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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26화 (126/255)

의무병의 환생 126화

약 반 년.

그 시간 동안 셰인은 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를 누볐고, 매 순간마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왔다.

마물들에게 쫓기는 건 일상이고, 그런 마물들이 활동하기 어려운 곳엔 더 위험한 생물이. 혹은 야만족 무리가 진을 치고 있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그런 위험의 연속에도 의외의 가치를 발굴할 수 있었고, 그 모든 경험은 문서의 형태로써 그의 배낭에 보관되고 있었다.

'이 자료를 전하는 데에 불안한 게 아주 없진 않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할 수도 없지.'

시작도 안 하고 자료를 파기하다니. 그건 자신에게 목숨을 맡긴 학자들에게도 큰 누가 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일단은 사령관을 믿어보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배낭의 끈을 고쳐 쥘 무렵, 그의 배후로 누군가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캉!

"그래그래, 너도 같이 가야지."

셰인이 싱긋 웃으며 뒤따라온 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심층부를 함께 누벼온 동반자.

처음 마주할 때만 해도 제 허리께까지 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제 명치까지 올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것도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걸 생각하면……. 어쩌면 그때봤던 곰보다 더 커질지도 모르겠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셰인이 앞장선 채 목표로 한 도시에 발을 들였다.

제5주둔지.

모종의 이유로 반란군이 후퇴한 곳을 영지군이 접수하여 쓰는 곳으로, 십수 년은 방치되었기에 여러모로 낡은 티가 엿보이고 있었다.

벽외에 위치한 만큼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으니 당연할까?

'얘기로는 들었지만, 정말로 벽외에 도시를 만든 세력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명색의 주둔구역임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스윽 둘러본 건물 안 쪽엔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기까지.

무기나 식량 등, 남겨진 물품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곳을 벗어난 지도 꽤 오래된 듯 하였다.

'주둔구역이 야만족이나 반란군들에게 점거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지.'

5년 전 제3주둔지에서 벌어졌던 사건처럼.

물론 그때와 달리 주변에 혈흔이나 시체는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본래 상주하던 인원들이 이곳을 벗어난 지 꽤 된 듯 보였다.

-…우, 아우우.

반면 콘은 셰인과 달리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숲을 벗어난 후부턴 드물지 않게 보였던 모습.

언제나 낯선 환경에 들어설 때면, 콘은 가장 먼저 셰인의 배후에 몸을 숨기고는 했었다.

'평생을 숲에서 보내왔으니 이해 못 할 건 없지만…….'

그래도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보다 더 굉장한 건물들을 잔뜩 보게 될 텐데.

나중에 같이 복귀하게 되면 어떨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 아이도 제국에 함께 갈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겠지만.'

마경의 생물을…….

그것도 인간이 아님에도, 신성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물을 제국에 데리고 가도 되는 것일까?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아 측은히 콘을 내려다보는 것도 잠시.

-파앙…!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파공성.

아니, 그보다도 먼저 모래바람 사이로 터진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 셰인이 그에 반응하듯 제 머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삐그극!

관절이 뒤틀릴 정도의 충격.

이를 악 물고 충격을 견뎌낸 셰인이 뒤로 물러서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캉!!

"…괜찮아. 막았으니까."

하지만 공격은 한 번에서 끝나지 않는다.

또 다시 모래바람 속에서 섬광이 터지고, 그 순간에 셰인이 콘을 끌어안은 채 황급히 근처의 건물에 숨어들었다.

파앙! 바닥에 처박힌 공격이 사방으로 흙먼지를 퍼트린다.

그마저도 모래바람에 쓸려갔지만, 손아귀의 욱신거림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신성력이 없었다면 당분간 인대파열로 고생했겠지.'

제 손에 움켜쥔 투사체엔 그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심하게 찌그러져 있지만 분명 총알이라 불리는 물건……. 그것도 보통 알고 있는 소총탄보다 두 배는 두껍다.

강체술만 믿었다간 그대로 머리가 박살났으리라.

'그렇군, 대물저격총인가.'

대물이란 수식이 붙은 만큼 탑승병기나 마물을 대상으로 만든 무기.

구조상 양산이 불가능하여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병기이며, 저 멀리 보이는 탑에 서있는 자는 그런 무기로 도시에 들어선 이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영지군에서 침입자로 오인한 건가, 아니면 영지군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점거해서?'

뭐가 됐건 셰인도 이 앞으로 가야 하는 입장이니, 일단 거리를 좁혀야 한다.

얘기가 통하면 그걸로 좋고, 그렇지 않다면 적대하고, 여의치 않으면 도망치는…….

-파칵!!

고민을 이어가는 가운데 다시금 날아드는 총탄.

그것이 제 옆의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을 본 셰인이 식겁함을 느꼈다.

오래된 건물의 벽 따윈, 저 무기의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게 여겨질 것이다.

"콘, 넌 여기 숨어 있어."

-끼잉…….

"걱정 안 해도 돼.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자신 있게 미소를 지은 셰인이 곧 골목길을 빠져나가 거리를 질주하였다.

그 순간 탑에서부터 쏘아지는 한 줄기의 섬광.

셰인이 그 공격을 머리를 비틀어 피해낸 후, 대상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총알 정도는 육안으로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어.'

탄속은 음속의 1.5배.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총을 쏠 때에 일어나는 빛은 소리나 총탄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속도를 가지는 법이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다면 빛을 보는 순간 회피나 방어 등의 방책도 세울 수 있을 터.

초단위로 생사가 오가는 전장을 누벼온 셰인은 그게 가능한 자였다.

-휘리릭, 파앙!

거리와 건물의 옥상을.

그리고 창문 안쪽을 통해 실내와 외부를 오가며 저격을 피해가는 셰인.

그것을 반복하며 모래바람 속에까지 몸을 숨기니, 이내 상대의 사격은 셰인의 궤적조차 쫓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지에서의 사격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시야 확보에 애로사항이 피는 법.

굳이 노리고자 자세를 잡기 위해선 상체를 탑 밖으로 내밀어내야 할 것이며, 그 순간이야말로 절호의 반격찬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와라. 여기라면 이 쪽도 공격할 수 있으니까.'

이내 탑 인근의 건물에 몸을 숨긴 셰인이 제 손에 조약돌을 들어올렸다.

탑의 높이인 수십 미터 정도라면 투석의 사정거리 내.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직접 벽을 올라가 공격하면 그만이다.

'일단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제압을 하면……. 어?'

이내 탑 밖으로 인영이 비춰진 순간, 셰인이 돌을 던지려던 손짓을 잠시 주춤거리고 말았다.

동향을 살피는 정도로 그치리라 여겼거늘.

정작 상대의 몸은 탑 밖으로 내밀어지다 못해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실수한 건가?'

아니, 그런 것치곤 자세가 제대로 잡혀있다.

땅에 충돌한 직후 역시 마찬가지.

-쿠웅!!

이윽고 착지한 곳을 기점으로 퍼져나가는 모래먼지.

그 여파에 피부가 저려오는 것을 느낀 셰인이 호흡을 다잡으며, 제 앞에 나타난 자를 대면하였다.

'영지군 소속인가? 아니면 반란군?'

어느 쪽이건 말이 안 통하면 싸움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을 자각하며 손날의 마나를 벼려가는 가운데, 땅에 착지한 자가 제 손의 병기를 휘둘러 모래먼지를 걷어내었다.

"거기 계신 침입자 분에게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제 말을 알아들으신다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서시기를……."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며 외치는 여인…….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이곳은 블레이즈 영지군의 관할 하에 놓여있는 제5주둔구역……. 위협사격에도 물러나지 않은 당신은 이미 침입자로 규정된 상태입니다."

위협사격이라니.

첫발부터 머리를, 그것도 대물저격총으로 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허나 저 역시 불필요한 살생은 원치 않는 입장……. 당신이 협조를 해주신다면 피를 흘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사소한 의문에 개의치 않고, 제 손에 쥔 저격총의 총구를 그에게로 겨누어볼 뿐이었다.

"얌전히 투항하세요. 이 경고를 무시하신다면 다음은 머리를 노리겠습니다."

그 위협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이전의 사격은 물론, 이전의 착지에서 느껴졌던 힘을 통해서도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상대의 외형.

'시종복…….'

영지군 소속임을 밝혔지만, 정작 상대가 입고 있는 건 군복이 아닌 백과 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종복이었다.

뭣보다 저격총을 쥔 양 손에도 흉터가 가득한 상태.

셰인은 그런 흉터를 간직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일라이 씨?"

일라이 덴.

라인하르트 가문을 섬기는 시녀이자, 그 가문에 신세를 졌을 때에 여럿 어울린 적이 있던 셰인의 옛 지인.

세실에게 사용할 천식약의 제조법과 더불어, 제 정체가 담긴 서신을 라인하르트 공작에게 전해 달라 부탁을 했던 자.

"…제 이름을 어떻게?"

침입자에게서 제 이름이 나온 것이 의외인 걸까?

일라이가 잠시 총구를 거두며 셰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셰인이 쓰게 웃으며 제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죠. 일라이 씨도 저 기억하고 계시죠?"

비록 5년이나 지났지만, 셰인에게 있어 일라이는 남다르게 여겨지는 지인이기도 했다.

같은 사람을 위했고, 유사시를 대비해 뒤를 맡기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뭣보다 원정을 나갔던 중 그녀와 연을 맺었던 사람과도 마주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영지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고향이 블레이즈였으니 아주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

어쨌든 다시 만난 그녀에겐 반가움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타앙!

정작 그 인사에 돌아온 건 한 발의 사격.

그 총탄은 셰인의 옆을 지나치고, 측면에 있는 건물의 벽을 대파시켰다.

"……일, 라이 씨?"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당신처럼 흐리멍덩하게 생기신 분은 이제껏 본 적이 없습니다."

'흐리멍…….'

돌발적인 비아냥에 울컥함을 느끼는 셰인.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성을 벗어난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매번 안경 빼먹고 다니는 것도 여전하네.'

일라이는 지독한 원시.

멀리 있는 건 몰라도, 가까이 있는 사물은 지독하리만치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면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

대부분의 발언이 남들과는 달리 엉뚱한 생각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되, 그것을 남들이 지적해주기까진 자각조차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성격이란 거지.'

흐리멍덩하다는 말도 비아냥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보여서일 터.

첫 만남에서도 그로 인해 여러 오해가 발생했음을, 셰인은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라이 씨 안경, 안경이요!"

그 점을 이해하며 지적하자, 일라이가 흠칫 놀라며 제 눈가에 손을 얹었다.

대검보다도 무게가 나가는 무기를 한 손에 쥔 채…….

여전히 무시무시한 근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안경을 깜빡했군요."

정작 일라이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품에 손을 집어넣을 뿐.

적을 앞두고 있음에도, 제 눈에 안경을 쓰는 행동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음? 당신은……?"

"그래요, 당신이 알고 있는……."

-타앙!!

"아니 이번엔 또 왜!!"

가까스로 총알을 피해내며 윽박을 지르는 셰인.

하지만 일라이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셰인을 쏘아볼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근래에 말이 많은 '나야 나 사기범'이십니까?"

"아니……."

뭐라 답답함을 느끼던 셰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셰인입니다. 한때 라인하르트 공작가에서 신세를 졌던 녀석이요."

"……셰인?"

정체를 밝히기 무섭게 휘둥그렇게 뜨여진 눈.

적어도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신이 셰인 도련님이시란 겁니까?"

도련님.

자신을 기억하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네, 역시 기억하시는……."

-딸칵.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

하지만 이전처럼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탄창에 들어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총알이 다 떨어졌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일단 장전을 좀……."

"아니 이번엔 또 왜요!?"

설마 자신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렇게나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겐 보잘 것 없던 것이었나?

"당신이 도련님일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억울함이 느껴졌건만, 정작 일라이 역시 무언가 화가 난 듯 셰인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무슨……."

"정말로 당신이 도련님이셨다면, 그 옷을 입은 채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겠죠."

제 정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내세운 건 복장이었다.

몇 개월 동의 노숙살이로 넝마나 다름없게 해진 사제복.

그걸 지적한 건 자신이 불결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적어도 일라이는 겉모습이나 신분으로 상대를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지적은 위생에 대한 비하가 아닌 복장 그 자체.

"그 분이라면 분명 교단을 원망하고 계시겠죠. 그야 자신의 노력과 성과를 조롱했을 뿐 아니라, 대륙의 가장 위험한 곳으로 내몰아버리기까지 했으니까요."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옷을 입지 않으리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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