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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30화 (130/255)

의무병의 환생 130화

"…일라이. 너, 그 소년병이랑 4년 정도 지냈지?"

"네, 성에 있었을 때에 종종 대련하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대련을 하고도 버젓이 살아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

맨손으로 사람의 허리를 접어버리고, 그런 무식한 힘을 지니고도 손대중에 재주가 없는 여자가 아닌가?

절제가 중요시되는 대련에서조차도, 그녀와 함께 임한다면 실전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단 것이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리고 그건 일라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

그럼에도 그때의 기회를 거머쥐지 않은 건, 그녀 나름대로 그 소년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야?"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그런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외면할 줄 알아야 하는 거라 생각해요. 의심을 가지는 건, 그 자체로 신뢰의 해로도 이어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관점에 따라선 신자들과 같은 태도라 할 수 있다.

신앙에 있어서 의심이란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니…….

물론 그걸 인간을 향한 감상으로 격하시키는 데엔 무리가 있겠지만, 마음의 진실됨을 강조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은 저와 같은 분을 위해 헌신했고, 그 끝에 누구도 구해내지 못한 분을 구해내신 분이에요. 그걸 가능케 만든 능력을 수상히 여기며 비밀을 파헤치려 하는 건, 그 자체로 스스로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라 생각해요."

그 자체로 자만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존은, 그분이 이 영지에서 지내는 동안 그런 걸 느껴보신 적이 없으신 건가요?"

그런 의미가 내포된 되물음에 단호히 없었다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아무리 좋은 책략을 짜더라도 죽을 사람은 죽으니까.

사람으로써의 마음을 유지할수록 적 역시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직시하고, 그런 싸움 속에서 전우의 죽음을 버텨내지 못하면 다시 전장에 설 수 없게 된다.

전쟁터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만한 각오를 가져야만 하는 장소.

그러한 장소에서, 그 소년은 이제껏 영지를 거쳐간 누구보다도 많은 이들을 살리는 데에 일조해왔다.

그에 대한 감사는 참모의 입장에선 몇 번을 하더라도 모자를 것이다. 분명 그럴 테지만…….

"…그래도 의심해야지. 우리도 이제는 애가 아니니까."

애초에 이단자로서 이 영지에 온 자가 아닌가.

그 마음이 순수하다 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의 악의를 버티지 못하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다.

존은 이제껏 그렇게 반란자로 전향한 이들을 여럿 보았다.

그 마수가 이 방어선에까지 미칠 수도 있으니, 그로썬 저 소년이 간직하는 비밀은 파헤치는 데엔 참모로써의 사명감마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책임을 전우이자 동문인 그녀 역시 이해해주길 바랬거늘…….

"질리언이 그러더군요. 어른이란 많은 것을 책임지는 게 아닌, 서로의 책임을 분담할 줄 아는 자라고."

정작 그녀는 자신의 말을 부정하듯…….

아니,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것을 꼬집듯 말했다.

"존에게는 존의 역할이 있고, 저에게는 저의 역할이 있겠죠. 그리고 도련님에게도……."

이윽고 존에게서 돌아서는 일라이.

하지만 그녀의 입가엔 분명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요, 그분은 올곧은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존과 같은 분들이 가진 책임을 덜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 영지를 벗어나, 더욱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에 필요한 능력은 증명되었고, 그 마음이 선하다는 것 역시 함께 지내며 파악해왔다.

그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확실히 알아보지도 않고 신뢰만을 하다니.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이잖아.'

그것이 어이없다 여겨지는 한편, 마음은 한결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상사도, 동기도, 그리고 군에 속한 많은 이들이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도 그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상황.

그건 그 무리에 속해있는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철컥.

그렇게 화제를 마무리 지으려는 가운데, 일라이가 안경을 벗으며 저격총을 들어올렸다.

"……일라이?"

"존, 경보를 울리세요."

조준경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대물 저격총.

하지만 그 총은 분명히 어딘가를 조준하고 있었다.

언덕의 아래.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거리에서부터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향해.

"습격입니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진지를 향해 나아갔다.

장교는 지휘하고 병사는 싸운다.

이전에 거론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 * *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마물 무리가 이곳에 오고 있다!!"

소식이 전해진 후 주둔구역은 단숨에 소란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었던 병사들은 물론, 부상자들 역시 총기를 목발로 삼아가면서까지 교전준비를 취한다.

그렇게 서서히 구축되어 가는 방어선에 모이는 가운데, 병사들이 한 텐트의 앞에서 투덜거림을 흘려대었다.

"망할, 도착할 때까진 좀 쉴 수 있나 했더니……."

"쉬기는 뭘 쉬겠냐. 애초에 돌아갈 때까지 안심도 못 할 여정이었는데."

"벽 밖으로 나온 게 처음이라면 이해는 해줘야겠지."

"얕잡아보지 마, 이 새끼야. 그냥 이전에 사이비 녀석이 쏜 총에 맞은 부분이 시려서 그런 것뿐이니까."

"야이씨, 이제까지 선생님한테 안 맡기고 뭐 했어!?"

"앞에 기다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보고 어쩌라고!"

사소한 투덜거림이 서로를 향한 투닥거림으로 번지기까지.

그 소란을 감지한 자가 텐트 밖으로 빠져나오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수술을 끝마치고 손에서 피를 털어내는 셰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선생님, 그게 말이죠! 지금 경보가 울렸는데, 이놈은 자기 팔에 박힌 총알도 못 빼냈다고 징징거리는……."

-피잉!

손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소음.

셰인이 휘둘렀던 손을 제 앞으로 가져와, 부상을 호소하는 병사의 앞에서 주먹을 펼쳐주었다.

"…이, 이게 뭐죠?"

"그 쪽 몸에 박혀있던 총알입니다. 봉합은 다 끝내놨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독약 주고 갈게요. 한 병 밖에 없으니까 들이 붓지 마시고, 필요한 사람들이랑 나눠서 쓰세요."

희석된 과산화수소 병을 내어준 후 자리를 벗어나는 셰인.

머지않아 그가 마주한 건 무기창고로 쓰는 텐트 앞에서, 대량의 탄약통과 소총을 꺼내드는 병사들이었다.

복귀 이전에 벌였던 작전이 치열했었던 것일까?

위험을 앞두고 있는 현재, 그들이 가진 장비는 셰인이 보기에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참모님!"

그 현장을 분주히 뛰어다니는 자 중엔 현 부대의 책임자 또한 포함된 상태.

지휘자로써 부대장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그가, 곧 셰인을 마주하며 표정을 굳혔다.

"셰인 씨? 왜 여기에……."

"소란스러우니까 나와 봤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마물 무리가 이곳에 습격해 왔어요."

"규모는요?"

"자세한 숫자는 불명입니다만……. 본래 마물들은 사냥감이 많은 곳에 밀집되는 경향이 큰 편이죠."

적어도 이곳에 있는 병사들을 상회하는 숫자가 모였다는 것.

물론 단순 오합지졸들이야 큰 위험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것도 병력과 무장이 온전히 갖춰졌을 때의 일이다.

"제가 할 일은 없습니까?"

상황이 급박해지면 자신도 전선에 서야 하리라.

그것을 각오했음에도 존은 고개를 저으며 셰인을 만류했다.

"……아뇨, 셰인 씨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힘을 써주세요. 방어선은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앞으로 제대가 멀지 않았잖습니까?"

확실히 셰인이 대단한 전력이긴 하나, 앞으로 2주일 정도가 지나면 제대가 예정된 몸이다.

사령관도 이전 원정이야말로 이 영지에서 치르는 '마지막 임무'라 약조를 한 상태.

여기서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사령관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저나 다른 병사들이야 전장에서 굴러먹는 게 일상이라지만……. 셰인 씨는 이제 곧 성인식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존 역시 개인적으로, 이 소년병이 이 곳에서 잘못되길 바라지 않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을 분담할 줄 안다는 것이기도 하죠. 셰인 씨는 이제까지처럼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전념해주시죠. 셰인 씨만이 가능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대엔 충분히 도움이 되어줄 테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깨를 다독여준 존이 자리를 이탈하였다.

현 부대의 책임자로써 지휘를 위해 빠져나간 것.

셰인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 찌푸려진 눈살을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저 얼라 녀석이 지금 누굴 상대로 훈수를 두는 건지."

정신적인 나이로 치면 두 배는 더 먹은 게 자신이거늘.

하지만 그의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제대를 앞둔 병사란 암묵적으로 모두가 배려해주는 법이니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안위를 걱정해주는 걸 보면……. 나도 이 영지를 벗어날 때가 왔다는 거로군.'

어쩌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사실을 실감하니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졌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제국에서 이뤄야 할 일이 있고, 그건 잊힌 역사를 기억하는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그리고 뭣보다 지금의 그에겐 당장 지켜야 할 자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끼우우…….

셰인의 곁으로 다가오는 콘.

그녀는 주변의 어수선함에 불안함을 느낀 듯, 꼬리마저 축 늘어트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셰인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콘, 괜찮아."

자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믿지 못하는 아이.

그런 만큼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아이 역시 이 변경의 땅에 홀로 남게 될 터이다.

그런 현실이 이후의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위험에 대처하기엔 환자가 너무 많아.'

수술로 할 수 있는 건 망가진 신체를 바로잡아주는 것뿐.

제대로 움직이려면 회복기간을 거칠 필요가 있고, 그 전에 움직이면 오히려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 있을 후퇴작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게 분명할 터.

'하다못해 회복속도를 높일 수만 있다면…….'

셰인이 텐트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아귀에 감도는 신성력에 의한 빛…….

이것을 이용하면 환자들의 회복속도를 지금보다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기껏 해야 한둘을 겨우 치료할 신성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면.

더욱 나아가 그걸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단을 숭배하는 내가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김으로써 신성력을 발휘한다는 게 알려진다면…….'

쉽게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 부상을 입은 이유가, 제국의 전복을 꿈꾸는 사교도 무리와의 사투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이.

-끼우우…….

그에 갈등하는 가운데, 쓰다듬을 받는 콘이 위태로운 울음소리를 흘려대었다.

그에 귀를 기울이는 셰인의 눈에 들어온 건 콘의 뿔.

신성력이 어린 손은 어느샌가 그 뿔을 쓰다듬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계획.

그걸 실현시켜도 되는지에 갈등이 느껴졌지만, 그 시간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뭐가 됐건 일단은 해야 한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리고.

더욱 나아가 자신의 반려가 이 제국에 받아들여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 * *

"또 많이들 죽어나가겠군."

소란스러운 진영을 응시한 병사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이미 나갈 수 있는 이들은 방어선에 밀집된 상태.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거나, 부상을 입어 준비가 더딘 사람들이었다.

옆에 있던 병사가 코웃음을 터트리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죽으면 그걸로 좋지. 순직하면 몇 년은 굴러야 얻을 돈이 가족에게 전해질 텐데."

"이 녀석아. 그걸 위로라고 하냐? 내 딸은 돈보다 아빠 얼굴을 더 좋아한단 말이야."

"그걸 아는 놈이 변경에서 몇 년을 구르고 자빠졌네. 니 딸내미는 벌써 아빠 얼굴도 까먹었겠다."

"망할 놈."

투덜거린 병사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도 잠시.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이 비틀거린 순간, 그 옆에 있던 이가 몸을 부축해 주었다.

"넌 여기서 쉬고 있어."

"쉬고 있긴 개뿔. 손가락은 움직이니까, 방책까지 가면 총 정도는 쏠 수 있어."

"그 다리로 걸어갈 순 있고?"

"누가 이 녀석 좀 부축해 줘!"

서로 지탱을 하면서도 나아가고자 하는 병사들.

하지만 사지로 나아가는 중에도 그들의 사이엔 망설임이 엿보이고 있었다.

"…일 다 끝낸 마당에 죽는 건 좀 억울한데."

"도망칠까?"

"다리가 이 지랄인데 어떻게 도망쳐? 그리고 벽 밖에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다고?"

담배를 문 병사가 희뿌연 연기를 토해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더군다나 여길 버리고 도망치기엔, 우리가 영지에 입은 은혜도 너무 많은 상태잖아."

"……그렇지."

가진 건 몸뚱이뿐이고, 할 줄 아는 건 그 몸뚱이로 힘을 쓰는 것밖에 없는 이들이다.

제국에서 그런 녀석들이 활약할 곳이라곤 취급이 하찮은 노동계층뿐.

하지만 블레이즈는 그런 이들조차도 한 명의 병사로서 여겨주고 있었다.

출신과 능력, 전과에 불문하고, 그들이 가진 목숨의 가치에 국가의 안위와 존엄을 위해서란 명분을 부여해 준다.

그로부터 비롯된 숭고한 사명감은, 그들이 하찮게 여겼던 삶에 결코 적지 않은 가치를 부여해주었다.

그런 마당에 사후 관리까지 철저히 해주는 부대를 지키는 대가가 목숨이라니. 정말로 싼 거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가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내 마음을 정리하며 묵묵히 전장으로 나서길 희망하였다.

전장이란 그런 곳이다.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숭고한 마음을 힘으로 삼아 나아갈 수 있는 장소.

하지만 반대로 그 어떤 명분을 붙여가며 용기를 가져도, 한낱 인간이 전쟁의 파도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상황의 여의치 않으면 독기로.

그렇게 발악을 한 후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런 절망적인 미래가 코앞까지 치달았을 때, 그 용기가 꺾이지 않을 거라 누가 자신해 말할 수 있을까?

"부상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주세요!!"

그런 불길한 미래를 서서히 예감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진영의 한가운데에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닳아빠진 사제복을 걸친 금발의 청년.

그들이 입을 모아 '선생'이라 칭하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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