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33화 (133/255)

의무병의 환생 133화

"……대단한 재주군요."

"제가 할 말입니다."

셰인이 붕대를 채찍삼아 휘둘러 주변의 마물들을 도려내었다.

"전설이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적지 한가운데를 휘저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부끄러운 일화입니다. 그 당시의 일들은 모두 철없이 저지른 것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여유롭게 대답을 한 일라이가 도끼를 휘둘러 길을 열고, 그 틈을 비집고 나아간 셰인이 대형종의 몸에 다시 붕대를 휘감았다.

틈이 보이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재빠른 기습.

하는 거라곤 적을 구속하거나 시선을 끌어 여유를 주는 것뿐이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행동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시켜 주고 있었다.

단 1초.

그것만으로도 공격이 닿는가, 적이 먼저 공격하는가가 결정되는 곳이 전장이란 곳이니까.

'하지만 속도보다도 더 범상치 않은 건, 도련님께서 저의 전력을 고려하며 싸움의 흐름을 조절하고 있다는 거예요.'

일라이는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대중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압도적인 피지컬.

심지어 시력이 극히 떨어지기에, 자칫 근처에 있는 아군을 오인해 공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상 그녀가 참여하는 전장은 오직 '혼자'일 것이 전제된다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이 휘두르는 힘에 피해를 입긴커녕, 오히려 그 무식한 힘의 궤적을 컨트롤 해 공격이 정확히 맞도록 유도하기까지에 이르고 있었다.

'도련님은, 강하시군요.'

소년기 시절에 대련을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함께 등을 맞대며 싸우는 중에도 그것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정작 일라이는 셰인의 속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이 녀석, 아무리 야만족 출신이라도 그렇지 너무 강한 거 아니야?'

혈도개방 5써클.

통상의 경지에서 1단계를 높이며 무리를 하고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이 쪽에서 합을 맞추는 게 고작일 정도다.

애초에 기술이 아닌 감각에만 의존해 싸우는 사람.

사실상 이성을 가진 야수나 다름없는 전투법에 무식하기 그지없는 힘이 더해지니, 통제는커녕 흐름을 유도하는 게 고작일 정도다.

그것만 해도 자칫 잘못하면 이쪽의 몸이 분질러질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

'하지만 대련을 할 때보단 훨씬 나아.'

그래,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아군이니까.

적어도 그녀의 공격에 휘말리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녀보다 든든한 아군은 이 세계에 둘 이상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쿠르릉!!

그 확신을 가진 순간 땅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 이윽고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길쭉한 몸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견제를 위해 몸을 물린 셰인의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뱀…….

아니, 갑피로 뒤덮인 지렁이.

'샌드웜?'

사막지대를 누볐을 때에 본 적이 있는 괴수종…….

아니, 지금 상대하는 건 마물이니, 그런 유전정보를 가지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마물이라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어느 쪽이건 그 두께만 보더라도 어지간한 대형종보다 위험해 보이는 적.

셰인이 일라이의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역할 교대 가능해요?"

"무슨……."

"저 놈 좀 잡아주세요."

상의는 짧을수록 좋은 법.

일라이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샌드웜 형태의 마물에게로 달려나갔다.

그 존재가 땅에 다시 처박아 모습을 숨기기 전, 그 꼬리를 잡아챈 일라이가 온몸에 힘을 실어 넣어 그 몸체를 들어올렸다.

-쿠궁!!

땅에 처박혔던 머리가 당겨지며 허공으로 상승.

이윽고 그 몸이 쭈욱 펼쳐지며 포물선을 그리는 순간, 기울어지는 몸을 내달린 셰인이 머리를 향해 정확히 손날을 내질렀다.

-서걱!!

날카로운 칼날에 정확히 도륙내어지는 몸체.

그대로 양단되어 곤두박질치는 샌드웜을 뒤로한 셰인이, 다시 일라이에게 달려가며 손끝을 치켜세웠다.

-콰득!!

그 손날은 일라이의 배후에 있는 적을.

반대로 그녀의 도끼는 그 옆을 지나쳐 마물의 머리를 갈라내고 있었다.

그런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마저 집어삼키길 반복한다.

그 소리는 주변의 마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꺼지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마주하는 셰인에겐 어느 정도 여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 녀석이랑 견줘도 꿇리지 않을 정도야.'

볼레로 라인하르트.

과거 자신이 상대했던 최후의 적, 그리고 최강이라 불렸던 자.

두 번째 생에 온 후부터 그와 비견되는 강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옆에 있는 자를 만나기 전까진.

'기술과 섬세함만 없을 뿐이지. 전장에서 발휘되는 영향력만은 그 녀석이랑 비등하겠지.'

그런 평가가 내려진 순간 마음 한구석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만약 그와 자신이 같은 진영에 속했고, 서로가 등을 맞대고 싸울 기회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감정을 그와 함께 공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도련님. 사실은 저도 묻고 싶어요.'

반대로 일라이는 그와 반대되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미련이 아닌 의문에서 기인된 감정을.

'도련님께서 어째서 아가씨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으셨던 건지.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와 합을 맞출 정도의 실력과 힘을 기르신 건지…….'

아니, 그런 것보다 때때로….

혹은 언제나 보여온 어른스러운 모습이 어떤 환경을 거쳤기에 나타날 수 있는지.

더욱 나아가 그런 어른스러움으로, 훨씬 나이를 먹은 자신을 이 급박한 상황에 이다지도 잘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 어느 것 하나에 의문 하나 품어본 적이 없다고, 차마 그것을 거짓으로도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진 않네요. 그야, 이렇게 직접 저와 함께 전장에 선 자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일라이 덴.

군인으로서의 그녀는 무척이나 고독한 자였다.

같은 진영에 속했다 한들 그 누구도 그녀와 작전을 뛸 수 없고, 허락되는 건 그저 멀리서 관망하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함께했던 자가 있다고 한다면 소년병 시절.

딱 1년의 시간 동안만 함께 전장을 누볐던 검사뿐이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는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버렸고, 한 지역의 지도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 중대함을 알기에 다시는 같은 위치에 서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그러니 그때의 일은 추억으로만 묻어둬야 한다 생각했지만…….

'……아뇨,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그래, 설령 그 꿈이 현재에 이루어졌다 해도, 그건 결코 미련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그저 추억의 단편일 뿐.

설령 자신의 곁에 함께 싸울 수 있는 자가 있다 해도,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그에 필요한 일을 수행하며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 혹은 그걸 위해 서로 교류를 하며 책임을 공유하는 입장.

지금 제 옆에 있는 자는 그 책임을 함께 떠안은 '동료'일 뿐, 결코 자신의 반려가 될 수 없는 자다.

'그러니 지금은 그 모든 아쉬움을 묻어두겠습니다. 그저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당신과의 재회에 안도하며…….'

그 기쁨을 호승심으로.

'당신과 함께 등을 맞대며 싸울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해준, 그 모든 것에 하늘의 축복이 따르기를 바라겠습니다.'

고양된 정신과 함께 휘둘러진 도끼질에, 또 다른 대형종의 머리가 무참히 도륙 내어졌다.

차차 위험한 녀석들이 군세에서 사라져가는 순간.

그 여유를 빌어 물량을 줄여가는 병사들의 얼굴에, 서서히 환희가 돋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아니, 살아나갈 수 있다.'

꺼지리라 여겼던 불빛이 다시 피어오른 순간.

그것을 자각한 이들의 입에서, 곧 총성보다 거센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좋아! 마물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 계속 수를 줄여나가고 방어선을 정비하면……."

안정적으로 몰려드는 마물들을 모조리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쿠구궁!!

그렇게 확신을 가진 순간 일어나는 거센 전율.

일순간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 병사들이 주춤거리는 가운데, 그들을 지도하고 있던 존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차, 참모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주변에 선 병사의 물음.

전장을 둘러보던 존이 제 품에 손을 집어넣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마물들의 시체가, 땅에 스며들고 있어."

"네? 무슨……."

일일이 답을 해줄 시간은 없다. 곧 품에서 조명탄을 꺼낸 존이, 그것을 전장 한가운데를 향해 발포하였다.

탄착지점에 터져나오는 빛에 보이는 건 마물의 시체…….

아니, 그것이 무더기로 깔려있어야 할 자리가, 서서히 땅 밑으로 말려드는 광경이었다.

해가 저문 밤인데다 마물의 숫자가 많아 눈치 채는 게 늦어버린 것.

그 이상현상이 어떤 이유에서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라이! 당장 셰인 씨를 데리고 이쪽으로 도망쳐!!"

뚝, 거동을 멈춘 일라이.

하지만 존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도 주변에서 벌어진 이변을 눈치 챘기에…….

"도련님, 마물들이 땅을 파고 있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마물들이, 어느 순간부터 언덕을 오르는 것도 포기한 채 디디고 있는 땅을 파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빠르다.

제 발톱을 넘어 살이 짓이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행위가 제 묫자리를 파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이런 미친."

그것을 보고 경기를 느끼는 건 셰인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그건 일라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께름칙함이 아닌, 심층부를 누빈 경험에서 비롯된 것.

"일라이 씨! 당장 여길 벗어나요!!"

-쿠콰가가가강!!!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대지.

그와 동시에 이전까지 그들이 서있던 대지가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에 묻혀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

가까스로 일라이와 함께 언덕을 올라온 셰인이, 존을 포함한 병사들과 함께 그 현장에 드러난 것을 응시하였다.

"뭐, 뭡니까……. 저건."

"……저것도 마물이에요?"

하나같이 의문을 토해내는 병사들.

그렇게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그를 넘어 현실감마저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그 존재는 이제껏 마주해온 대형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우두머리…?"

"아뇨, 마물들 중에 우두머리는 없어요."

한 병사의 의문에 셰인이 바로 부정을 내뱉었다.

실제로 마물은 그저 무리를 짓고, 자신들이 감지한 모든 것을 사냥대상으로 삼을 뿐인 해괴한 존재일 뿐.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엔 모두 불모지가 되어버리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동족을 공격하는 행위'는 삼가고 있다.

기회를 봐서 마물의 시체를 연구해본 셰인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공명.'

마물의 심장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주파는 주변의 마물과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이 반응을 통해 서로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동족임을 인지하게 된다.

반대로 이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 대상은 예외 없이 사냥감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마물이 무수히 뭉쳐 다니고, 살아 있는 존재들을 미친 듯이 쫓아다니는 이유다.

-쿠구궁!!

하지만 그런 공명의 특성이 남다르게 적용되는 개체도 존재하니…….

그 개체가 공명을 일으킬 경우 마물들은 그 개체에게 몰려드는 것도 모자라, 그 존재에게 자발적으로 흡수되기에 이르고 만다.

단일개체가 일으키는 공명파가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그 정도로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는 '초대형종'이 인근에 존재할 경우.

-콰아아아!!!

그래, 지금 이 순간 땅에서부터 치솟는 거대한 존재는, 셰인이 심층부에서만 보았던 '대괴수'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바다를 누볐을 때에 보았던 크라켄…….

혹은 그보다도 더 높은 레벨로 분류되는 존재가.

-키요오아아아아아!!!

일대를 뒤덮는 거대한 입.

그것이 자신이 빨아들인 시체와 토사들을 삼키며, 언덕지대 위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저 머리와 목만이 겨우 드러났음에도 달빛이 일부 가려진 것이다.

"일라이 씨.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그런 터무니없는 크기를 앞둔 셰인이, 제 옆에 서있는 여인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녀석,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리입니다."

일라이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당장 드러난 것만 해도 겨우 '머리'수준인 것을. 그 땅에 묻혀있는 몸의 크기는 분명 터무니없으리라.

그런 녀석을 단신으로 상대하라니. 차라리 블레이즈의 성벽을 홀몸으로 부수는 것을 택하는 게 나을 정도다.

"도련님께선, 무언가 방법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저도 무리입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대인전문이라."

-쿠구궁!!

이윽고 머리와 목이 완전히 빠져나오고, 그 밑에 자리한 몸체의 돌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 몸이 그림자로 완전히 가려진 때, 셰인이 안색을 창백히 물들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 이상은 넌센스예요."

'드래곤.'

셰인이 누볐던 심층부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신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초월적인 존재.

-끼야오아아아아아아!!!!

그 존재를 투영한 마물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순간 이전까지 다져졌던 전의가 모조리 상실되고 말았다.

아직 모습이 전부 드러나지 않은…….

기껏 해봐야 상반신의 일부만 겨우 땅밖으로 기어 나온 수준의 적은, 그만한 공포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 저거 드래곤이야!?"

"아니, 형태만 그냥 무식하게 큰 도마뱀이지, 이제껏 상대한 마물들이랑 다를 게 없어!"

"다를 게 없긴 존나게 크잖아!"

"그러니까 무식하게 크다고 했잖아 이 병신아!"

"그, 그럼 저거 뭐라고 불러야 돼? 마물인데 드래곤이니까 마룡이라 불러야 하나?"

"그냥 마룡이라 퉁치고 움직이기나 해!!"

"뭘 어떻게 하라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재액에 아비규환이 된 진영.

지상으로 빠져나오는 마룡의 시선은 그런 병사들에게로 향해지고 있었다.

아직 몸이 다 빠져나오지 않아 거동에 지장이 있는 상태임에도…….

그런 상황에 사냥감들을 노리고자 취한 것은 목에 힘을 주고, 그대로 입을 벌려 무언가를 쏘아 보내는 것이었다.

-콰아아!!

폭음과 함께 쏘아진 것은 거대한 살덩어리.

그 입을 통해 흡수했다 추정이 되는, 마물이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투포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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