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34화
-쿠궁, 콰작!!
추락한 지점에 있는 모든 게 으스러진다.
다행히 떨어진 건 한 발, 하지만 그렇게 추락한 포탄은 분해되기 무섭게 꿈틀거리며 주변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쿠르르, 끼으으…….
신음을 흘리며 주변으로 나아가는 뭉개진 마물들.
미처 마룡에게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마물들이, 겨우 자아와 본능을 유지하며 인근의 병사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지, 진영을 유지해야……."
"모두 진영 상관 말고 도망쳐!! 일단 목숨부터 부지해라!!"
한 병사의 머뭇거림에 득달같이 이어지는 외침.
참모인 존이 증폭석으로, 자신의 지시를 병사 전체가 들리도록 퍼트린 것이다.
"이제껏 몰려왔던 마물들은 현재 저 거대한 괴수에게 모두 흡수된 상태다! 이제 추적해올 마물들도 얼마 없을 테니 산개하더라도 문제는 없어!"
"하, 하지만……."
"반복한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건 토벌이나 방어전이 아닌 재해로 여겨라! 최소한의 장비를 제외한 모든 것을 여기에 두고 도주한다! 신속히 준비해 어서!!"
방어를 포기하고 도주를 택한다.
다행히도 저 괴물이 나타난 후부턴 습격을 해오던 마물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
도망칠 여유를 확보할 수 있지만, 그것도 겨우 잠시에 불과했다.
-콰아아아!!
지금도 마룡은 입 밖으로 덩어리를 쏘며 진영을 어지럽히고 있다.
추락지점에서 분열되는 마물들도 망가진 몸으로나마 행동력을 발휘하는 상태.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본진 한가운데에 추락한 만큼, 숫자가 늘어날수록 도주도 여의치 않아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도 잡아두기에 불과하다는 거야.'
곧 저 마물이 지상으로 빠져나오면 추적을 시작할 것이다.
상상도 못 할 거대한 몸체로 직접 거리를 좁혀온다니……. 애초에 도주 자체가 허락될 리가 없다.
일부 병력을 미끼로 쓴다면 모를까.
'저런 놈을 상대로 이 부상자들을 전부 데리고 가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겠지.'
구호를 주요 임무로 삼는 셰인조차도, 지금 상황에선 어찌할지에 대해 혼선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익숙히 여겨온 전쟁이란 인간과 인간의 사투고, 그것을 전문으로 해온 자가 일대를 쓸어버릴 재해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 무기력한 상황에 허락되는 건 그저 구세주가 찾아오길 기도하는 것뿐.
"참모님, 저기……."
그리고 어쩌면, 지금 제 눈에 보이는 빛이 그 구원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한 병사의 기대가 어린 목소리와 함께, 존을 포함한 이들의 이목이 일제히 한 곳에 집중되었다.
저 멀리에서부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빛.
이후 하늘에서 폭발하며 불꽃을 내는 그것은, 영지에서 시호를 보낼 때에 사용하는 '신호탄'이었다.
특히나 어두운 현장에선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소통수단.
"저 신호는……."
"선발대! 영지에서 보낸 증원군의 선발대가 도착한 겁니다!"
선발대.
무리를 지어 움직일 때와 달리, 소수의 정예로 이루어진 소대를 이용해 서로의 소식을 빠르게 전할 때에 사용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희망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물량전도, 대규모의 괴수를 토벌하는 것도 소수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선발대라고? 본대도 아니고 선발대면 몇 명 되지도 않을 거 아니야!"
"그것만 가지고 저 괴물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쿠궁!!
이윽고 몸체의 반이 땅 위로 치솟아 오르며, 그들이 자리한 언덕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층현상과 함께 격변하는 지형.
도주조차 점차 여의치 않아지는 가운데, 부상자들을 이끄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더욱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의 빛은 결코 희망이 될 수 없다. 몇 명이 오건 결국 희생자만 늘어날 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망원경으로 선발대의 위치를 응시하는 존의 얼굴에 당혹이 그려졌다.
"저 인장은……?"
가면과 망토를 두른 한 검사가 거대한 늑대에 올라탄 채, 황야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조명탄을 쐈다 추정되는 자.
존이 눈여겨본 것은 그자의 가면에 새겨져 있는 인장이었다.
'황도군의 인장?'
황도군.
제국의 지배자인 '황족'을 섬기는 병력들로, 그 전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평해진다.
소대 단위라 해도 한 부대에 버금가는 전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정예병들.
그에 소속되어 있는 병사 중 하나가, 현재 지상으로 솟구쳐오르는 마룡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저 자라면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광경을 응시하는 건 존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떨어진 망원경을 통해 그곳을 주시하던 셰인.
그는 인명구출이란 사명마저 잊은 채, 드래곤에게로 다가서는 한 병사에게 희망을 가지려 하고 있었다.
존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 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황도군은 제국 최고라 불리는 강자들.
그중 상위권에 올라있는 자라면, 어쩌면 저 괴물을 쓰러트릴 수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단 말이죠."
"잠깐, 또 뭘 하시려는 거예요?"
"뭐긴요. 다 죽을 판이니 이 쪽도 목숨을 걸려는 거죠."
정보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을 묻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이내 짧게 판단을 마친 셰인이 제 곁에 서 있는 일라이를 돌아보았다.
"일라이 씨,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무엇을……."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는 일라이.
셰인이 곧 제 목에 손가락을 쑤시며 외쳤다.
"저 좀 안아주세요."
"……네?"
일라이가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다곤 하나 이제 와서 감동의 재회를 마저 하려하다니.
설마 모든 걸 포기한 것일까?
* * *
-쿠르릉!!
전율하는 대지와 솟구치는 토사.
괴물의 몸체가 반 이상 드러난 현재, 뒤집어진 땅은 단층이 훤히 보일 정도로 심히 어그러져 있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마경이란 이런 현상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그 반대다.
과거 전쟁에서 승리한 제국은, 제국에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벽 밖으로 내쫓아버렸으니까.
'마경은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이 한데 뭉쳐졌기에 마경이라 불리는 것…….'
그저 책으로, 누군가의 말로만 들었던 역사의 결과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늑대와 이어진 고삐를 틀어쥔 손에 더욱이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선조님께서 저지른 업보 중 하나라는 거겠지.'
그저 피를 이은 것만으로 죄의식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에 불과한 시간에 불과했다.
그가 이곳에 온 건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지, 결코 저지른 적도 없는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할 수 있을까?'
스륵.
망토가 펄럭이며 드러난 허리춤의 검.
그 손잡이에 손을 올리길 망설이는 그가, 제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해야 한다.'
그걸 위해 일행의 만류를 무릅쓰고 온 게 아니었던가?
그 걱정을 기우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무모한 작전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저 거대한 괴수 역시 그저 넘어야 할 시련 중 하나임을 증명함으로써.
"프레이즈. 내가 뛰어오르면 물러나도록 해."
-아우우!!
하울링을 지르며 준비를 취하는 검은 늑대.
그 위에 타고 있던 가면의 검사가 상체를 들어올리고, 이윽고 땅 위로 기어오르는 드래곤을 향해 도약을 가했다.
파앙! 물리력의 팽창에 의한 경쾌한 도약.
그와 함께 비늘에 디딘 발이 미끄러지는 듯 했지만, 발끝의 마찰력을 조절함으로써 가까스로 등골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쿠구궁!!
그 순간 몸이 빠져나오는 속도가 가속화되며 시야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자신이 타고 온 늑대가 벌레처럼 작아 보일 정도.
그 속도가 터무니없기에, 이 마룡의 본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자칫 성벽에 도달하기라도 하면 사상자가 더 늘어날 거야.'
처리한다면 행동에 제약이 있는 지금이 적기다.
그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해짐을 느낀 검사가, 곧 마룡의 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발을 디딘 자리가 들썩이는 건 그 순간.
-쿠과각!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이 찢어지며 무언가가 솟구쳐 오른다.
그 생김새는 마치 벌레와 같으나, 그 규모는 인간의 키와 두께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에 달려 있는 원통형의 입은, 자신의 감지 범위에 있는 자를 추적하는 즉시 그대로 삼켜버리리라.
'이 마룡이 침입자를 감지한 건……. 아니겠지.'
애초에 마물은 지성이란 게 없고, 전략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회충처럼 몸에 기생하고 있던 이들이 생명을 감지하고 빠져나온 것뿐.
뭐가 됐건 지금은 그저 방해물에 불과할 뿐이다.
'사용할까?'
가면의 검사가 허리춤에 놓인 검에 손을 올렸다.
그것은 그가 속한 집단의 자부심이자 신뢰의 증거.
이 제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이라고 한다면, 분명 제 허리춤에 채워진 검일 게 분명하다.
그런 검을 눈앞에 있는 '잔챙이'들을 상대로 사용한다…….
'……아니, 지금은 힘을 아껴야 해.'
전력을 쏟아도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러니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그런 필사의 마음가짐으로 작전에 임해야만 한다.
-키샤오아아!!
괴성을 지르며 긴 몸을 뻗어오는 괴물들.
땅에 뿌리가 박힌 상태임에도, 그 몸체가 워낙에 길어 추적을 해오는 데엔 거리낌이 없었다.
가면의 검사는 그 추적을 뿌리치고자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등골에서부터 수직으로 꺾여가는 측면으로.
이윽고 몸이 추락하기 전 손끝으로 벽을 디디자, 마나가 발휘하는 물리력이 그 몸체를 자리에 고정시켰다.
-키샤오아아아!!!
그런 와중에도 추적은 끊어지질 않는다.
몸체에 뿌리를 박은 회충들에게 있어선 바닥이건 벽이건 개의치 않는 법.
하지만 그건 가면의 검사 역시 마찬가지다.
-키잉!
손에서 두 다리로.
그렇게 마나를 집중시킨 검사가, 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든 채로 마룡의 측면을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조금이라도 균형이 무너지면 그걸로 추락.
더군다나 중력에 의해 도약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사방에선 회충들이 몰려들었지만, 사이로 나아가는 발걸음엔 일말의 망설임 채 존재하지 않았다.
-휘리릭, 서걱!!
회피가 필요하다면 도약이 아닌 회전과 흐름에.
측면의 벽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고, 그 순간 발생하는 빈틈을 노려 단검을 휘두른다.
검을 타고 흐르는 마나는 그 자체로 도신을 가진 칼날이 되는 법.
휘두를 수만 있다면 한낱 거대할 뿐인 벌레들의 목은 충분히 도려낼 수 있다.
'호흡을 흩트리지 마.'
숨을 다잡고, 다시 내뱉으며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집중, 또 집중해.'
칼질이 반복될수록 망설임은 사라지고, 도리어 박차가 가해지며 매서움이 채워져 간다.
위태로운 벽타기가 차차 질주로.
그 몸에 맞닿은 마물들은 맥 없이 잘려나간 채, 그대로 땅을 향해 추락해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비우는 거야.'
그 끝에 겨우 벽을 타고 올라 등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한 검사.
발걸음은 어느덧 몸체와 등을 넘어, 위로 뻗어지는 길쭉한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노려야 할 곳은 목.'
-키요아아아아!!!
다시금 터져나오는 비명에 전율이 이는 가운데, 그것을 견디고 나아간 검사가 이윽고 목표로 한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장소.
주변의 경치 역시 이곳에선 훤히 보이고 있었다.
거대한 마룡과 공명하며 몸에 흡수되길 자처하는 마물들, 그들과 달리 미처 흡수되지 못하고 방치된 시체.
그리고 이제는 점처럼 자그맣게 변해 버린 천에 가까운 사람들…….
'이 거대한 존재에겐, 인간이란 이렇게나 하찮게 보이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하는 건 인간의 힘으로 재해를 막아내는 것.
-스릉.
때가 왔다.
이윽고 단검을 거둔 검사가, 제 허리춤에 메어둔 보검을 뽑으며 그 끝을 제 머리 위까지 치켜세웠다.
'생명검-클라우디아.'
제국의 초대 황후이자, 최초의 성녀라 불렸던 이의 피를 머금어 만들어진 검.
비록 이 손에 쥐어진 것은 그 복제품에 불과하지만, 원판을 제외한 그 어떤 검보다 큰 가치가 있다는 데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검의 성능 중 하나는 사용자의 의지에 기인하여 그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것.
-스르릉!!!
장검은 대검의 형태로.
자신이 들어 올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성장을 거듭한다.
그렇게 거대해진 검에 마나를 모으고, 양 손에 최대한 힘을 실어 넣고 휘두른다.
그 참격이야 말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
-쿠웅!!!
일격을 버티지 못한 마룡의 고개가 일순간 낮아지고, 목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는 살덩어리가 턱에 씹혀버렸다.
하지만 여파는 거기에서 끝.
'단단해.'
정작 공격을 가한 지점에는 미약한 균열만이 일어났을 뿐.
도리어 대검을 휘두른 양팔이 저려오고 손가죽이 찢어질 정도다.
'이제껏 베어온 그 무엇보다도…….'
진짜 드래곤도 아니다.
그저 그와 유사하게 생겼을 뿐인 살덩어리의 집합체.
우세를 점하는 것은 그저 크기뿐이라 여기고, 그러기를 바랬거늘…….
-끼야오아아아아아!!
정작 지금의 비명은 고통이 아닌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물이 그런 감정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뿜어져나가는 살덩어리의 양이 늘어났기에. 그로 인해 주변이 초토화되어, 이윽고 그들이 상정해 두던 도주경로마저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할, 수 없었던 건가……?'
여기서 더 휘두른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질까.
그 무기력함에 어깨가 축 늘어지는 가운데, 문득 온몸의 신경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전신이 경고를 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을 향해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고.
'무슨…….'
이전과 같은 내장형 마물들의 습격인가?
아니, 이건 사람의 기척이다.
"그렇게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하면 쓰나?"
그리고 그는 아마도 적이 아니리라.
이 거대한 괴수의 앞에선 모든 인간은 평등할 수밖에 없을 테니.
"벨 거면 제대로 보고 베어야지."
-끼긱!
목소리의 뒤를 이은 착지음.
멀리서부터 날아든 남자가 미끄러지듯 마룡의 목에 자리를 잡고, 제 옆에 도달하기 무섭게 자신의 왼손을 힘껏 들어올렸다.
그저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려올 정도로, 그렇게나 막대한 마나의 파장을 제 손에 집약시키면서.
"무슨……."
"딱 한 번만 보여줄 테니까 잘 봐둬라."
오롯이 두 개의 손가락만을 위로 치켜세운 채.
"이게 '보고 벤다'는 거니까."
셰인 골드리안.
그의 전력이 어린 두 손가락이, 이윽고 마룡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