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38화
칙칙한 하늘 아래,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진 황야. 그리고 녹슨 무기가 세워 만들어진 무수한 묫자리…….
언덕을 넘거나 경사를 내려가도 풍경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피오의 입이 열린 건, 그런 고요함에 처참함이 묻어졌을 무렵이었다.
"카일, 당신도 알다시피,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기 전엔 각 나라에선 저마다 다른 신들을 섬겨왔어요."
그들 모두가 이단으로 취급되는 자.
카일은 변경에서 활동하던 중, 그런 이단의 신을 섬기는 사이비들을 여럿 보아온 상태였다.
하나같이 미쳐있고, 처참한 길을 거닐었던 자들…….
하지만 피오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사이비들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다.
"그리고 현 제국의 국교인 유일교에 소속된 모든 이들도, 저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겠죠."
"뭐?"
이름부터가 유일교인데 다른 신을 섬기다니?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피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저마다 신에게 바라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누군가는 신에게 사회의 평화를 바라고, 누군가는 성공을……. 또 누군가는 악이라 정의된 자를 단죄하길 희망하며 기도를 드리겠죠."
길을 거니는 그녀의 양 손이 조용히 맞대어졌다.
마치 기도를 할 때처럼.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타난 건, 결코 신자들이 가진 경외와는 다른 것이었다.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진로를 거니는데……. 뚜렷한 형체가 없어 상상으로밖에 떠올릴 수 없는 존재를, 어찌 공통된 형태로 인지할 수 있을까요?"
피오 아스클레.
그녀는 카일이 아는 누구보다도 유능한 학자였다.
그런 유능함이 전능한 신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했으니, 당시의 카일은 그녀가 어쩌면 '의술이란 분야의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경의에서 비롯된 생각은, 두 번째 생에서 신앙에 필적한 수준으로 성장하기에 이른 상태였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녀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 라고.
"그래요, 저는 당신 개인만이 섬기는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예요."
그 때가 돼서야 카일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자의 근본은, 굳이 따지자면 '신상이나 성서'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당신이 가진 욕망, 열망, 소망……. 그 모든 것이 믿음을 빚어 만든 힘을 통해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죠."
그저 누군가를 따르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상징체.
오롯이 그 믿음을 가진 자만이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
그 모든 것이 꿈이라는 공간을 빌려 인지되었을 뿐인 결과물…….
"정리하자면, 넌 내 상상이 자아를 가져서 만들어진 스승님의 복제본이라는 뜻이야?"
"복제본이라고는 해도 겉모습만 같은 건 아니에요."
그래,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자는 엄연히 자아가 존재하고, 아직 확실치 않지만 제 스승의 기억도 어느 정도 가진 듯 보였으니까.
그 점을 자각했을 때 카일의 머릿속엔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일, 당신도 알다시피 신성력은 만물의 기록을 읽고, 그 기록을 답습하는 것을 통해 대상이 된 존재를 되돌리는 현상을 일으키는 힘이에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분명 그렇겠죠."
베르디 하트리스.
그 아이 역시 신성력을 통해 자아를 가진 존재를 구축하고, 그들이 가진 의지를 빌어 신성력을 발휘했었다.
정확히는 신성력을 응용해 만들어진 '윤회력'이란 힘으로…….
비록 셰인은 윤회력이라는 걸 쓸 수 없지만, 둘 모두 신성력에서 비롯되었다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게 어떤 원리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런 분석보다 눈앞에 펼쳐진 결과가 더 중요한 상황이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당신의 눈엔 제가 그녀와 똑같이 비춰지시겠죠. 그야 당신의 기억을 빌어, 이 세계에 잔존해있는 기록을 통해 그녀와 같은 존재가 구축된 거니까요."
세계의 기록이라거나 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스승이 살았을 적의 모든 걸 그대로 모사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런 꿈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그래, 제 앞에 있는 자는 결코 현실에는 나타날 수 없는 존재다.
그저 제 미련이 신앙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만들어진, 그런 안쓰러운 망상의 집합체에 불과할 뿐.
"미안해요. 그녀 본인이 아니라서."
"아니……."
사과를 하는 그녀를 만류하는 카일.
그 후 뭐라고 말을 하려다, 이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해."
눈앞에 있는 게 본인이었다면, 그 땐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도 고려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삶도, 카일 페터슨으로써의 사명도 전부 다…….
그야 그녀 쪽이 자신보다도,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더 적합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 심정마저 이해 한다는 듯 쓰게 웃는 피오가, 그 복제체가 마저 고원을 거닐어갔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
아무리 그녀를 그대로 모사했다지만, 정말로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똑같지 않은가?
"자, 그럼 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이윽고 정체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 지어지고, 이야기는 새로운 화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그녀에게서 그에게로.
"나에 대한 이야기라니?"
"확실히 제가 당신의 심상을 투영해 만들어진 존재라지만, 공교롭게도 당신의 기억까지 완전히 공유하진 못하거든요."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거듭되는 물음에 피오가 쓸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폐해진 전쟁터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현장.
그런 환경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것임을 생각하니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제 앞에 있는 자는 앞으로도 그런 곳에 홀로 있어야 하는 자였다.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거라곤 기껏 해봐야 당신의 심상에도 영향을 줄 만한 강렬한 경험을 겪었을 때뿐이겠죠. 가령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떠오르는 주마등이라거나, 혹은 그런 걸 감수하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을 경우……."
'신성력.'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에도, 혹은 그런 위험을 무릅썼을 때에도 빛은 더욱이 선명히 주변을 밝혀주었으니까.
'요컨대 신앙에서 기인한 존재이니, 신성력이 강하게 발휘될 때의 기억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러니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선 이런 대화도 꼭 필요하다 할 수 있겠죠."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니…….
무얼 위해서?
그렇게 물어보려던 입이, 자리에 멈춰서버린 그녀의 행동에 의해 돌연히 멈춰지고 말았다.
"카일.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사람이냐니?"
"당신이 스스로를 어떤 존재라 정의하고 있는지. 그렇게 물었어요."
"……."
"……이야기가 좀 난해했을까요?"
애매히 웃음을 지은 그녀가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 광활하고 척박한 땅의 어딘가로 향하며.
"제가 모사한 그녀를 예로 들어보자면…….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엔 매우 뛰어난 의사라 할 수 있을 거예요."
피오 아스클레.
그녀의 존재를 입에 담으며 마저 말을 이어간다.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사람을 살려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 자부심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는 보람이자 이유라고 여기기도 했죠."
병마에 고통 받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라도 손을 뻗어주고, 그 고통을 달래주리라.
설령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혹한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오롯이 자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 그것이 그녀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죠."
그건 카일 역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카일 역시 그런 스승을 동경하여 의사의 길에 들어선 자였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런 이상을 함께 이어받은 허상이 카일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당신은……."
"피오의 제자야."
그 물음이 끝나기도 전 카일이 대답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테니까."
천성부터가 의사이길 희망하고, 병약한 몸으로나마 삶의 모든 것을 사람을 살리는 데에만 투자했던 사람…….
그런 그녀의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망나니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을 인생의 지표로 삼았기에, 그는 두 번째 생에 와서도 의사이길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길을 거닐게 해준 그녀와, 그녀가 속한 조국의 의지를 이 시대에 이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제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지금의 질문에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답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리고요?"
정작 피오의 복제본은 그런 카일에게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마치 지금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것 마냥.
"…그리고 라니?"
"피오 아스클레의 제자……. 그게 당신을 정의하는 말의 전부냐고 물었어요."
"무슨……."
"카일."
혼란을 느끼는 카일을 돌아보는 피오.
어느 순간 멈춰진 발걸음은 언덕의 아래에 세워진 묘비로 향해져 있었다.
처음 이 꿈에 들어왔을 때에 있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 척박한 환경 내에서 그나마 묘비다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장소.
"당신은……."
제 스승의 무덤이었다.
흑사병의 치료 중 과로사로 사망했다는 소식만을 전해 듣고, 그 후 전쟁터로 다시 나가게 된 카일이 조촐하게나마 세웠던 무덤.
"제 스승의 삶이 고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런 무덤을 앞둔, 그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자가 자신을 향해 되묻고 있다.
그 얼굴과 묘비를 함께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오는 게 느껴졌다.
"고단하냐니……."
"유전적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손이 제 머리카락으로 향해졌다.
색이 빠지고 푸석푸석해진,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의 상징으로.
"의료대국이라 불리는 곳에조차 그 치료법을 찾지 못하는 병이었죠."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 피부가 타버리고, 시력도 남들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데다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몸이다.
그 몸으로 무리를 하면 수명마저 갉아먹으리라.
그녀는 매 순간 그걸 직감했고, 전장을 누비는 매 순간마다 스스로가 오래 살지 못하리란 걸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병을 안고 태어나서일까요. 그녀는 도리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헤아려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죠. 누군가는 바보같이 착해빠진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카일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착해빠진 호구 같으니.
그런 식으로 자신을 관리하지 않고, 스스로를 혹사시키기만 하면 대체 무엇이 남냐고…….
그녀의 제자가 되고 난 후에도 그렇게 몇 번이고 외쳤었거늘.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런 사람의 뒤를 고스란히 따라가고자 하고 있었다.
"아이헨발트 왕국군의 전 돌격대 대장, 그 뒤를 이어 의무부대의 대장……. 그 후 두 번째 생에 와선 셰인 골드리안으로써의 삶을 살게 되었어요. 이단의 땅에서는 선생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도 불렸고요."
"……."
"그래요, 카일. 당신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 무척이나 많아요. 그럼에도 당신은 굳이 가장 먼저 '피오 아스클레의 제자'라고 말을 했어요."
여린 손가락이 자신이 모사한 존재의 묘비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를 동정하듯.
그 묘비를 세운 자를 동정하듯.
"그건 그 모든 업적이 그녀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나요?
"그건……."
"그렇다면 당신이 피오의 제자임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빈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지금의 그녀는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모사한 존재와 달리 선택지가 있는 삶임에도, 두 번째 생에와서까지 과거에 얽메인 그가 처량하기 그지없게 보였으니까.
'어째서 한때 지나치듯 만났던 그녀와의 만남을, 그 가르침을 신앙에 필적할 정도로 다져온 것인가.'
그 대답은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상처를 들춰내는 건 그만큼 괴롭고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움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200년이라는 시간이 넘은 현재, 전혀 다른 시대상을 가진 이 세계엔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돌연히 찾아온 빛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을 했었다.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그러니 힘들면 언제라도 기대주세요. 저는 당신이 바란다면 언제나 곁에 있어줄 테니까요.'
결국에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하지만 카일은…….
눈앞에 있는 존재를 마냥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여길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의지가 있다.
기억이 있다. 제 스승과 모든 것이 똑같은…….
그런 존재이니, 스승 본인은 아닐지라도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 넓은 아량 역시도.
그 호의에 기댄 카일이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너는……."
그녀를 빌어.
만약에 제 스승이라면, 분명 그렇게 답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정말로 제국이 바뀌길 바라고 있을까?"
'만약, 이 시대에 환생을 한 게 자신이 아닌 스승이었다면.'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결정을 했을지.
사실은 그 가르침을 왜곡해 받아들인 게 아닌지. 그저 자기 스르로만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
제국으로의 복귀까지 하루가 남은 현재, 카일은 이제껏 시달려온 막연한 불안함을 제 동경의 상징에게 실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