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16화
[번외-도살자를 위한 추모(中)]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껏 이 영지를 이어받은 자는 대개 이런 태도를 가진다 하더군. 그런 자리에 앉는 조건이 자네와 같은 사람인 것인지, 그 자리에 앉다보면 자네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지……."
주름지고 거친 손을 쥔 그의 손에 힘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한 허세나 오만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강욕.'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는, 제 주인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늙은 개에게조차도 그런 탐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내가 이 영지에 방문을 한 건 제국의 내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유라서 말이네. 자네가 무엇을 말하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그건 사샤도 알고 있는 바다.
지금의 겁박은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라도, 그가 그런 마음을 품을 것을 우려했기에 행한 것.
하지만 알랭은 그런 협박조차 역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뭐, 자네가 나에게 어찌 협조해 주냐에 따라 그들이 '알아서' 협력을 하게끔 유도해줄 수는 있지만 말이야."
비릿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수상쩍음.
그에 경계심이 느껴졌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이 영지밖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은'무력'에 의한 것뿐이고, 그건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뤄져선 안 될 일이니까.
"거래를 하지 사령관."
이내 멱살에서 손을 놓자, 알랭이 제 옷을 추스르며 본제를 꺼내었다.
"내 제안을 들어준다면, 내가 이 영지에 있는 동안 나를 따라온 황실 소속의 사단을 영지군에 편입시키고, 그들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양도하도록 하겠네."
"……."
"……부족한가?"
"아뇨,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파격적인 제안이군요."
그를 따라온 병사들은 숫자는 물론이고 하나하나가 정예병에 준하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득이 될 건, 차기 황제가 이 영지에 머무르는 한 재무관리자들이 보급에도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단 것이다.
그가 있는 동안엔 오히려 전년보다 더 늘어날지도 모를 터.
관계를 잘 유지하면 그 이전보다 보급의 질을 높이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런 제안을 하면서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죠?"
"내가 이 영지에 있는 동안 편의를 봐줬으면 하는군. 겸사겸사 호위도 해주고 말이야."
"…그게 전부입니까?"
"태자의 신분으로 변방의 땅에 왔는데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겠지."
당장 황실만 해도 제 목을 노리는 이들이 널려 있거늘. 제국법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의 안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를 보장받기 위해선 사령관의 협력은 절대적이니, 태자는 그 협력관계에 한치의 오점도 남길 생각도 없었다.
"물론 수상쩍다 여긴다면 거절해도 되네. 보급에 대한 문제도, 자네가 교단과 황실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을 절제하면 그만인 문제니까."
그래, 알랭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압박을 가한 이유가 그저 경제나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는 걸.
'구급법의 전파.'
이 제국에 근 피란을 불고 온 지식의 보편화는, 기존 체재를 거머쥔 권력자들에겐 썩 내키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압박은 그것을 시작한 사샤에 대한 경고를 겸한 것.
그러니 그 지지를 포기한다면 보급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겠지만, 그건 사샤에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향한 경의가.
그를 위해 맺은 협력은, 이 영지를 넘어 제국을 위해서라도 물거품으로 만들어선 안 될 일이니까.
'……능구렁이 녀석.'
그리고 알랭은, 자신이 그 부분을 민감히 받아들인다는 걸 진작부터 파악을 한 상태였다.
욕망을 무엇보다 중시하기에, 사람의 욕망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파고드는 자.
그런 그에게 있어선 자신을 물어뜯을 수 있는 자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쯧, 혀를 찬 사샤가 마저 알랭에게 물었다.
"지켜볼 인재가 있기에 이곳에 오셨다고 하셨죠."
적어도 그가 이 영지에 해를 입히진 않으리란 건 알았지만, 정작 그가 목표로 하는 것 역시 사샤로썬 간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과 협력하는 당장의 목적은 '이곳에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함'일 뿐.
그 이유만으로 황실 휘하의 군사를 내어준다는 건, 이 자가 '그녀'의 존재를 진지하게 탐내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왕 황제가 될 거라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 자를 떠올리던 중, 황제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이 진해졌다.
그건 이단의 군주를 포섭했을 때에도 표하지 않은 감정.
"나는 나의 선조이자 정복왕이라 불렸던 분의 위상을 넘어서고 싶네. 그걸 위해선 그분의 충실한 신하를……. 그 영웅의 재림이라 평해지는 자를 이 손에 거머쥐어야만, 비로소 동일한 시작점을 잡았다 할 수 있지 않겠나?"
테라스 제국의 제 1황태자.
그는 그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만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야망을 쫓아 이 사지에 발을 들인 자였다.
* * *
'그럼 전 잠시 보육원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맡아야 하는 만큼,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익힐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그것이 지시를 마치기 무섭게 일라이가 내뱉은 말이었다.
어차피 오늘 당장 군에 복귀할 수도 없는 노릇. 10년이나 영지를 벗어난 만큼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터이다.
걱정이 있다면 시설의 아이들이 일라이를 알아볼지에 대한 것이지만…….
'뭐, 내가 가는 것보단 낫겠지.'
시설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싫어하고 있으니까.
도리어 일라이가 돌아와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만 들 뿐.
그 덕인지 업무차 목적지로 향하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거기까지!!"
위병단의 숙소.
그 인근에 위치한 연병장에서, 심판을 보던 병사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그가 앞두고 있는 자리에 대치하는 건 거구의 남성,
그리고 대조될 정도로 여린 몸을 지닌 여인.
아니, 얼핏 보면 가녀릴 뿐이다.
잔근육이 도드라지는 팔과 곧게 뻗은 다리. 그리고 손에 가득한 굳은 살…….
대련을 위해 가볍게 차려입은 몸의 곳곳엔, 소녀가 단련한 흔적들이 여럿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은색의 머릿결은 무척이나 곱다.
대련이 끝난 후, 뒤로 묶여진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제 앞의 상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 패배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거구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위병들이 하나둘씩 감탄을 흘렸다.
"다, 단장님이 이기셨다."
"아니……. 방금 그걸 이겼다고 할 수 있나?"
"한 끗 차이였지."
"아직 성인식도 안 치렀는데 저 정도라니……."
얘기를 들어본 바 대련에선 위병단장이 승리한 듯하였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녀를 상대로 거둔 아슬아슬한 승리.
설령 대련이라 한들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소문으로 익히 들어왔지만……. 나이에 못지않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네, 저도……. 좋은 가르침을 주신 데에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서로에게 경의를 표한 후, 은발의 여인은 연병장을 벗어나 근처의 휴식처로 걸음을 옮겨갔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함이겠지만, 이전의 대련에서 꽤 체력을 소모한 듯 안색이 꽤나 창백해진 상태였다.
"……콜록."
기침과 함께 휘청이는 몸.
이후 그 몸이 비틀거리다 넘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서며 그를 지탱해주었다.
"세실리아, 라고 하셨죠?"
영지군의 참모총장.
존이 쓰고 있는 군모를 스윽 올리며 눈웃음을 보여주었다.
"현 블레이즈 영지군의 참모인 존이라고 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하는데……."
"……."
* * *
'라인하르트 가문의 성인식은 18세가 되는 해,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라인하르트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전통으로, 세실은 그 성인식을 위해 이 블레이즈 영지에 들린 상태였다.
다만 그건 세실이 이후 가문을 이어받기 때문이 아니다.
가문의 계승자를 내건 혼약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기에…….
즉 아직까지 마땅한 반려를 찾지 못하여, 아직까지도 계승권을 간직한 세실이 마지못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사령관님은 가급적 병사와 사적인 자리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존은 세실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다.
참모와 병사로서의 관계만이 아닌 옛 전우의 자식이 된 자로서.
그리고 사령관이 애지중지하는 '그 소년병'과 연을 맺은 자로서도.
"자, 여기 드시죠."
쉬고 있던 세실에게 존이 유리병과 잔을 내어주었다.
차게 식은 병의 안에 있는 것은 거품이 끓어오르는 검은 액체. 무더운 여름날에 마시기 좋게 차갑게 식힌 음료였다.
그 병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세실을 보며 존이 의기양양 말했다.
"이거 어디서 본 적 없으시죠? 하긴, 이 영지에서만 나오는 물건이니 모를 수도 있죠."
"혹시 콜라인가요?"
"아아~ 이건 콜라라고……. 얼라리?"
"왜 그러시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능청스레 흘려 넘긴 존이 병에 담긴 음료를 컵에 따라주었다.
그 때에도 세실의 눈은 휴식처 밖으로 향해져 있었다.
대련을 끝마친 후에도 여전히 훈련을 하는 병사들에게로.
"모두 기립!! 지금부터 훈련인원 점호에 들어가겠다! 선두부터 번호를 호명해라! 시작!"
"하나!"
"둘!"
"셋!"
"야!"
"엎드려뻗쳐!!"
"아악!! 어떤 새끼야!!"
한 병사의 과도한 기합에 연대책임을 짊어지게 된 병사들.
고된 훈련을 보던 세실의 얼굴이 차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벼려진 눈빛은, 마치 자신과 그들 사이의 역량을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가 작다 생각되시죠?"
대강 속내를 읽은 존이 툭 말을 던졌다.
정곡을 찔린 것일까.
테이블에 오른 손이 살짝 틀어쥐어졌다.
'하기야, 이제까진 연이어 승리를 거둬왔으니……. 진짜 군인들의 저력을 보고 주눅이 들 법도 하겠지.'
영지 밖에선 백전 무패라 불리는 전적을 가진 상태.
그 전적은 이 영지에 온 후에도 이어지리라 여겨졌지만, 막상 위병단장과의 대련에선 한끗 차이로 패배하게 되었다.
혼약이 걸린 결투가 아닌 대련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분한 듯, 유독 세실의 관심은 훈련을 주도하는 위병단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제국엔, 이렇게나 강한 분들이 있었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이다.
근 4년 간 사망률이 대폭 줄었다 한들, 방심을 하면 바로 목이 날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전 세실 아가씨도 굉장하다 생각합니다. 이전에 상대했던 분만 하더라도 5써클의 경지에, 온갖 수라장을 거쳐 온 엄청난 강자거든요."
그런 마당에 이 소녀는 성인식 이전에 3써클의 경지에 오른 것도 모자라, 그 정도의 경지만으로 이 영지에서 수십 년을 생존해온 강자들과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녀의 역량이 터무니없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질리언 형님을 이미 뛰어넘었어.'
저주받은 아이라 평해지는 소녀가 이만한 성과를 낸 셈.
차기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건 결코 허황된 소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지를 다져갈수록, 그녀를 저주받은 존재라 일렀던 교단의 입장은 위태로워지게 될 터.
'어쩌면, 라인하르트 가문이 일라이를 이용해 사병을 늘린 것도 그에 대적하기 위한 걸지도 모르지.'
머지않아 라인하르트 가문을 중심으로 제국에 큰 파장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 사정을 이 소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존은 가문에 대한 얘기는 묻지 않기로 하였다.
"…앞으로 1년 간 세실 아가씨께선 제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될 겁니다."
이 영지가 제국의 정세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건 군사적인 지원뿐.
그 부분은 사령관과 황태자가 어찌 할 문제이니, 자신은 내정에 신경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문에서의 요청도 있는 만큼 다른 귀족 출신자들과는 달리 편의를 봐주는 것도 없을 예정이고……. 뭣보다 공작님께서 이곳에 왔을 때처럼, 위험한 작전에도 대거 투입될 예정입니다."
지금의 경고는 그런 참모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곤 하나, 거기에 결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일반 병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전장이란 곳이다.
그러한 시련을 정녕 이 소녀가 버텨낼 수 있을까?
"…이미 각오한 상태예요."
세실은 그런 걱정을 굳센 의지로 털어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아주 희미하게.
잔을 쥐고 있는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강하다 해도 아직은 어린 아이인가.'
그 아비에 그 딸이다.
쓰게 웃은 존이 제 양 손을 맞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뭐,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여러모로 위험이 가득하긴 하지만 최근엔 생존률도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뭣보다 저나 사령관님 역시 병사들의 목숨을 허투루 여긴 적은 없으니까요."
거짓말이 아니다.
윤리를 져버렸다 한들, 그 또한 그들이 돌아갈 곳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러니 전장에 선 이들의 목숨은 결코 헛되이 쓰여선 안 되고, 그들 모두가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자격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윤리를 져버린 영지가 지향하는 최소한의 선.
그리고 그건 세실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두 사람에게 들었던 대로 믿음직하신 분이네요."
"두 사람?"
"아버지와 일라이에게 옛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분명히 참모님과 같은 부대에 속해 있다 하셨고……."
세실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을 이 영지에 보내길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현 영지의 책임자 중 한 명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전우이기 때문이란 말을.
그 말로부터 유대를 느낀 존의 쓴웃음을 그렸다.
"괜찮으면 그때 이야기 들려드릴까요?"
일라이, 라인하르트, 안젤라…….
그 외의 동료들과 함께했을 적에 있었던 옛 이야기란, 그 후세가 된 자에겐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