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28화 (128/255)

의무병의 환생 128화

'환상을 상대로 상담을…….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결국에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인 것을.

그런 행위에 의미가 있을 리도 없고, 그런 걸 이어가면 스스로만 비참해질 뿐이다.

"가끔은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도 위안이 될 때가 있는 법이죠."

그래, 예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렇기에 종교를 믿는 스승을 못마땅하게 여겨 따지고 드니, 당시의 스승이 지금과 같은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었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곳에선 뭐든 터놓고 말을 해도 돼요."

애초에 현실이 아니잖은가?

자신이 환생자라는 게 알려져도 전혀 곤란할 게 없고, 뭣보다 제 스승이 자신의 고민을 하찮게 여길 리도 없다.

눈앞에 있는 자가 제 기억 속의 스승을 그대로 투영했다면.

'……하지만 역시 무리야.'

차마 그녀에게만은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제 생각과 다를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과거의 존재에게 제 고충을 털어놓으면, 말해선 안 될 것도 털어낼지도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감정을 쏟아내며 과거에 묶이고자 한다면,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상을 이룰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그렇게 개의치 않아 하려는 카일에게 앞서 말하는 피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약주가 든 잔이 쥐어져 있었다.

시선 역시 여전히 그 안에 비춰진 제 얼굴로 향하면서.

"이런 곳이라도……."

허상에 불과한 장소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지 않으셔도 돼요."

눈앞에 있는 자가 진짜 스승이 아니라 해도.

"터놓는 게 때로는 위안이 되어준다고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는 건 그 자체로 자학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제 제자에게 충고를 건넨다.

"미숙함, 무지, 환경, 숙명……. 무엇에서 기인되었다 해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건 상처를 제 손으로 쑤시는 것처럼 두렵고 아픈 일이죠. 하지만 그런 겁 많은 사람이라도, 지나가는 길에 발견한 가로수에 잠깐 정도는 쉬고 가도 되는 거잖아요?"

빛을 가려줄 그늘.

등을 기댈 수 있는 기둥…….

과거 그녀가 종교를 거론할 때면, 언제나 그런 식으로 비유를 들고는 했었다.

그 정도의 의미라면 의사된 자 역시 종교를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며 분쟁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그러니까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당시에는 그런 가르침마저 아니꼽게 느껴졌거늘.

지금에 와선 그런 기억조차 그리움의 한 폭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힘들면 언제라도 기대주세요. 저는 당신이 바란다면 언제나 곁에 있어줄 테니까요."

그런 가르침을 기억하기에 경의를 품고, 다시는 볼 수 없기에 열망마저 품었거늘…….

어찌 이 환상 속의 만남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금 마음이 풀리셨나요?"

그래, 지금의 만남은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비록 자신의 이상을 이뤄줄 수도, 부러진 뼈를 다시 고쳐줄 수도 없지만, 그렇기에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갈 기회를 마련해주는…….

제 삶에 있어 우상(신)이란, 그 정도의 역할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네."

대답과 함께 텐트의 입구에서부터 비쳐오는 광채.

그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진 때, 카일의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향해 내딛어졌다.

"떠날 때가 된 거군요."

그 의지를 읽은 듯 피오가 넌지시 물어왔다.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발걸음이 멈춘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욕구가 마음속에서 술렁이고 있다.

"네, 가야겠죠."

그런 유혹 따위.

이제까지 질리도록 느끼고 견뎌온 것이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내 미련 없이 떠나려는 카일에게 작별을 건네는 피오.

카일은 그 인사에 뭐라 답을 하려다,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빛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카일, 제가 없는 동안 제 뒤를 부탁드릴게요.'

더 이상 이루어질 리 없다고 여겼던 재회가 환상 속에서야 다시 이루어지다니.

참으로 야속한 일이 아닌가?

* * *

-끼우우…….

가라앉았던 정신이 떠오른 순간 들려오는 울음소리.

상당히 익숙한…….

거진 반년을 함께해 온 파트너의 울음소리였다.

"…콘?"

-카앙!

돌아보기 무섭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콘.

몸을 짓누르는 발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지만, 콘은 달싹이는 셰인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콘, 잠깐……. 무거우니까 그만해!"

-끼이잉!

예전에는 그래도 품에 안아줄 수 있었지만, 반년 새에 몰라보게 큰 콘은 오히려 셰인이 올라탈 수 있을 정도까지 커진 상태였다.

물론 들고자 하면 못 들 것도 없지만 지금은 허리의 상태가 좋지 않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그렇게 투닥거릴 무렵, 누군가가 텐트 안으로 들어서며 셰인을 향해 말했다.

상당히 반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

겨우 콘을 밀어낸 셰인이 상체를 들어 올리며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이야, 깨어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일라이한테 허리가 부러졌다고 들었을 때엔 심장이 어찌나 철렁거렸는지~"

영지군의 제식 군복을 걸치고 있는 실눈의 남자.

팔에 걸려있는 휘장은 그자가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누구시죠?"

하지만 아는 채 해오는 상대와 달리 셰인이 느낀 건 경계심이었다.

남자가 특유의 눈웃음마저 흩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군의 참모총장인 '존 나저러'입니다만……."

"……존?"

"이런, 설마 했지만 저를 잊어버리신 겁니까? 아무리 다시 본 지 반 년이 넘었다지만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아니, 기억하고 있다.

영지군의 참모총장이자 사령관인 사샤 블레이즈의 부관.

사령관을 상대로도 농담을 서슴지 않으며, 담당한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도 평판이 최악을 달리는가 하면, 비번일 때면 창관을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

그렇게나 사적으론 여러모로 나사빠진 평판을 가지고 있지만, 공적인 부분에서의 능력은 이견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평해지고 있다.

그건 그의 밑에서 작전을 수행해본 셰인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바.

지금 의외라 여긴 건 그의 '성'을 들어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성이 나저러였어요?"

"뭐, 호적상으론 드레이크 씨에게 입양된 몸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셰인 씨께서 참가하셨던 원정대의 책임자가 드레이크 씨였죠?"

드레이크 나저러.

셰인이 신세를 졌던 원정대의 책임자이자, 존 이전에 사령관의 부관노릇을 했던 참모이기도 한 자였다.

그런 그에겐 셰인도 여러모로 감사한 마음을 가진 편.

하지만 설마 존이 그의 성을 이어받았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름이 존 나저러라니. 발음을 조금 쌔게 하면…….'

"존, 도련님의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존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텐트 안으로 난입해왔다.

군복을 입은 그와 달리 시종복을 입고 있는 흉터의 여인.

셰인에겐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도련님!!!"

그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셰인이 황급히 콘을 내던지고,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일라이의 양팔을 붙잡았다.

삐그극.

양 팔의 더불어 상체를 지탱하는 허리의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도련님,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힘조절을 해서……!!"

"지, 지금 이게 힘조절을 한 거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스승님이 그립다지만 이런 식으로 조우하는 건 사양이다.

뒤늦게 일라이의 돌발행동을 감지한 존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자, 일라이. 일단 그만하고…….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보초 서러 가야지."

"하지만 존. 아직 도련님과의 감동의 재회가……."

"감동의 재회를 할 거면 차라리 총을 쏘는 걸 추천할게. 총은 그래도 힘조절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녀의 저력을 몸소 실감한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지속되는 만류에 일라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텐트를 벗어났다.

상당한 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

존이 상급자라는 인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기에 취하는 태도인 듯 보였다.

"일라이와 꽤 친해 보이시네요."

콘을 쓰다듬어주며 존을 돌아보는 셰인.

일라이가 떠나간 자리를 훑어보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같은 시설 출신이고……. 소년병 시절엔 같은 부대에 소속되기도 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종종 들어본 적이 있었지.

존과 일라이는 질리언이 이 영지에 왔을 적 같은 부대에 속해있었다고…….

'역시 일라이는 다시 군대로 복귀한 건가.'

애초에 돈 때문에 가문에 신세를 졌던 몸.

충분한 자금을 모았다면 더 이상 가문에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시설을 맡는다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선 고향에 상주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그곳 출신이었지.'

그 외에도 레온, 메어리, 베르디…….

안면을 트고 지냈던 아이들과 헤어진 지도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

마지막으로 영지를 발을 들인 건 거기에 석 달은 더 추가해야 할까?

'…거진 1년은 밖을 싸돌아다닌 셈이군.'

제 상사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런 시간의 흐름을 느낀 셰인이 스윽 존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전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죠? 지금 여긴 어디고요?"

"의식을 잃은 지는 반나절 정도 됐고, 현재 있는 곳은 영지군이 보통 원정경로로 쓰는 곳입니다. 지금은 사교도의 토벌 임무를 마치고 영지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죠."

이후 존이 얘기해 준 바, 셰인이 찾아왔을 당시엔 수행 중인 작전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라고 하였다.

제5주둔지를 일라이 혼자 지키고 있던 건 나머지 인원들이 잔당소탕에 힘을 썼기 때문.

그 후 복귀를 하려던 때에 일라이가 셰인을 데려왔고, 지금은 그 복귀 과정 중 시간이 늦어 야영을 준비하고 있다 한다.

"야영이라니……. 아직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간 아닙니까?"

밖을 보면 노을이 막 뜨기 시작한 듯 보이거늘.

그에 대해 물으니, 존이 면목이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이전 작전을 뛰면서 부상자들이 많이 발생했거든요. 참여했던 대원 중 절반 이상이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가 않은 상태죠."

그 정도로 부상자가 많다면 일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터.

치유부대에게 맡긴다면 안전히 복귀시킬 수 있겠지만, 문제는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벽외지역'이란 것이다.

"공교롭게도 성직자들은 벽외활동에는 지장이 있으니 부대엔 합류되지 않은 상태고……."

"즉, 복귀할 때까진 부상자들을 계속 방치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도 아주 최악이라고까지 할 상황은 아닙니다. 일단 영지에 현 상황을 적어낸 전보를 보냈으니, 내일 아침 즈음엔 저희 부대를 호위하기 위한 증원군이 합류하게 되겠죠."

딱 하루만 버티면.

그렇게 본다면 아주 절망적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본래 벽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다.

심층부나 이곳이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일수록, 그곳을 사수하고자 하는 이들끼리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는 법이다.

하룻밤뿐이라지만, 제대로 치료도 못 받은 부상자들로 그런 위험에 대처할 수 있을까?

"물론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버틴다면……. 어?"

설명을 듣던 중 돌연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셰인.

존이 제 실눈마저 부릅뜨며 셰인을 만류하였다.

"자, 잠깐.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일라이한테 허리가 아작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실 텐데……."

"이미 다 나았습니다."

욱신거리긴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그는 신성력 보유자.

정식 성직자에겐 못 미칠지언정, 숨통만 유지된다면 어지간한 부상은 하루 만에 회복할 수 있다.

'물론 지금 가진 힘으로는 수백 명을 홀로 담당할 수도 없겠지만…….'

뚜둑.

허리의 뼈를 바로잡은 셰인이 존의 옆을 지나쳐 텐트 밖으로 빠져나갔다.

'외상수술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허리가 꺾였던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당당한 걸음걸이.

외과전공인 셰인에겐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 * *

외과.

물리적인 충격이나 유전적인 요인 등, 몸에 일어난 변형을 수술을 이용해 처리하는 진료과로, 주로 외상에 의한 처치를 도맡는 진료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쟁 중에 발생하는 부상의 99%이상은 외상에 의한 것.

셰인은 그런 외상환자들을 전문으로, 그것도 속도가 중요시되는 최전선에서도 도맡아 처리하던 사람이었다.

"수술을 시작하죠."

그리고 다행히도, 병사들은 셰인이 행하는 처치에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진 않았다.

당장 그가 보급한 구급법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한가득인 마당.

베테랑은 물론 신입들 역시, 셰인이 이제껏 이룩해온 일들에 대한 소식은 종종 들어본 상태다.

'그래, 이 자라면 목숨을 맡겨도 될 것이다.'

현재 영지로 복귀 중인 원정대엔 그러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 수술이라니……."

하지만 신뢰하더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다.

임시로 수술실로 사용하는 텐트의 한가운데, 수술대에 눕혀진 환자의 사지가 두 사람에게 붙들린 채로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치료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치료해야죠."

환자를 앞둔 셰인이 까마귀상의 방독면을 쓰며 환자에게 나아갔다.

만약을 대비해 감염을 막기 위한 물건.

하지만 공간을 밝히는 조명을 등진 순간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그 모습이 굉장히 께름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이 부대엔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물리적으로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 공포는 결코 착각이 아니다.

'마취제 없이' 외과 수술을 한다 하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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