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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13화 (113/255)

의무병의 환생 113화

바닷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가운데, 가슴께에 올린 손가락엔 박동이 더욱 선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고조된 감정에 반응하듯 피어오르는 검은 아우라.

그들이 일으키는 웅웅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조급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떠나야 할 몸이 아닌가.

이대로 계속 시간을 주면 이 소녀에게 더 큰 아쉬움과 미련을 남길지도 모른다.

"셰인."

그렇게 떠나려는 셰인을, 베르디는 다시 한 번 불러 세웠다.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녀 역시 이 시간이 그다지 오래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한 번만."

그런 야속한 운명에도 허락되는 타협점이 있으리라.

그렇게 굳게 믿으며, 베르디가 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떠나기 전에,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부탁.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셰인이, 배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돌려 베르디를 품에 안아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서로의 온기를 통해 삭혀지고, 품에 맞닿은 귓가에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듯.

하지만 조금은 위태로운…….

"셰인."

그 원인이 된 소녀가, 마지막의 순간을 빌려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저는……. 그저 천천히 죽어갈 뿐인 삶을 살고 있었어요."

비극이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 선하다 여겼던 아이들이 타락의 길에 접어드는 것을 보았다.

한 번 더럽혀진 것은 다시 깨끗해질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스스로를 더럽혀서라도 빛을 지탱하리라 여겼던 소녀에게, 그는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해 주어 그 손에 빛을 거머쥘 수 있게 해주었다.

"그건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죠. 이후에 또, 그 때 겪었던 것보다 더한 절망을 마주하고 꺾일지도 몰라요. 지금의 각오가 무색하게 무너질지도 모르죠."

그 의지를 빌려 그를 끌어안은 양 팔에 더욱 힘을 실어 넣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은……."

그를 만나기 전과는 달리.

"지금은 저의 의지로 당신을 안고 있어요."

그리고 그를 만나고 난 후,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와 달리.

지금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다가설 용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제가 당신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그 감사야말로 이 순간에 허락되는 전부이리라.

이윽고 팔에 차차 힘을 빼가며 그를 놓아주려던 때.

늘어졌던 두 팔이 소녀의 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할 말이야."

소녀의 어깨를 지나친 얼굴의, 그 두 눈엔 그녀의 뒷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셰인."

"네가 날 신뢰해 주지 않았다면, 난 이 섬을 떠날 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테니까."

등을 포개고 있는 양 손에.

그 손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빛은, 분명히 신성력이라 부를 힘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섬에서 지내는 동안 경황이 없었다 한들, 자신의 심경에 생긴 변화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모르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 마음이 어찌 잘못되었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제껏 배워온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구제하려던 소녀가, 자신의 앞에서 기적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주지 않았는가.

뚜렷한 확신도 근거도 없이, 그저 믿음만으로 우겨낸 결과를 긍정함으로써, 이 소녀도 다시금 제 몸에 빛을 거머쥐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구제를 받은 자가 기적을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로부터 개화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의 존재를 마냥 증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마워, 나 같은 녀석도, 이런 시대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줘서."

그 마음은 아직 신앙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또한 자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이리라.

그 감정을 털어놓은 셰인이, 이내 베르디의 몸을 놓아주며 배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노를 쥐며 말했다.

"제국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을게."

하다못해 이 소녀가 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그 정도의 작은 변화라도 이뤄야만 한다는 각오를 표하며.

제 손을 감싸는 빛은, 자신이 이 섬을 떠나야 할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하면서.

"네, 제국에서 봐요."

그 마음을 이해한 소녀가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노를 저으며 서서히 멀어져가는 그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소녀는 모래사장에 선 채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 것일까?

-정말로 이대로 보내도 괜찮아?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아우라.

그들이 일으키는 웅웅대는 소리는 마나에 의한 것이나, 그에 어린 의지만큼은 베르디 본인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떠나보내다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도 됐을 텐데.

하나둘씩 늘어가는 목소리.

그들 모두가 각각 다른 자아와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모인 이들에게도 한결 같은 감정은 존재하고 있었다.

-베르디 넌 너무 소심한 게 문제야. 그렇게 말하면 저 애가 네 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라고.

-남자들은 다 둔감하다니까?

-아니, 아마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 그래도 우리보단 눈치가 빠른 거 같은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대로 보냈다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이곳에 계속 있으라고 회유할 수도 있었잖아.

하나같이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을 깨워준 자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발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그가 앞으로 갈 길은 이제껏 거쳐온 것보다도 더 심한 가시밭길이란 걸.

모두가 평화롭다 믿는 시대에, 그 허점을 들춰내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대로 제국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를 이 섬에 잡아두고 싶었다.

행여나 그가 가는 길에 꺾여버리지 않을까.

하다못해 그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네가 여기에 있자고 말을 했다면 분명 남았을 거야.

-그래, 저 사람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널 구했으니까. 그건 마음이 전혀 없지 않으면…….

"제가 아니었더라도."

하지만 그가 거니는 길이 아닌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음에도, 굳이 떠나기를 자처한 건 그의 선택이거늘 어찌 자신이 막아 세울 수 있을까?

"그는 환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구하러 갔을 거예요."

이런 시대라도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가 아닌가.

어떤 계기로, 어떤 이유로 그 길을 나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의지는 그저 같이 있고 싶다는, 그런 어리광만으로 꺾어 누를 수 없다는 걸 베르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의지가 있기에 저희가 만날 수 있었던 건데. 우리에게 그를 말릴 자격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베르디. 우린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래, 그가 했던 말처럼.

그래도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밝히지 않아도 될까.

그래도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그에게 밝혀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러분도 알고 있잖아요. 그걸 이뤄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걸."

베르디는 그런 욕심조차, 지금의 자신에겐 분명 사치가 될 것이다.

그래,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자신은 그저 죽어갈 날 만을 기다릴 때와 달리, 훗날에 찾아올 만남을 기대할 수 있는 '기다림'을 선물로 받았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 미련은 느끼지 않는다.

허락되는 선에서의 모든 것을 해소한 현재, 떠나가는 그를 마주하는 소녀의 얼굴엔 애틋한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

"우리 모두 기도해요. 그가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도록."

그렇게 진심을 다해 양 손을 맞잡으니, 그 주변을 가득 채운 수행원들이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끝에 이루어지는 행동은 모두가 한결 같았다.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드린다.

그 순간 비춰지는 광명이, 서서히 먹이 드리워져가는 해안가를 더욱이 밝게 비추었다.

* * *

그리고 셰인은 그 빛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빛은 분명 자신을 위해 비추는 것이겠지.

그 빛을 눈에 새기던 셰인이, 노를 젓는 손을 유지하며 자신의 손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손아귀에 희미하게 품어져 있는 빛이 망망대해의 위를 비춰졌다.

기껏 해봐야 촛불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빛.

그것이 멀리 떨어진 그녀에게 보일까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빛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한 것이다.

이제야 겨우 기적을 긍정했을 뿐인 학자가, 진실 된 신앙을 가진 자를 따라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뭣보다 그녀가 비추는 빛 역시 점차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바다를 채워가는 희뿌연 안개에 의해.

어차피 대륙까진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위험이랄 건 없겠지만, 그래도 섬에서 비추는 빛이 사그라지니 적잖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걸로 당분간은 이별인가.'

함께 해온 시간은 결코 적지 않거늘, 이별은 정말로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 또한 감수하기로 했지만 역시 아쉬움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더 그들과 함께했다면.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좀 더 눈에 새길 수 있다면…….

'…아니, 괜한 욕심 부리지 말자.'

앞으로 할 일이 많지 않은가.

이 섬에서 일으킨 것은, 앞으로 자신이 이룩할 일들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성과를 긍정하되, 거기에 과한 미련을 주지 않고 떠나도록 하자.

끝내 안개 너머로 사그라지는 빛에서 등을 돌리는 것도 잠시.

-퍼어엉!!

폭발소리.

그에 경계심을 느낀 셰인의 고개가 다급히 섬이 있는 곳으로 꺾여졌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 * *

-퍼엉!!

폭음과 함께 쏘아지는 포탄이 섬의 상공으로, 이윽고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으로 쫓던 중 무의식적으로 함께 들려진 의수.

그를 보고 있자니, 이 의수를 만들어준 자에 대한 원망이 커져가는 게 느껴졌다.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염치없는 친구로구먼."

떠나기로 한 것이 내일이었거늘. 그 시간을 못 참고 그새 떠나버릴 줄이야.

덕분에 이 늦은 시간에 부랴부랴 송별회를 준비하게 되지 않았는가?

"에휴, 보수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선장님께선 왜 이리 늦은 시간에 부르신 거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어느 정도 예상했잖아?"

언덕 밑에서부터 들려오는 투덜거림.

창고로 쓰는 건물에서 하나둘씩 상자를 꺼내오는 원정대원들이었다.

그 상자에 적재된 건 화약가공품.

송별회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 그 가공을 도맡은 건 마침 드레이크의 곁으로 다가온 파라켈쿠스였다.

"그래, 준비는 다 끝났나?"

"자네가 시킨 대로 만들어두긴 했지. 그런데 이거, 전부 다 오늘 쓸 생각인가?"

"당연히 쓰려고 부탁했지. 내 아무리 책임자라 해도 권력을 쓸데 없이 남용할 생각은 없다네."

"……지금만 해도 쓸데없다 생각된다만."

탐탁찮은 파라켈쿠스와 달리, 드레이크는 강경하게 제 의사를 표하며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파라켈쿠스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라갔다.

애초에 이 원정대의 최고지휘자는 드레이크니까.

"자 그럼, 모두 발포!!"

다시금 언덕 위에 세워진 대포들이 불을 뿜고, 그로부터 쏘아진 포탄이 하늘 높이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퍼엉.

폭음과 동시에 폭탄이 터진 자리에, 화려한 색의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든 불씨의 색이 저마다 다른 색을 띠고 있다.

마치 비가 그친 후의 무지개가 조각이라도 나듯, 서로 다른 색과 규모를 지닌 빛무리들이.

"멋지구먼. 내 젊을 때 축제에서 본 불꽃들은 대개 빨갛거나 노란 게 전부였는데 말이야."

"별 거 없네. 화학에 입문한다면 누구나 응용할 수 있는 일이지."

불꽃 반응은 화학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

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 어떤 보석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

비록 한 순간 피어오를 뿐이지만, 창공을 뒤덮는 순간만은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리라.

분명 그럴 테지만…….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겐가? 가지고 있는 화약을 전부 써버리다니."

역시 노파심에 불안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이 불꽃을 만들기 위해 섬과 항해선에 있던 모든 폭약을 사용하고, 심지어 총알에 있던 화약까지 일일이 빼내며 사용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이 섬에 위험이 들이닥친다면 대응수단이 하나 사라지는 셈.

"몇 번이고 전임자들의 기록을 검토하고 내린 결론이라네."

그럼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드레이크의 얼굴엔 여유만이 가득했다.

"전염병이 퍼지기 이전에도 이 섬에 있는 동안 화약을 쓴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더군. 기껏 해봐야 언데드들이 습격을 해왔을 때나 많이 썼지만……. 그것도 이미 전부 해결된 상태가 아닌가?"

"이 친구야. 그렇다 해도 만약을 대비할 수는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있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 것을……."

"하하하!!"

파라켈쿠스의 불안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드레이크.

언제나 매사에 나긋하게, 혹은 실전에선 진지하게 임하는 노인이 취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웃음이었다.

그건 드레이크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바였다.

적어도 이번 원정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자네, 지금 우리 원정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설마 화약이라고 생각하는 겐가?"

"무슨……."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가 빌빌대고 있나?"

드레이크가 손을 내밀어 원정대원들을 가리켰다.

창고에서 화약을 가지고 오는 용병, 대포에 화약을 담아 발포하는 선원들. 그들을 보조하는 비전투원들까지…….

이 늦은 밤에 끌려왔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피로를 호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건 결코 떠나는 자를 향한 감사가 아닌, 그 감사를 표현할 정도의 체력이 받쳐주기에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뱃사람들의 악몽이라 불렸던 배의 저주도, 신조차 어찌 할 수 없다 알려졌던 병마의 기사도 지금 우리 원정대를 꺾어내진 못했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이야말로, 철과 화약보다도 더 믿음직스러운 무기가 아니겠나!?"

건강이야말로 최대의 무기.

그 의견을 들은 파라켈쿠스가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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