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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27화 (127/255)

의무병의 환생 127화

"교단을 상징하는 옷을 입으며 도련님을 사칭하다니……. 그건 그 분 뿐 아니라, 그 분과의 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을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일 겁니다."

이내 장전을 끝마친 총을 다시 겨누는 일라이.

안경 너머의 눈빛은 매섭게 벼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방아쇠가 당겨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대치상태만 계속 이어질 뿐.

그건 그저 상대를 견제하기에 취하는 태도일까?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에,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어서일까?

-끼우우…….

배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길을 숨어 다니며 자신을 뒤따라온 여우.

일라이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하지만, 셰인에겐 그 존재감이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걱정되어 쫓아온 거겠지.

눈앞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세실은 건강한가요?"

그렇게 자신을 줄곧 걱정해온 사람을 5년 만에 만났거늘, 어찌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적대할 수 있겠는가?

익숙한 이름이 거론된 순간, 저격총을 쥔 일라이의 손 끝에 망설임이 어려갔다.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그녀에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다.

"네, 무척, 건강하십니다. 셰인 도련님 덕에……."

그러니 지금의 물음만은 마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리라.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한 셰인이 등에 지고 있는 배낭을 떨어뜨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료를 꺼내어 앞으로 내세웠다.

"무엇 입니까. 그건……."

"세실의 약을 보강하는 레시피예요."

"……약?"

"항생성분을 추가했으니, 약물 사용에 따른 감염의 위험성도 적어지겠죠."

아무래도 스테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약물인 만큼, 오래 사용할수록 후유증이 심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지금 손에 쥔 것은 자그마치 5년에 걸쳐 보강한 레시피.

이것을 이용해 약을 만든다면, 이제까지보다도 훨씬 더 안정적으로 천식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절 쓰러트리시면…. 이것도 불태워버리시겠죠?"

천 마디의 설득보다는 한 가지의 보상이 효과적인 법.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사정에 깊게 연관될수록, 무엇보다도 강한 유대로 이어지는 법이다.

"……정말로."

이내 일라이가 총구를 내린 채 쓸쓸한 얼굴로 셰인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도련님이신 겁니까?"

만약에.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 느껴지는 눈으로.

"제가 출판한 책 읽으셨죠?"

"……네. 읽었습니다."

"거기에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었던가요?"

"아뇨, 하나도……."

말꼬리를 흐리는 일라이.

울컥함에 목젖이 떨려왔지만, 그럼에도 일라이는 힘을 주어 떨리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몇 번이고 읽었기에 알 수 있었습니다. 도련님께선……. 이런 험난한 장소에서도, 제 소신을 이루고자 했다는 걸."

그래,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 책에 어떤 의미가 깃들었는지도 파악했겠지.

그래도 한편으론, 그게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게 아닐까.

그저 환경의 압박에 밀렸기에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정말로 도련님이신 겁니까?"

그 모든 것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을 뿐.

그 고결한 심성은 재판 때 이후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울먹임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셰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여기서 추억담이라도 나눠볼까요?"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쿵.

손에서 저격총이 떨어지고, 일라이가 다소곳이 자세를 잡으며 셰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것보다 더 확실하게 아는 법이 있으니까요."

성에 머물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얼굴.

그 얼굴이 측은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반가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일라이가 그런 얼굴로 셰인을 향해 말했다.

"딱 한 번만……. 도련님을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

"……도련님께서, 얼마나 성장하셨는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대화보다는 몸으로.

그건 셰인 역시 환영하는 바였다.

"5년 만에 만났는데 얼마든지 해드려야죠."

"도련님!!"

양 팔을 벌리며 환대하자, 일라이가 셰인을 향해 달려들며 몸을 끌어안을 준비를 취했다.

자그마치 5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재회.

거기에 반가움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 터임에도…….

'뭐야, 갑자기 왜…….'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 몸의 신경이 이 순간 그에게 경고를 하듯이.

'도망쳐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일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한 문장.

최전선의 한복판에 홀로 고립되었을 때나 느끼던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상황이라면…….

그래, 곰이었다.

이전에 상대한 바가 있던, 온 몸이 뼈의 갑주로 둘러쳐져있던 곰을 대면했을 때와 같은 위기감.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향해 환히 웃으며 달려드는 여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이유는 머지않아 깨달았다.

5년 전, 성에 있었을 무렵 그녀가 말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림으로써.

'손대중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셰인은 그녀와의 대련 중 몇 번이고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 횟수는 어쩌면 변경에서 보낸 5년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아."

그런 기억을 떠올렸을 때에 이미 그녀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상태.

-우지끈.

셰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 * *

'…그래,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지.

제 등골을 두드리는 셰인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뿌연 색의 하늘 아래에 광활히 펼쳐진 고원. 사방에는 칼이나 창과 같은 냉병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러한 광경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긴 또 어디야?"

와본 적 없는 곳임에도 낯설기보단 익숙함이 느껴졌다.

과거 전장을 누비다보면 일상적으로 보는 분위기…….

시체만 있다면 그만큼 처참한 게 따로 없었을 정도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왜 이런 장소에 오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둔구역에 있었던 자신이 어째서?

"일라이 씨? 콘!"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들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둘 말고도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제 목소리만이 메아리칠수록 불안함이 가증되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마저 외침을 이어가던 중, 문득 셰인의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서게 되었다.

언덕의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 하나…… 아니, 임시로 급조한 텐트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져 있는 깃발의 십자 마크.

제국에서야 십자가는 흔히 보았지만, 정작 눈에 들어온 십자가의 가로선은 위쪽이 아닌 '정중앙'에 그어져 있었다.

카일의 고향.

아이헨발트의 국기에 쓰이는 문장이다.

"…이건 또 뭔 지랄인지."

200년도 전에 멸망한 나라의 심볼이 왜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아니, 뭐가 됐건 일단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이내 셰인이 공허한 전장을 가로질러 매달린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머, 드문 일이네요. 이런 곳에 손님이 다 오시고."

그 텐트 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들려오는 화답.

그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향하기도 전, 익숙한 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해왔다.

소독약, 그리고 붕대 특유의 천과 먼지 냄새.

그 뒤를 이어 일깨워진 시야에 들어온 건 책장에 박혀있는 책들과, 텐트의 중심에 자리해있는 간이형 수술대였다.

그 앞의 책상에 자리한 건 후드를 뒤집어쓴 한 여인.

"혹시 치료가 필요하신 건가요? 아프신 곳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뭐든……. 어라?"

자신을 알아본 것일까?

그녀 또한 자리에 뚝 멈춰선 채 셰인을 지긋이 응시하였다.

백지처럼 하얗게 물들어진 백발과 피부.

백인이라 쳐도 비정상적으로 하얀 데 비해, 눈동자의 홍채는 붉기 그지없다.

'백색증(알비노).'

체내의 멜라닌 세포 결핍으로 생기는 선천적인 유전병이다.

그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을 셰인은…….

카일은 한 명 알고 있었다.

"스승님?"

피오 아스클레.

전쟁터에서 죽어갔어야 할 자신을 살려준 은사이자, 자신을 의학의 길로 이끌어준 인도자.

그리고 이후의 삶에도 사라지지 않을 맹세를 쥐어준 여인.

"오랜만이네요, 카일.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반가움을 토로하고 있다.

외모는 물론이고 머리 둘은 작은 키도.

자신보다 연상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린 몸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외형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왜 여기 계신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야, 스승님께선 과로사하셨다고……."

설마 살아 있었던 건가?

아니, 그로부터 벌써 200년이나 지났다.

그녀도 인간인데 그 시간 동안 살아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제가 죽었다라……."

하지만 닮기만 한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고찰할 때에 턱을 괴며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드는 모습.

그 역시 피오가 늘 고민할 때에 취했던 태도다.

"아하!"

그 고찰 끝에 손을 탁 치는 행동 역시.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건, 결코 그녀가 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제가 죽었다고 한다면, 지금 저희가 있는 이곳은 저승이란 뜻이 되겠네요."

의사된 자가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발언을 하다니.

"……네?"

"그야 그렇잖아요? 제가 죽었다면, 제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죽은 자들이 오는 곳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 말하곤 환희 미소를 짓는 피오.

그 또한 스승답다면 스승답겠지만, 셰인은 거기에 마냥 반가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일라이, 그 녀석이 기어코 나를 죽여 버렸구나.'

재회하자마자 그리웠던 스승님과도 재회하게 해주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 * *

물론 카일은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자.

신을 부정하지 않는 건 신성력이란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영혼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사후세계까진 긍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그저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을 꿈을 통해 만나게 된 것뿐이라고…….

그저 그렇게 납득을 하며 테이블에 앉으며 그녀가 내어준 잔을 붙잡을 뿐.

"드세요. 약주에요."

그래, 어차피 꿈이지 않은가?

지금 느끼는 혼란도 그저 갑작스러워서일 뿐.

그렇게 흘려 넘기려던 카일이 잔을 쥐려다, 그만 손을 미끄러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컵이 깨지는 소리.

피오가 깜짝 놀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저런,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조금 긴장을 하다 그만……."

"후후, 카일답지 않은 실수네요. 예전 같았으면 컵이 떨어지더라도 바로 잡아챘을 텐데."

스승의 머릿속에서의 자신은 초인이라도 되는 것일까?

물론 하려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지금은 무리하다 여길 일이었다.

"일단 제가 치울게요."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당황하며 일어서기 무섭게 깨진 컵에 손가락을 향하는 피오.

"사라져라, 얍!"

그 순간 파편과 약주의 얼룩이 샥! 하고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흙바닥만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멍하니 피오를 돌아보는 카일.

피오가 어깨를 으쓱이곤 후후 웃음을 지었다.

"여긴 사후세계니까요.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 꿈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긴장이 누그러지는 가운데, 피오가 새로운 잔에 약주를 담아 카일에게 내어주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 서린 달달하고, 그리운 향기.

환생 이후 마셔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쪽이 좀 더 향토적인 느낌이 나고 있었다.

"콜라가 입에 맞지 않으신 건가요?"

그래, 본래는 이런 맛이었나.

카일이 우물쭈물하다, 이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좋네요. 따뜻하고."

영지에선 몰래 돌려먹는 간식취급을 받는 물건이지만, 200년 전의 전장에선 냉장효과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코카잎을 달여 마시는 차에 가까웠던 음료.

차게 식힌 것도 어디까지나 소화제의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 첨가한 탄산을 유지시킨 결과물이었다.

"약주니까 따뜻한 게 당연한 거죠."

당연히 그 개량은 두 번째 삶에서 이루어졌으니, 그녀로썬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굳이 당장 떠오르는 게 있다면 개량이 아닌 옛이야기…….

지금 내어준 약주에 얽힌 추억담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생각이 나네요. 처음에 이 약주를 내어주었을 때에 카일이 무척이나 싫어했었죠."

"……제가요?"

"네,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요.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한 셰인에게 진통효과가 있는 약주를 내어주니, 카일은 '달달한 건 여자애나 어린애들이나 먹는 거지!'라고 하며 약주를 치워버리셨죠. 그리고 그 옆에 두었던 약통을 통째로 입에 쏟아버리고……."

"아니……."

"그걸 보고 놀라서 뱉으라고 말하니까 '어차피 난 몸이 튼튼해서 괜찮아!'라고 했다가, 다음 날에 위가 망가져서 엄청 고생했었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위세척을 받고 난 후에 저한테 잘못했다고 엉엉 울어놓고……."

"…좀 참아주세요. 철없던 시절을 들추는 건."

그리고 그때 엉엉 울었던 건 카일이 아니라 피오였다.

제 입에 파이프를 꽂은 채 제발 살아달라며 절규했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의학과 관련된 게 아니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왜곡해서 기억하곤 하지.'

그런 모습도 스승답다면 스승답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기억 속에 있는 자와 같은…….

'……역시 스승님이야.'

그 기억과 눈앞의 환상이 일치되는 것을 느낄수록, 가슴 한구석이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함을 자각할수록 아쉬움 역시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기에…….

"카일."

그런 속내의 혼란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피오가 카일의 이름을 부르고, 그 눈을 지긋이 마주보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둔 듯이.

"고민이 있으시면 털어놓아도 돼요."

그러한 미소를 지으며, 제 제자가 느끼는 고민을 덜어주고자 한다.

그 자상한 물음이 한편으론 어이없게 느껴졌다.

꿈속의 존재가…….

그저 잘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한 자가 상담을 받아주겠다 자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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