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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40화 (140/255)

의무병의 환생 140화

라인하르트 가문.

셰인에겐 여러모로 많은 연이 얽힌 장소였다.

전생까지 간다면 악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가문의 선조에게 가진 감정은 원한보단 감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적이었던 것도 그저 입장이 달랐기에 그랬을 뿐.

그 결투가 끝난 후 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듯, 제국의 풍조를 거스르면서까지 제 주군에게 간청을 드리기까지 했으니까.

다름 아닌 제 조국과, 아직 제국에게 멸하지 않은 나라들까지 제국에 녹아들 수 있도록.

제 목숨보다도 훨씬 값진 대가를 받았는데, 그 자에게 원망 같은 걸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셨군요, 셰인."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셰인은 그 후예를 단독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은색의 장발을 말총이 되도록 묶은 머리에 가벼운 천으로 이루어진 상하의…….

방어적인 기능은 전혀 없지만, 팔꿈치와 같은 관절부에는 최소한의 보호를 위한 경갑이 끼워져 있다.

방어보다는 기동성에 치중된 모습.

전장보다는 대련을 할 때에 더 선호되는 복장이며, 그 격식만은 마지막으로 결투를 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일까?

어수룩했던 어린시절과 달리, 자신을 앞두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날카롭게 벼려진 두 눈을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을 뿐.

"……그래, 오랜만이네."

피식 웃은 셰인이 제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와는 대조될 정도로 부드럽고 여유로운 모습.

"그런데 참 너무하네. 5년 만에 만났는데 별 다른 안부인사도 없이 바로 대련을 하자하고……. 설마 그때 졌던 게 그렇게 분했던 건 아니지?"

그런 능청스러운 태도로 반쯤 장난삼아 농담을 툭 던졌지만, 정작 세실은 그 말에 호응하지 않고 눈을 감기만 할 뿐이었다.

그 이상 별다른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의 태도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다.

"……목은 좀 괜찮아?"

그런 태도가 셰인에겐 굉장히 섭섭히 느껴졌다.

그래도 5년 만에 만났거늘.

"공작님은 건강하셔? 예전에는 빈번히 복통에 시달리고는 하셨는데."

겨우 이루어진 재회에서 자기 용건만을 툭 내뱉고, 지금에 와선 개인적인 사담 한 마디조차 섞지를 않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일라이랑 같이 온 것 같았는데…."

"검을."

애써 말을 이어가는 중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

세실이 내뱉은 것이었지만, 정작 그 눈은 여전히 감겨진 채로 있을 뿐이었다.

"거기 있는 검을 들어주세요."

가까스로 열린 입에서 내뱉어진 건 그저 본론 뿐.

그 태도 역시 처음 재회했을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세실."

"셰인."

진지하게 도전을 요구했고, 일방적이긴 하나 셰인은 그녀의 말을 수락하여 약속장소에 발을 들였다.

그 외에 선택지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제국으로 돌아간 후엔 그 가문과 연을 맺지 못할 테니, 전과나 이단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 이곳에서의 만남이야말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저는 진지하게……. 당신이 저에게 도전해주길 바랬던 거였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달리 반가움이 아닌 다른 부분을 우선으로 두고 있었다.

자신과 겨룸으로써 이룰 수 있는 무언가를.

"그리고 셰인은 그런 저의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이곳에 찾아오신 거……. 맞죠?"

"……."

"그러니 대화는 싸움이 끝난 후로 미뤘으면 해요."

싸움이 끝난 후…….

공교롭게도 셰인은 그 제안마저 조급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이라곤 고작 하룻밤뿐이지 않은가.

밤을 새서 대화를 나눈다 해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네가 그걸 바란다면."

아니, 그런 걸 논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아직 의중은 알 수 없지만, 저 아이에게 있어서 이 싸움은 정말로 진지한 일일 테니까.

그렇게 세실을 배려하기로 한 셰인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조용히 제 시선을 하늘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대련을 하는 것도……."

주변을 두르는 벽만이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장소.

하늘은 훤하게 뚫려있으며, 하늘에 자리한 선명한 달빛은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조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밝은 밤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때 당시 대련을 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나.'

그때만 해도 작았던 아이가 5년 만에 이다지도 훌쩍 커버리다니.

시간이란 참으로 야속하다, 생각한 셰인의 두 눈이 차차 흐뭇함에 젖어갔다.

그 시선이 불쾌하기라도 한 것일까?

"……셰인."

저조한 목소리에서 비롯된 읊조림.

그와 함께 그녀를 향해 느끼던 소소한 기쁨이 돌연히 끊어지고 말았다.

"당신의 눈엔……."

그래, 지금 이 순간.

저 여린 소녀가 내뿜는 기백은 결코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온갖 수라장을 거쳐 온 셰인조차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렇게나 뚜렷한 살의가, 이 순간 자신의 피부를 저리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이시나 보네요."

-찌이잉…….

귓가에 맴도는 이명은 단순히 현기증에 의한 것인가?

아니, 이 또한 저 소녀가 발휘하는 것이었다.

마나 특유의 진동이.

그로부터 발생하는 주파수가, 사람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기에…….

'……무슨.'

아지랑이와 진동음은 마나를 운용할 때에 발생하는 부가적인 현상.

물리력의 흐름이란, 보다 많은 마나를 운용할수록 그 여파 역시 강해지는 법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별다른 시각적인 변화 없이…….

하지만 '초진동'과 같은 현상을 일으킬 때에나 나는 고음이 일어나는 건, 마나를 한계까지 압축시킴과 동시에 그 흐름을 섬세히 제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셰인이 주로 사용하는 절개술을 넘어설 정도로.

'그런데 어떻게, 저 애가 이런 경지를…….'

고작 5년이 흘렀을 뿐인데, 저 아이는 벌써 그만한 경지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그 경지를 자신처럼 손이 아닌 검에.

의지가 깃들 수 없는 무기를 통해 그 현상을 일으켰던 자는, 셰인의 삶에선 딱 한 사람뿐이었다.

'이야, 너 굉장한데? 이거 대충 싸우면 오히려 이 쪽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겠네.'

볼레로 라인하르트.

그 방정맞은 사내가 진심을 발휘했을 때에 느꼈던 감각.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는 분명, 제 목을 베어 넘긴 자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다.

'이건, 위험하다.'

위기감이 미친 듯이 가증된 순간.

이윽고 세실이 제 손에 쥔 장검을 허공을 향해 찔러 넣었다.

조용하고 빠르게.

하지만 그 기세만은 폭풍과도 같이.

-파앙!!

이윽고 검 끝을 기점으로 퍼져나간 마나가 전방을 대차게 휩쓸었다.

의지에 제어되는 마나는 육체에서 분리된 순간 소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한순간에 꺼지지 않는다.

쿠과강!!

그 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셰인이 다급히 배후로 고개를 돌렸다.

훈련장을 두르고 있는 벽 중 한 곳이 완전히 함몰되었다.

돌연히 발생한 칼바람에 의해.

그저 손에 쥔 장검에 의한 현상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일격…….

"셰인. 딱 두 가지만 일러둘게요."

그 현상을 일으킨 소녀가 치켜 뜬 두 눈을 다시 셰인에게로 향하였다.

"자리를 비워달라고 한 건 이 훈련장만이 아니에요. 이 일대 전체죠."

-삐이이.

또 다시 머릿속을 뒤흔드는 이명.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낀 셰인이 식은땀에 젖은 양 손을 틀어쥐었다.

세실이 그런 셰인과의 거리를 좁히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당신에게 요구했던 건 대련이 아닌 진검승부…….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인 만큼, 지금부터 당신을 죽일 각오로 공격할 거예요."

비록 제 선조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지만, 그건 셰인 역시도 마찬가지다.

상대는 그 당시 상대했던 괴물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자랑하는 자.

"그러니 죽고 싶지 않다면 전력으로 덤비세요."

그 잠재력이 5년에 걸쳐 해금되었다면, 이제 갓 성인에 접어들 몸으로 그 위세를 버텨내는 게 가능할까?

* * *

-쿠궁!!

도시의 변경.

벽의 인근지대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건물의 사이로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지민들은 그 파장에 경계심을 세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습격이란 매우 익숙한 것이고, 뭣보다 지금의 난동은 습격이 아닌 '예고된 일'이기도 했으니까.

이미 그 일대에 대한 대피령까지 떨어진 마당.

그런 그들에게 있어, 신경을 써야 할 건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벽 밖의 상황일 것이다.

"드디어 시작되었나."

하지만 한 남자는 그런 도시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건지를 향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테라스.

도시 내를 살피기 위한 초소탑에 자리를 잡은 그는, 현재 술잔을 기울이며 사건지를 즐거운 듯 응시하고 있었다.

반면 옆에 서있는 그의 호위기사는 불안함만을 느끼고 있었으니.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이지?"

마일즈의 물음에 스윽 돌아보는 알랭.

정말로 모르겠다는 투로 물어보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난감함이 느껴졌다.

지금 거론한 것이 국가적인 문제까지 번질 수 있기에 더욱.

"…공녀님에게 클라우디아를 대여해주신 건에 대한 겁니다."

복제본이라고는 하나, 그 복제본조차도 황족이 아니면 손에 쥐는 것조차 허락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제국의 세 기둥이라 불리는 가문의 후계자라 해도 마찬가지.

하지만 태자는 그 검을 그녀가 황도군에 임시로 합류했을 때'기념'이란 이유로 대여해주었고, 그녀가 황도군을 벗어난 후에도 검을 돌려받지 않은 상태였다.

"자고로 도구라는 건 사용할 줄 아는 자의 손에 쥐어져야만 의미를 가지는 법이지."

그럼에도 태자는 별다른 후회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일어나는 난동이 마치 자신이 기대했던 거라도 되는 듯…….

아니, 그 이상이라 여긴 듯 들뜬 미소를 지어보일 뿐.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그 자격을 증명했다. 그건 클라우디아가 뿜어내는 빛을 본 너 역시 실감하는 바이겠지?"

확실히 신화의 재림이라 표현될 존재의 목을 베었을 때, 그 선명한 빛은 멀리 떨어져 있던 황도군의 본대조차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래토록 황족을 섬겨온 마일즈 조차, 클라우디아를 이용해 그만한 빛을 자아내는 황족을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클라우디아는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검.

자체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평해지는 만큼, 자신의 주인이 될 자는 스스로가 직접 정할 수 있다.

"클라우디아도 알고 있는 거겠지. 과거 그녀의 선조가 그 검을 쥐고 전장에 나선 적이 있다는 걸."

200년 전.

황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검사에게 그 검을 대여해주었고, 그 검을 쥐고 나간 검사는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었다.

복제품이라곤 하나 그 역시도 원본의 살을 깎아 만드는 무기.

의지를 지닌 무기인 만큼, 그 기억이 깃드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만한 시국이 아닌 이상 검을 내어주어선 안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아무리 자격이 있어도 사용은 별개의 문제다.

다름 아닌 국보에 해당하는 무기.

200년 전처럼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닌 한, 국보를 소홀히 내어주는 건 황족으로써의 자질을 의심받더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그래, 복제본이라 한들 결투에 쓰고자 내어주는 건 무리가 있는 일이겠지."

태자 역시 그에 대한 자각은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대여해준 이유는 하나.

"나도 상대가 과거의 망령이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내 애검을 빌려주진 않았을 거다."

"……과거의 망령?"

의문을 내뱉은 마일즈.

그런 무지한 모습에 알랭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마일즈. 나는 황족으로써,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제국의 역사 역시 여럿 접해본 몸이다. 그 중에는 황도군에 속한 너조차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자료도 존재하고 있지."

아무리 황도군 역시 황실의 일원이라지만, 직접 피를 이은 자와 그 피를 수호하기 위해 창설된 집단에게 허락된 권한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들려주는 건 그런 부류의 이야기.

"그 중에는 제국의 검이라 불린 자를 부추겨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 숭고한 신념을 가진 야만인과 얽힌 이야기도 존재하고 있다."

숭고한 야만인.

제국의 역사를 겉핥기로나마 접해봤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제국은 자비와 박애를 망각한 채 대륙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그만큼 세력이 약화되어 지금과 같은 강성함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자조차도 크나큰 상처를 입는 것이 전쟁인 법.

당시의 관점에서도, 그 자는 세기의 영웅이라 숭배되어도 손색이 없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저자가 그 야만인의 후손이라는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제국의 3공작과는 달리 골드리안 후작가도 수백 년에 달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거늘……."

그래, 골드리안 역시 전쟁 이전부터, 제국 역사의 절반 이상 동안 유지되어온 가문이다.

설령 200년 전 야만족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 가문에 섞여 들어갔다 한들, 그 피가 가진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밀려 퇴색될 대로 퇴색되었을 터.

"하지만 피는 몰라도 알멩이라면 가능성은 있는 법이지."

"알멩이……."

말꼬리를 흐리는 마일즈.

다시 입이 열린 것은, 저 멀리서부터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을 때였다.

"그렇군요, 저 소년이 이단자가 된 이유는, 그 당시 활동했던 자의 지식을 이어받았기 때문이군요."

성서에조차도 기록되었던 야만인의 숭고한 의지를.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제국은 자신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의 의지를 계승한 자를 교수대에 올리려 했다는 뜻일 것이다.

과거의 숭고함을 잊어버린 채로, 그저 현재에 금기된 사항만을 들먹이며.

'그걸 알고 있었다면, 태자님께선 두 사람에게 모종의 운명을 느꼈다는 것인가?'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그녀가 이 이야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자가 그녀에게 검을 내어준 이유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제국의 검과 그를 감회시켰던 숭고한 야만족의 싸움을 재현하는 것.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 이유 중 하나가 죄책감일지도 모른다고…….

지켜보는 자로썬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정작 싸움을 지켜보는 태자가 느끼는 건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글쎄, 지금의 순간이 과연 과거의 재현 정도로 끝이 날까?'

죄책감이 아닌 호기심을.

공교롭게도 그가 접한 기밀은 그저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환생자라니, 이렇게 흥미로운 존재를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나?'

그 정보를 전해준 자를 떠올린 알랭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싸움의 결과가 어찌 되건, 그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길이라 굳게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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