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15화 (115/255)

의무병의 환생 115화

[번외-도살자를 위한 추모(上)]

심층부의 주둔구역으로 원정대를 보낸 지도 언 4개월이 흘렀다.

그곳에서의 정찰임무는 영지군에서도 가장 중대시 여기는 일 중 하나.

당연히 시간이 지나고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영지군 측에서도 추가적인 병력을 파견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판국이었다.

전서구가 날아온 건 그에 필요한 전력을 강구할 무렵이었다.

'무사히 도착한 듯하지만……. 그 쪽도 상황이 썩 좋은 것 같진 않네.'

담당자에게 편지를 받은 영지군의 참모, 존이 내용을 읽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략 내용을 간추리자면 기존 주둔구역의 병력은 전멸했으며, 복귀항해를 하기엔 여의치 않아 당분간 그곳에 머물러 있겠다는 것.

그 판단은 그 역시 타당하다 여겼다.

아무리 사건을 해결했다지만 언데드들의 습격으로 배도 무너졌고, 뭣보다 전염병에 걸린 상태로 복귀하면 영지에도 피해가 가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마저도 지금 시점에선 시간이 꽤 흐른 후의 이야기인가.'

망망대해를 쉬지 않고 달리기에 전서구는 너무 나약하니. 최소 1달에서 2달……. 그만한 시간을 거쳐서라도 도착한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다.

그렇게 전해진 내용을 어찌 해야 할지는, 일단 사령관과 얘기를 나누며 결정해야 할 것이다.

"사령관님, 보고를…. 어?"

막 사령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내뱉어진 탄성.

뚝 멈춰선 존의 눈에, 사령관인 사샤와 독대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종복의 여인을 옆에 두고 있는 화려한 복장의 청년.

그를 못마땅히 쳐다보던 사샤가, 마침 집무실에 찾아온 존에게 손짓을 건네었다.

"부관. 차를 내어오도록."

"아, 네……."

접대용 차를 내어오는 존.

그 와중에도 존의 시선은 자연스레 손님에게로 향해졌다.

금발에 구릿빛 피부를 지니고 있는 껄렁한 인상…….

그 얼굴을 마주한 존이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실어 넣었다.

'이런 미친.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알렉산드로스 테라스.

테라스 제국의 제 1황태자이자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

그런 황실의 터줏대감이 왜 이런 변방 땅에, 그것도 가장 위험한 구역에 온단 말인가?

"부관, 주눅 들지 말도록."

숨통이 멎은 존과 달리 사샤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겁을 먹어야 할 자들은 오직 이 벽 밖에 위치한 놈들뿐이다. 고작 황실의 일원에게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걸 말로 해야 아나?"

'그게 말이야 쉽죠.'

확실히 이곳에선 황제조차도 사령관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권력이 아주 통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 영지의 병사들은 제국민들에게서 모집하는 것이고, 보급 역시 제국에서부터 오는 것이니까.

지원과 협력, 정치 등의 요인을 생각하면, 변경백이 황실의 인물 앞에 태연히 서는 건 사실상 '허세'나 다름없단 것이다.

'물론 그런 허세도 어지간한 강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존이 힐끗, 하고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가소롭다. 혹은 건방지다 여길 법 함에도, 그녀를 마주한 황태자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만이 그려질 뿐이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단이 있어 보이는군. 블레이즈 변경백."

"…사령관이라 불러주시죠."

이 영지의 영주는 대대로 전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후우, 한숨을 내뱉은 사샤가 그를 향해 물었다.

"……이 영지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것이죠?"

공교롭게도 사샤는 이 면담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당장 창밖에만 해도 황태자를 따라온 군대만 해도 한 사단은 되는 상태.

차기 황제가 될 만 한 자가 타지에 온 거니 이해할 순 있지만, 그만한 숫자가 있다면 제국 내에선 '뭐든' 할 수 있다.

'전쟁……. 까진 무리더라도, 통제는 가능하다.'

관건은 무얼 위한 통제인지.

그 의미가 내포된 물음에 알랭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관심이 있는 인재가 이곳에 왔으니 말이다. 나 역시 그녀를 지켜보고자 따라온 것이지."

인재.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종복의 여인이었다.

흑색 단발에 손에 상처를 가득 달고 있는 여인.

마침 차를 내어온 존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일라이…?"

"오랜만입니다 존."

알랭을 따라온 시종.

일라이가 과거 동료이자 소꿉친구인 존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었다.

그녀를 진작 눈치 채고 있던 사샤가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설마 관심 있다는 게 이 녀석인 겁니까?"

"관심이 있긴 하지만 뭐…….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가는 길이 같아서 그런 것뿐. 딱히 그녀가 목적인 건 아니라네."

"그러시겠죠."

제 앞에 있는 녀석은 권력으로 통제가 되는 자가 아니니까.

제국의 체재로 이해하려고 하면 언제나 봉변을 당해버리는 그런 존재.

실제로 사샤도 그런 식으로 엿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자였다.

"멋대로 이 영지를 벗어났던 주제에, 뻔뻔하게 잘도 돌아왔구나 일라이."

10년 만에 만난 수양딸에게 느낄 건 불쾌함뿐.

그런 불쾌감을 일라이 역시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10년 전 개인적인 일을 목적으로 헤저졌던 양어머니.'

그런 불편한 관계를 직시하듯, 일라이가 안경을 치켜세운 채 진지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마망."

"…그렇게 부르지 마라."

사샤의 표정이 왈칵 우그러졌다.

마망이라니…….

왜 뜬금없이 새살 배기가 입에 담을 칭호로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일라이. 내 그래도 너를 어엿한 군인으로써 키우려 했거늘……. 이 영지를 벗어난 동안 독기가 빠진 게 훤히 보이는구나."

"죄송합니다 마망……."

"그리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주먹을 틀어쥐는 사샤.

눈을 껌뻑이던 일라이가 곧 무뚝뚝한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지를 벗어나기 전에 어머니를 마망이라 부르는 건 어머니의 앞이 아니었었죠."

"……허."

사샤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마주했기에.

"내 앞이 아니었다면……. 내 눈이 들지 않는 곳에선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다는 건가?"

"네. 그러니까 당시……. 질리언과 같은 부대에 속했을 때에, 부대에 있던 모두가 어머니를 두고 '마망 블레이즈'라고 부르곤 했었습니다."

"오우~ 그거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이왕 거론된 거 여기서 자세한 얘기를……."

"태자님은 닥치고 계시죠."

으르렁거린 사샤가 담배를 재떨이에 내던졌다.

그 신경질적인 손짓엔 회고가 동반되어 있었다.

'질리언과 함께 속해 있던 부대라면……. 그렇군. 때까치 부대에 있었을 적인가.'

때까치.

작고 앙증맞은 크기에 귀여운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그런 귀여운 외모를 지녔음에도 '나뭇가지에 사냥감을 박아 넣고 씹어먹는'잔혹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때까치 부대라는 이름은 당시 영지의 소년병(귀여운) 중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도살자)을 선별했다 하여 지어진 별칭.

하나하나가 신동이라 불렸던 만큼 소속원들 하나하나가 베테랑 군인 못지않았으며, 그러한 부대에서 실질적인 리더 역을 맡았던 것이 바로 제 뒤에서 딴청을 피우는 참모총장이었다.

"이야, 오늘따라 성벽이 잘 자라나는 것 같네요~ 오늘 날이 화창해서 그런가?"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알 것 같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이런 때에 쓰는 것일까?

하지만 이미 20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의 이야기. 괜히 그런 부분에 신경을 썼다간 사령관 일도 못 해먹을 것이다.

사샤가 새로이 담배를 태우며 물었다.

"여기에 얼굴을 들이민 건 군에 복귀하기 위함이더냐?"

"처음 질리언과 했던 계약의 기간이 만료되었으니까요. 이후 질리언이 단델라이언의 후견인이 되어준다 하였으니, 그 관계가 유지된다면 이 영지를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단델라이언.

당시에 사샤와 일라이 사이의 갈등을 만들었던 시설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무나 행정 쪽에선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은 상태.

그럼에도 지금 이때까지 그 시설은 여전히 이름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애송이 녀석……. 정말로 그 시설을 10년 간 지원해줄 자금을 대었을 줄이야.'

야만족 태생의 아이들을 지원한다…….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이야기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별 얘기가 없는 것도 공작의 수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논란을 죽이며 얻은 이익은 천문학적인 수치에 달할 터.

'근래 4년 간 일라이의 명성을 빌려 사병을 보강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고 했었지.'

전설이라 불렸던 병사는 무릇 무력을 가진 자들의 우상이 되는 법이니.

그렇게 인력을 끌어 모아 만든 사병단은, 라인하르트 영지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굳혀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제국에 속한 귀족이 '군권'없이 그만한 병력을 끌어 모았다는 것.

'아무리 공작가라 한들 결국엔 제국에 묶여있는 신세. 사병을 필요 이상으로 늘리는 건 황실 측에도 견제가 들어올 일이다.'

반란을 고려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마냥 허황된 소리라고 취급할 수도 없다.

그러니 머지않아 제국에 피란이 올 수도 있으리라.

그런 예견이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이 영지에서 신경 쓸 문제는 아니로군.'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방벽의 수호.

라인하르트 가문의 문제는 라인하르트와 제국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지금 고려해야 할 건 자신에게 찾아온 이 '두 명의 손님'에 대한 처사이며, 그 중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건 수양딸이 아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었다.

"부관. 나는 잠시 태자님과 얘기를 나눌 테니, 일라이에게 앞으로 할 일을 지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존과 일라이가 방을 벗어난 뒤, 사령실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머지않아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남자와, 현 제국에서 유일하게 군권을 거머쥔 귀족만이.

"그럼 부외자도 빠졌으니 본론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사샤가 그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배짱으로 호위도 없이 저와의 독대를 청한 것이죠?"

"허허,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제국의 지도자로써 영지를 시찰하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거늘, 거기에 호위를 등용할 필요가……."

-쿵!!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샤의 발차기가, 알랭의 옆을 지나쳐 의자를 찍어 누르며 난 소리였다.

"내년부터 이 영지에 오는 보급이 전년 대비 3할이 줄어들었다는 것…. 알고 있습니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네."

"알고는 있었다는 거군요."

"뭐, 앞으로 내가 지도할 나라니까. 국민들의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정도는 대략적으로 파악해둬야겠지."

차를 마저 들이킨 알랭이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었다.

소파의 표면이 깨질 정도의 힘이 실린 발차기가 옆을 꿰뚫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사령관을 내려다보는 태도로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당초에, 근래 영지군의 생존률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니까. 군의 안정성이 증가한 만큼 군사비가 삭감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나?"

"위태로웠던 전황이 겨우 안정화를 이룬 것뿐입니다."

사상자가 줄은 만큼 복지나 보급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 터다.

그런 마당에 생존률이 늘었다는 이유로 보급을 줄이다니.

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누구나 이상하다 여길 판단일 터.

"자네, 그걸 정녕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지 않길 바라기에 묻는 건가?"

"무슨……."

"뭐, 정치 때문이란 거지."

빠득.

사샤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병사의 생존률이 늘었으니 보급을 줄여도 방어선이 무너질 일이 없다……. 구실 좋은 핑계지. 실상은 황실과 교단의 권위자들은 자네가 힘을 가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웃기는 말을."

귀족들이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는 경우야 일상다반사지만, 이곳은 당장 1주일 전만 해도 반란군들의 습격으로 북쪽 성벽이 반파까지 간 상태였다.

그런 일이 빈번히 터지는 곳에서 어찌 제국의 정치놀음 따위에 신경을 기울일까?

"사망률이 줄었다 하여 병사들의 희생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 위험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만큼, 어느 방면에든 대비할 수 있도록 힘을 쓸 필요가 있다는 걸 꼭 말로 해야 압니까?"

"말로 해도 못 알아먹겠지. 이 영지는 제국의 끝자락에 있으니, 탁상공론을 하는 자들이 그 위기감을 알기에는 무리가……."

-콱!

거들먹대는 알랭의 멱살이 사샤의 손에 틀어쥐어졌다.

"그렇게 정세 파악이 잘되면서도 이곳까지 당당히 찾아온 애송이에게 경고 한마디 하지."

이윽고 제 앞까지 알랭을 끌어당긴 사샤.

인내를 거듭하여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후에 내뱉은 말까지 삼킬 수는 없었다.

"너희들의 그 알량한 정치에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마. 그들의 목숨을 저울질 하는 건 이 영지를 책임지는 내 몫이니까."

전장에 발도 들여 보지 못한 이들이, 어찌 병사의 목숨에 가치를 매긴단 말인가?

설령 그들을 사지로 내몬다 하더라도, 그 목숨에 가치를 부여하며 희생을 숭고히 여기는 게 사령관이 된 자의 도리이다.

그것이 이 제국의 군사권 중 절반을 쥔 여인의 포부.

"…이 몸을 상대로 겁박을 하다니. 정말 터무니없구나."

그를 마주한 태자의 두 눈에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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