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37화 (137/255)

의무병의 환생 137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본능…….

하지만 마일즈의 추측과 달리, 막상 그녀는 그 자를 마주했음에도 반가움 하나 표출하지 못했었다.

단순히 쑥스럽다기엔 분위기 역시 심히 굳어진 상태.

정작 연심을 품은 자라 여긴 자를 마주했을 때, 그녀가 보인 태도는 이제껏 가문을 노리고 접근해온 도전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뭐,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연마해온 검이란,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보물이 되어 주리라.

그렇기에 태자는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여겼다.

황제 된 자가 가치 있는 보물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선 안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마일즈. 네가 그녀를 곁에 두었을 때 보았던 모습은 어땠지? 그녀는 이 땅에 있는 매 순간을 설레어 했나? 아니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나?"

"그건……."

"그녀가 보였던 모습이 정녕, 이 땅에서 마주하게 될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보이는 태도라고 생각했나?"

대답을 머뭇거리는 마일즈.

확실히 어두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당시엔 그저 주변 환경에 두려움을 느껴서라고만 여겼다.

이 땅에는 죽음이 만연하고, 가문의 규율상 이곳에선 그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때 마룡에게 먼저 달려나갔던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제국 내에서 온갖 수라장을 겪어온 자신조차도 주춤거렸던 그 적을 향해.

그런 용맹함을 보인 그녀가 보이는 어두운 모습이, 그저 주변 환경에 겁을 먹어서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내 눈엔 불안함으로 보였다."

태자는 그녀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 삶은 언제나 욕망에 충실해왔고,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타인의 욕망을 읽어내는 데에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으니.

"그래, 누군가와 맺어지고 싶다는……. 이 땅에 발을 들인 후부터, 그녀에겐 그런 욕망이 보이질 않은 거다."

그 추측을 입에 담은 태자가 자신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벅차게 뛰어오르는 심장의 박동.

누군가는 그것을 두려움이라 말하고 있지만, 태자는 스스로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부하는 자였다.

'이것은 분명 사랑이다.'

타인을 향해 느끼는 가장 정열적인 감정.

그 감정을 깨달은 순간부터, 태자는 타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이들에게 유대감마저 느끼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 유대감이 그녀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정녕 그녀가 누군가를 위해 이 땅에 왔다면, 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 대체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첫 만남은 고작 해봐야 10살……. 그 후로 4년 동안 함께 지냈을 뿐이지. 스스로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할 시기에, 자신을 구해준 자를 제 부모 이상으로 특별히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태자님, 그건……."

"그 특별한 감정을 다른 무언가로 착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거겠지."

뒤늦게 무언가를 짐작한 마일즈에게, 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이어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 어쩌면 그녀는 이 영지에 온 순간 그런 현실을 자각한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그렇기에 이 변방의 땅까지 와놓고도, 그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런 깨달음에 이제껏 일궈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에 뻗어질 손길을……. 과연 누가 쉽게 거부할 수 있겠느냐?"

기대가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입가에 그려지는 희미한 미소.

언제나 호쾌함을 잃지 않던 그는, 이 순간만은 자신의 유열을 잠잠히 다스리고 있었다.

* * *

-덜컹.

뻑뻑하게 굳어진 문을 열기 무섭게 풍겨오는 먼지.

방 내부는 얼마간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고, 산발한 서류더미 속에는 먼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애초에 환기조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방이니 당연할까.

"이 인간은, 떠날 거면 좀 정리는 하고 갈 것이지."

거진 1년의 시간 후.

그 시간 끝에 도착한 연구실은 무척이나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한때 누군가와 함께 썼던 곳이었거늘, 정작 돌아왔을 때 그 동거인은 막상 이 영지를 벗어난 지 오래인 상태였다.

'케이미 씨 말인가요? 그녀라면 얼마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듯 보였는데…….'

케이미 케미스트리.

자신이 이 영지에 있는 동안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연구자이자 동거인.

그리고 자신에게 연구를 맡긴 파라켈쿠스의 제자였던 사람.

그녀라면 스승의 연구를 이어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정작 돌아왔을 때에 그녀는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고향으로 떠나버린 상태였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거겠지.'

매일 같이 누군가가 죽어나가고, 보충병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곳이다.

그런 분위기에 못 이긴 자들이 떠나버리는 것 역시 매우 흔한 일.

같은 군인으로써 이해 못 할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곧 떠나야 할 몸이지.'

사령관에게도 제대식은 사령실에서 조용히 치르고 떠나겠다고 한 참.

오늘 밤이 지나고 난 후, 사려오간에게 예의상의 인사를 하고 나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영지를 조용히 벗어날 예정이었다.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그 아이가 이 영지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일단 정리부터 하고 생각할까."

뭐가 됐건 뒤처리는 다 하고 가야 찜찜함이 덜한 법.

셰인은 전 동거인이 방치해놓은 방을 홀로 차례차례 정리해갔다.

상당수는 화약에 관한 자료, 일부는 상비약으로 쓸 수 있는 일반의약품, 그리고 콜라와 같은 약제작의 부산물 등등…….

원정을 다닌 1년을 제외한, 4년 동안 거쳐온 노력의 성과가 이 방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이룩한 일들이야.'

이단자로써 재판을 받고, 죄수의 신분으로 왔음에도 끝내 '선생'이라는 존경어린 칭호로 불리기까지 했다.

죄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성과.

그 모든 것은 셰인 스스로에겐 크나큰 자부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중 대다수는 이 영지에 두고 가야겠지.'

교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한들,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의학'에 두고 있는 상태니까.

물론 구급법 등 허락된 것들도 있긴 하지만, 그가 이 영지에서 행한 것들 중 치자면 구급법은 사소한 축에 드는 것이었다.

"역시 남아있나."

제 방 서랍의 하단부.

거진 1년간 방치된 부분을 열쇠를 이용해 열자, 겉이 먼지로 뒤덮인 서류더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천식약의 제조법.'

케이미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개인적인 연구였고, 심층부를 누볐을 때에도 이 내용을 베이스로 그 내용을 차차 보강해왔었다.

'이걸 전해주면…….'

진정 이걸 전해줄 수만 있다면.

'그 가문과는 더 이상 마주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라인하르트 공작가.

자신과 그 가문에 얽힌 인연은 이것으로 끝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전과자에 이단자.

그리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가문에서도 제명을 당하게 될 추방자…….

권력은커녕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녀석을, 명망 있는 공작가에서 친히 받아들여줄 수 있을 리는 만무할 테니까.

'셰인. 저에게 도전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설령 그 가문의 후계자가, 이 변방의 땅까지 찾아와 자신에게 도전했다 할지라도.

아니, 자신에게 도전을 신청하라고 제안을 했다 한들…….

'가벼운 대련을 요청한 건 아니겠지.'

변경살이를 오래 해왔지만, 셰인도 바깥 사정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니다.

이제껏 치료해온 환자들로부터도 여러 정보를 받았고, 그 중에는 라인하르트 가문에 얽힌 이야기도 존재했으니까.

'라인하르트 가문의 계승자는 현 계승권자와의 결투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성인식을 치르기 이전이라면 재산도,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서 승리를 거두기만 하면 공작가를 거머쥘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싸움에서 단 한 번의 패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천식이라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오직 혼자 만의 힘으로 그만한 성과를 올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나마 자신이 했던 치유에 의미를 부여해주다니.

약을 만들었던 그에겐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그 결투의 연장선을 자신에게 제안했는지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내일 훈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저 영지로 복귀했던 어제 그런 말만을 툭 들었을 뿐.

그 후로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고 헤어졌기에, 진정 그녀의 속내가 어떤지를 떠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단순히 옛 인연을 빌어 기회를 제공해준 것뿐인지. 아니면 자신이 도전을 함으로써 이루고자하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그 외의 이유가 있는지…….

"……어렵네. 이맘때의 아이들은."

툭.

이윽고 정리를 모두 마친 후, 책상에 몸을 앉힌 셰인이 머리를 기대며 상념에 잠겨갔다.

떠오른 것은 세실…….

그리고 그녀와 동년배인 소녀들의 이야기.

'셰인.'

'그렇게 불러주면, 너도 이름으로 불러줄 거잖아.'

그 섬에 남겨졌던 한 소녀는 자신과 적대하는 세력에 속했음에도, 언제나 자신의 개심을 바라며 늘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었다.

'딱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또 다른 소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해준 이에게 원망을 토로하면서도, 이후에 있을 만남을 축복하며 그 아쉬움을 삭혀갔다.

그런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품은 지, 그것도 모를 만큼 그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렇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의…….

양측 모두 거쳐온 소년기 사이의 공백은 반 백 년에 약간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났다.

과거로부터 답을 찾기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중 반절 이상을 전쟁터에서, 그리고 그보다도 더 가혹한 나라에서 보내왔기에 더욱이.

"아버지가 나를 너무 잘생기게 낳아서 그런가."

귀족 태생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민을 할 리는 없었을 텐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 코웃음을 터트린 셰인이, 이내 피로에 젖은 두 눈을 차차 감아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잘 지내시려나.'

자신에게 두 번째 생을 선사해주었던 사람.

그 사람의 얼굴이 가물가물 떠오르다, 끝내 몰려드는 졸음과 함께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그러진 환상에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나타난 것은…….

* * *

-후웅.

어느 순간 들려오는 바람소리.

그와 함께 거친 모래의 조각이 피부를 쓸어내리는 감각이 덮쳐왔다.

칙칙한 색의 하늘과 그 밑에 펼쳐진 처참한 풍경…….

'또 그 꿈인가.'

한창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 같지만 사람은커녕 시체 한 구,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질감도 두 번째가 되니 낯익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이곳을 누비다보면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겠지.

이 꿈이 이전에 꾸었던 것의 연장선이라면.

'……스승님.'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한 모래 봉우리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여인.

그 위에 세워진 검은 마치 묘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셰인이 그녀의 배후에 다가서며 조용히 물었다.

"누구의 무덤인가요?"

"글쎄요, 누가 묻혀 있는 걸까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 기도를 드리는 것인가.

이내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후드를 벗으며 셰인을 마주하였다.

"공교롭게도 저는 장의사가 아니기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할 순 없네요."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에서 비롯된 창백한 안색과 붉은 홍채.

그런 병약한 모습으로나마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그녀가, 생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의사는 필연적으로 많은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그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버텨내지 못할 거라누누이 강조했던 그 말을…….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카일.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 건가요?"

피오 아스클레.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익숙한 목소리로 자신을 친절히 맞이해주고 있었다.

"…당신."

아니, 정확히는…….

"정체가 뭐야?"

그녀와 똑같이 생긴 존재가,

꿈이라는 공간을 빌려서.

"……."

말없이 셰인을 응시하는 피오.

거기에 경악 같은 감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질문을 하는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역시 눈치 채셨군요."

뒤늦게나마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을 뿐.

그 발언을 통해 확신은 이윽고 사실이 되었다.

"자각몽을 처음 꿔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꿈을 꿀 때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언제나 '꿈'이라고 확실히 인지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건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하지 않은가?

거친 바닥을 밟는 감촉도,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도.

심지어 제 앞에 있는 사람조차 살아있는 것 마냥, 그 호흡마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셰인으로 하여금 이 장소가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아니, 꿈이라는 공간을 빌려 만든 현실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제 정체가 뭐냐고 물으셨죠?"

이전의 질문을 거론한 그녀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피오예요. 피오 아스클레."

"그런 걸 묻는……."

"당신의 은사이자 스승. 그리고 끝내 당신의 우상이 된 자."

이름의 뒤를 잇는 소개에 카일의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은사나 스승은 몰라도 우상이라니…….

그런 건 스스로를 소개할 때에 쓰는 평가가 아니다.

그 자가 오만한 게 아니라면 타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나 표출하는 단어.

그럼에도 그걸 본인이 태연히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저는, 세간에서 '신'이라 부르는 자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뭐?"

저도 모르게 벙찐 표정을 짓는 카일.

그렇게나 눈앞에 있는 자가 하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녀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말해도 어이가 없는 것 같아서……. 후후, 신이라니. 이런 꿈속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 저를 어떻게 전능하다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제 말을 정정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눈은 여전히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그 또한 자신의 스승과 같은 모습.

하지만 같은 것은 결코 겉모습만이라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지켜보기만 한다는 점에선 신과 같다고 할 수 있겠죠."

목소리도, 분위기도.

그리고 얼핏 느껴지는 속내 역시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과 똑같기 그지없으니.

"……조금 걸으면서 얘기를 나눠볼까요?"

그 익숙함에서 비롯된 향수에 경계심마저 죽어가거늘.

어찌 지금의 제안을 거절하려 들 수 있겠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