런 자학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나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던 힘이야. 그냥, 운 좋게 힘을 각성한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니……. 주님께서 힘을 거둬간 것도 당연한 거라고."

운 좋게 힘을 각성하다니.

신성력을 각성한 다른 신자들에게도 모욕이 될 말이다.

그건 메어리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그런 걸 망각할 정도로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질 못하고 있었다.

"그 애도 다시 일어섰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아이조차 다시 일어서지 않았는가.

설령 사술이라 한들, 그 힘이 진실 되었다는 건 정식 성직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기존에 고수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떽."

그런 자학을 더 듣다 못한 셰인이 메어리의 머리에 손날을 휘둘렀다.

베일 위로 선명히 느껴지는 거친 손길.

하지만 아프진 않다.

슬쩍 올려다보니, 자신을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쏘아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셰인이 그러한 얼굴로 말했다.

"…남이랑 자길 비교하는 습관은 버리는 게 좋아."

자기는 빛을 거머쥐고도 아무것도 못 했다느니.

상대는 자신보다 더한 비극을 겪고도 끝내 일어섰느니.

누가 더 처량한지를 자랑하는 건, 셰인의 입장에선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충고하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지. 그렇게 비교질만 하던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자학이 엿보이는 목소리.

누군가의 그림자를 쫓기만 하는 건 그런 감정에 계속 휘둘리며 산다는 것이다.

그걸 두 번째 생에까지 와서도 각오하기로 했지만, 공교롭게도 이 소녀는 그걸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지금의 충고는 그런 우려에서 비롯된 것.

"그리고 네가 가문에서 쫓겨난 게 뭐 대수냐? 시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유로 결과물도 보잘것없다면 레온은 대체 뭐가 되는데?"

"……여기서 레온이 왜 나와?"

"그런 게 있다."

역사서엔 볼레로의 단짝이라 소개되었지만, 실상은 잔챙이 취급이나 받던 오합지졸 떨거지들.

그렇게나 보잘것없는 녀석들이, 지금은 이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가문으로 자라나 있다.

"레온도 가문의 영향력을 깊게 받았지만, 위기에 빠졌을 때 거머쥔 빛만은 순전히 자기 의지에서 비롯된 거였어. 너도 마찬가지로 어쩌다 교단에 오긴 했지만……. 결국엔 네 의지로 빛을 거머쥐게 되었던 거잖아?"

시작이 보잘것없더라도, 그 보잘 것 없음을 어찌 이어가냐에 따라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

적어도 셰인은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을 가지고 충고를 했지만, 정작 메어리는 그 충고가 와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바다를 응시하는 얼굴.

그게 벌겋게 보이는 건 그저 석양빛 때문일까?

"……아무렴, 내가 충고해서 뭘 하겠냐."

메어리의 입장에서 자신은 싫어해 마지못한 이단자인 것을.

아무리 섬의 사람들을 구제해주었다 한들, 교단의 사람들에게 허락받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침묵뿐이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 터.

오히려 이렇게 옆을 지키고 있는 게 해가 될 지도 모르니, 위로는 이쯤에서 끝내고 물러나는 게 좋다 생각이 되었다.

"그럼 난 이만……."

"잠깐."

막 떠나려던 때 메어리가 셰인을 불러 세웠다.

뭔가 더 따지고 들 게 있는 것일까?

셰인이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메어리를 돌아보았다.

이어지는 물음은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

"너, 정말 이 섬을 떠날 거야?"

섬을 떠난다.

직접 공표하진 않았지만, 애초에 이 좁은 섬에서 비밀이라고 할 건 지키기가 쉽지 않다.

뭣보다 애초에 숨길만한 내용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겸사겸사 빨리 돌아갈 이유가 있는 내가 하는 편이 나을 테고……."

"너 바보야?"

솔직하게 말하니 메어리가 바로 욕을 내뱉었다.

그래, 이제야 평소답군.

거기에 안도를 느꼈지만, 그와 별개로 신경이 긁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면전에 대고 비아냥을 듣는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바보는 무슨. 나 데리고 돌아갈 왕복선은 좀비들에게 갈갈이 찢기고, 아직 환자들 건강도 호전이 안 돼서 배 고치고 돌아가려면 몇 년은 더 걸릴 판국인데. 제대 날 맞춰서 집에 가려면 내 발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벽외지역이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알면서 거길 들어가려고 해? 어차피 돌아가더라도 죄수병으로 다시 올 게 뻔한데 여기에 몇 년 더 있다가 복귀하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

"야. 아무리 내가 하지 말라는 거 다 하고 사는 놈이라 해도 그렇지, 평생 동안 죄수 딱지 달고 살 생각은 없거든?"

어차피 자신이 이 제국을 완벽히 바꿀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한다.

복귀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이 제국의 풍조에 허락되는 선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내자.

그렇게 결심을 한 만큼, 또 다시 경솔히 전과를 쌓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떠나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하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던가.

이런 형태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무래도 이 소녀에겐 미련이 크게 남은 듯하였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셰인에게 지금의 작별은 마냥 아쉽다고 할 게 못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무슨. 서로 살아 있으면 언젠가 만날 텐데."

돌림병은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더라도 그걸 해결할 수단은 생겨났다.

하물며 이 섬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찾아낸 안전한 지역.

심층부에서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만큼, 마물이나 야만족 등의 위험으로부터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뭣보다 셰인은 딱히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살아서 복귀할 각오를 하고 있으며, 서로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영원한 작별을 각오하기보단 언젠가 찾아올 만남을 기약하자.

그건 기다리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양측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였다.

"뭐, 너는 여기에 남아서 한참 더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내가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그래도 위안 정도는 주자, 생각하며 이어가던 말이 돌연히 끊어졌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혀온 메어리의 돌발행동에 의해.

"……어?"

볼가에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

그것을 뒤늦게 자각한 셰인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메어리를 쳐다보았다.

고개는 떨리고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신에게로 향해져 있다.

부끄러운 것을 애써 참듯이.

"좋아해."

그렇게 메어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만남을 빌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정작 그것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지 못한 채.

"……뭐?"

"너 좋아한다고 말했어."

"……."

셰인이 말없이 자신의 볼을 움켜쥐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예상도 하지 못해 허락할 수밖에 없던 기습의 흔적을 되새기듯.

'좋아해, 라고?'

좋아한다니.

메어리가 자신을?

"……왜?"

"오, 왜라니."

침묵 끝의 되물음에, 메어리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상하잖아. 네가 날 좋아한다니."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그걸 몰라서 묻냐?"

아무리 신성력을 잃었다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서로 티격거린 게 사라지진 않을 터이다.

지금의 고백은 그런 과거를 아예 없던 셈 치는 거나 다름없던 것. 셰인의 입장에선 뜬금없다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매일 같이 이단 녀석이라 떠들어댈 땐 언제고."

"그, 그러는 너도, 주근깨라고 말 했잖아!"

"그래, 서로가 이단이네 주근깨네 떠들어대는데,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내가 그걸 어떻게……."

"셰인."

뚝.

제 이름을 부른 메어리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부르면, 너도 날 이름으로 불러줄 거잖아."

바다를 황색으로 물들이는 바다의, 그 빛을 등진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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