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17화 (117/255)

의무병의 환생 117화

[번외-도살자를 위한 추모(下)]

"당시 부대에 속해 있던 분들은 하나같이 엄청났었죠. 일라이야 저랑 동갑인데도 어지간한 적들은 상대가 안 됐고, 질리언 형님도 뛰어난 무훈을 자랑하셨죠. 신앙에 재능을 논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안젤라 누님의 신성력도 터무니없었어요. 혼자서 같은 부대의 사람들을 전부 책임지고도 남을 정도였고……."

"…다들, 굉장했나보네요."

"반면 저는 특출난 능력이랄 게 없는 몸이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생을 했었죠."

그는 일라이처럼 태생이 뛰어나지도, 라인하르트처럼 가문의 비전을 전수받지도, 안젤라처럼 굳센 신앙을 가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자학적인 발언이 의외인 듯 세실이 되물었다.

"아버지께선, 당시 참모님께서 부대를 이끄는 리더역을 수행했다 하셨어요. 일라이도 참모님이 없었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말했었고……."

"아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워낙에 다들 개성적이다 보니 머리 쓰는 일이 자연스레 저에게 떠넘겨진 거였거든요. 뭣보다 그 리더자리도 저를 영지로 데리고 오신 분이 언질을 주지 않으셨다면 맡지 못했을 거고……."

"영지로 데리고 오신 분이라면?"

"드레이크 나저러……. 저 이전에 참모로 활동하셨던 분이죠. 저에겐 스승님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겠네요."

존은 과거 한 해적선의 선장이 데리고 있던 아이.

본래라면 그 자가 체포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죽었어야 했지만, 아이만큼은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인지 드레이크는 자신을 이 영지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사실상 제 아비를 죽인 원수들에게 신세를 진 셈이지만……. 그건 당시에나 지금이나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 분이 없었다면 때까치 부대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일라이나 질리언 형님과도 만나지 못했겠죠."

신분도 출신도 지향하는 바도 모두 달랐던 부대.

하물며 하나같이 별종이라 불리는 이들이기에 어울리지 못하리라 여겼지만, 그들 모두가 전장이란 각박한 곳에서의 생존이란 목적으로 협력을 하며 우애를 다져왔다.

비록 1년뿐이지만, 그 1년은 그들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은 상태였다.

"정말 다들 한 개성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근래엔 그런 친구들보다도 더 엄청난 괴물이 이 영지에 온 것을 보게 되었죠.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요~"

애석한 웃음을 끝으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존.

그를 듣고 있던 세실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

"셰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역시 관심을 가지는군.'

그 반응을 염두에 두며 던졌던 화제였다.

셰인 골드리안.

그런 이름을 지닌 소년이 이 영지에 온 계기는, 사실상 눈앞에 있는 소녀를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단의 비호를 받아 생을 연명한 소녀가 그 소년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 소녀를 부려야 하는 입장에선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이 소녀가 이 영지에 온 것도 그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

실제로 세실이 반응을 보였지만, 그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겉으로 도드라지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도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셰인이…….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힌 채 시선만을 슬쩍 향해온다.

그 수줍은 모습을 보던 존이 긴장을 누그러트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뭔가 했더니 그냥 청춘이었나.'

유난히 입에 담긴 콜라가 달달하게 느껴진다.

경계심을 꺼트린 존이 세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정말 대단했죠. 이 영지에서 이룬 성과만 하더라도 처음엔 죽은 사람을 살리질 않나, 이후엔 파스라는 걸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결림을 해소해 주고……."

존은 이제껏 자신이 보았던 셰인의 성과를 낱낱이 들려주었다.

신성력이 치유를 도맡는 곳에서도 의학과 약학의 필요성을 전파하던 모습들을.

직접적인 설명 없이 성과를 냄으로써 반론하던 이들의 입을 닥치게 하던 모습을.

그마저도 어찌 못 하는 고지식한 주교와 매 회의 때마다 설전을 벌이고, 그에 밀릴 때면 밤을 새가며 다시 논문을 작성하며 재도전을 하던 모습을.

그렇게 구급법과 더불어 '생활의약품'의 보급으로, 군 내부의 복지를 몇 층 더 높아지기에 이르렀다.

그 모든 것이 영지 밖에선 여러 논쟁거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영지에서 그를 못 마땅히 여기는 건 갓 이 영지에 온 교단원들 정도였다.

그마저도 몇 년 지내면 없던 존경도 다시 생겨날 정도.

현재로썬 이 영지에서 그를 '선생'이라 부르는 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다 볼 수 있으리라.

"……대단하네요."

그런 셰인의 업적에 세실이 감탄을 내뱉었다.

연심을 품어서만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보수적인 제국에서 그만한 변화를 일으킨 건 전례가 없다시피 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변화는 이 영지 뿐 아니라 제국 전체로 뻗고 있는 상태.

교단에선 그걸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런 집단 내에서도 '크리스틴'이란 이름의 추기경을 필두로 소수의 지지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셰인 골드리안은 이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로 인한 변화는 줄곧 제국에 있던 사람조차 체감할 테지만, 그렇기에 제국 곳곳에 의구심을 가진 자도 적잖게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어요. 그 친구, 고작 14살밖에 안 됐던 시절에 어떤 경험을 했으면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지."

옆에서 그를 지켜봐왔기에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군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고작 14살에 불과했던 소년병.

그런 녀석이 야만족의 우두머리를 홀로 쓰러트릴 뿐 아니라, 사령관이 직접 반란군 세력 소탕까지 명령을 할 정도로 뛰어난 무력까지 다루고 있다.

할 일이 많은 마당에 여유를 내어 세실을 만나러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가문에 무언가 교육을 받은 겁니까?"

사령관조차 자신과 공유하길 거부하는 그 소년병의 정체를, 이 소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기에.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정작 세실은 그 물음을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콜라병을 내려다보는 눈엔 그윽함이 가득했다.

"오히려, 제가 셰인에게 많은 걸 배웠죠."

4년.

그 시간을 넘어서는 중에도, 그녀는 그 소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더욱 나아가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그 만남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자, 하지 않아도 될 성인식을 직접 치르러 올 정도로.

'사령관님도 그렇고 이 아가씨도 그렇고…. 아주 여자 꼬시는 데에 도가 트셨군.'

존의 입장에선 질투마저 느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불만일 뿐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이 영지군의 입장에선 절대 적이라 부를 자는 아니었다.

이단을 짐승취급하는 사령관도, 영웅의 재림이라 불리는 냉혹한 소녀를 매료시키는 소년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을 테니까.

"그럼, 전 슬슬 약속이 잡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좋은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내 세실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후, 존은 사령실로 돌아가기 전 잠시 거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업무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할 일.

오직 이 영지에서 그만이 할 수 있고, 그만이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 * *

"…오셨군요."

아니, 오늘을 기점으로 한 사람 더 추가되어 있었지.

보육원 단델라이언.

그 뒤뜰에 도착하니, 시종복을 입은 여인이 자신을 반겨주는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놀이터로 쓰는 장소.

곳곳엔 아이들이 가지고 놀라 만든 기구들이 가득하지만, 하나같이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상태였다.

시소는 부러져 있고, 그네를 이루는 사슬은 헐거워져 끊어지기 직전이다.

'망할, 또 업자 불러야겠네.'

얼마 전에 직접 수리했다가 몰매를 맞았으니까.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일라이는 한 곳에 봉긋 솟아올라있는 모랫더미를 앞두고 있었다.

그 앞에 세워진 액자에 들어 있는 것은 한 장의 그림.

과거 같은 부대에 속했던 소년병이 취미 삼아 그렸던 물건이었다.

존이 쓴웃음을 지으며 일라이에게 다가섰다.

"애들이랑은 잘 인사했어?"

"네, 다들 잘 자란 것 같아 다행이더군요. 한 사람이 빠진 게 섭섭하지만……."

코델리아 덴.

그 아이는 존에게도 유독 기억에 남고 있었다.

일라이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이유로 이 시설을 벗어나, 가장 위험한 원정에 참여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원정대 또한 전서구를 통해 복귀가 늦어진다 들었지만, 정작 존은 그에 대해선 별 걱정을 느끼지 않는 상태였다.

"괜찮을 거야. 내가 아는 최고의 군인이 함께 있으니까."

그곳에 있던 위험도 그 소년 덕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위안을 주었지만, 정작 액자를 내려다보는 일라이의 표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존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섬에서의 일이 해결되었다는 건, 곧 그들과 연을 맺은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거니까.

"……슬슬 시작하자."

이내 존이 품에서 담뱃갑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 중 하나를 입에 문 존이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액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조촐한 무덤.

그를 향해 연기를 내뱉은 존이, 곧 입에서 떼어낸 담배의 끝을 일라이에게 내어주었다.

"간접키스 요청인가요?"

"야, 우리가 피만 안 이어졌지 남매나 다름없는데 그런 걸 생각하겠냐?"

"이미 혼기가 지난 상태라 저도 조급한 상태입니다."

"그런 거야 꽃다운 시기에 외근 나간 네가 감수해야지. 됐으니까 받기나 해. 이것도 사령관님에게서 몰래 빼돌려온 거니까."

존의 강요에 일라이가 담배를 마저 받고, 그것을 입에 물며 한 모금 들이켰다.

콜록, 터져 나오는 기침.

비흡연자에게 있어 담배란 무척이나 괴로운 물건이었다.

"…어머니도 대단하시네요. 이런 독한 걸 매번 태우시고."

"태울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 영지니까.

그렇게 서로 담배를 한 모금씩 태운 후, 일라이가 다 태워지지 않은 담배를 무덤에 박아주었다.

반세기 전. 영지군에 줄담배가 도입된 후부터 군인들 사이에 돌기 시작한 문화였다.

향초를 대신해 담배를 태우는 식으로.

특히 죄수병처럼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그런 전우들을 위해 암묵적으로 행하는 조촐한 장례식.

"예전에는 이런 것도 못 했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제국법상 담배를 태울 수 있는 건 성인식 이후니까.

소년병이었던 당시엔 누가 죽더라도 그런 일이 더 없기를 바랄 뿐…….

하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들의 행방은 뿔뿔이 흩어진 진로 속에서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안젤라는 감옥에 가고, 명예로운 성기사 가문의 후예는 전장에서 비참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나마 둘의 경우에는 교단에 지지세력이 있으니 누군가는 기다리고, 또 누군가는 그들의 죽음을 기려주었고 있지만…….

전장에 선 모든 이들에게 그런 축복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페니 플레밍.'

존이 기억하는 그녀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학자로써의 성과는 내었으나, 그 외의 시간은 개인적인 연구를 하는 데에만 집중했으니까.

그마저도 남들과 공유하지 않으니, 참모인 존조차도 그녀가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물어보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만을 하며 넘겨왔으니까.

그 내용을 알게 된 건 이후의 보고서를 보았을 때였다.

바로 납득했다.

그녀의 연구가, 이 이단의 땅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류에 속한다는 걸.

'만약, 그 소년병이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법.

오히려 의학이 도입될 조짐이 보이는 지금이 기적적인 것이지, 그가 늦게 온 건 결코 안쓰럽다 여길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잊혀 가야 했을 뿐인 그녀를…… 두 사람은 기억해주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페니 언니,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 동안 혼자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님."

그렇게 양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 행동으로나마 전우에 대한 기억이.

앞으로의 삶에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지길 빌며…….

[도살자를 위한 추모 END]

* * *

-퍼엉.

폭음의 뒤를 이어 날아든 포탄이 성벽에 충돌하며, 사방으로 묵직한 파편을 터트렸다.

이후 벽의 포문에서부터 쏘아지는 포탄과 총탄세례.

섬광이 잔상으로 변하며 어두운 전장에 빗발치는 가운데, 은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손에 쥔 세검을 들어올렸다.

"셰인."

그 검을 앞에 선 이에게 겨누며 이름을 말했다.

이 대지에서 가장 드높은 성벽의 위에 자리한 금발의 청년에게.

"전력으로 와주세요."

그 단호한 목소리에, 남자 역시 자세를 잡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할 말이야."

손끝을 벼리는 마나의 칼날.

그보다도 더욱 날카롭게 깎인 눈동자가, 달빛을 빌어 여인에게로 향해졌다.

"죽기 싫으면, 죽을 각오로 덤벼."

서로를 향한 말엔 한 점의 떨림도 없었고, 이후에 이어지는 행동 역시 과감하기 그지없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 재회.

서로의 목숨을 걸며 싸울 이유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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