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42화
시간이 흐르고.
이내 안색이 편해진 세실을 본 셰인이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내뱉었다.
"숨은 괜찮아졌어?"
"네, 이전보다 훨씬……."
제 목에 손을 얹으며 말하는 세실.
그 호흡은 처음 훈련장에서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안정을 이루었으며, 기침이 나올 조짐 역시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네,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좋아서."
테스트를 해도 내심 불안했거늘.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겠지, 생각한 셰인이 만족스레 웃으며 품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안에 약의 제조법이랑 사용법을 적어뒀어. 정량에 맞춰 사용하면 부작용은 거의 없을 거야."
조국에서 사용하던 것에 비하면 역시 부족하지만, 큰 차이라고 해봐야 제조식의 비효율 정도뿐이다.
공작가의 지원이라면 그 정도는 별 문제되지 않을 터.
'그래, 이걸로 끝이야.'
이내 수첩을 내어준 손을 밑으로 축 늘어트렸다.
'이걸로 이 아이와의 인연을 끝내야 돼.'
이전의 사투를 겪고 나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이 아이의 삶에 너무나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처음부터."
정작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한 듯이.
아니, 그걸 알기에 더욱 화가 난 듯, 세실이 수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실어 넣기 시작했다.
"이렇게 끝낼 생각이셨던 거군요."
뒤이어 마주친 눈에서 느껴지는 원망…….
처음 훈련장에서 마주했던 것보다 더 조용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무겁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없으시네요. 셰인은……."
깎아지른 듯 높은 성벽의 위.
그 위에 길게 뻗어진 공허한 바닥에는, 오롯이 그녀 혼자만이 선 채 셰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날도 그러셨죠. 언젠가 잡혀갈지 모른다는 말만 하고……. 그렇게 말도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재판장으로 끌려가셨어요."
그리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배후 역시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당신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저의 곁을 떠나려 하고 계시네요."
그저 몸만이 커졌을 뿐, 소녀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과거에 마주했던 소년을 보고 있었다.
그 여전함이 더 없는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차차 성숙해져 갈지언정 추억은 마음속에 묻어두었고, 그 추억은 언제나 그리움을 통해 꾸준히 상기되어왔으니…….
그럼에도 이 순간 표하는 것이 반가움이 될 수 없는 건, 제 앞에 있는 자가 이 만남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실."
"알고 있어요. 셰인에게도 셰인의 사정이 있다는 걸."
그가 없는 곳에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자를 통해 풍조가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계속, 느껴왔어요. 셰인은 이런 위험한 땅에 와서도, 저에게 그랬듯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는 걸……."
처음에는 그저 굉장하다고만 여겼던 것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차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가 이룩한 일들이 얼마나 굉장한 건지.
그리고 책임을 알아가기에, 그가 짊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역시도.
"그래도……."
그렇게나 작고 여렸던 아이가, 그런 걸 헤아릴 줄 알 정도로 자라난 것이다.
"그래도 셰인이 저에게 도전해주길 바랐어요. 그렇게나마, 제가 당신을 위해 해온 일을 증명하는 순간이 오기를……. 손 꼬박 기다렸으니까."
그저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따라오기만 했던 아이의.
"그야 전, 셰인을……."
그 입에 담은 자신의 이름에 어린 무게 역시도.
제 기억 속에서 들었던 것보다도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차마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면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답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건만…….
"당신을 떠나보내기 전부터, 줄곧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소녀는 매정하게도.
그 기회마저 주지 않은 채, 자신에게 제 속내를 고백해오고 있었다.
* * *
유년기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럼에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면, 그건 기억력보다는 익숙함에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한다.
'콜록, 콜록.'
그때에도 지금처럼 기침을 내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이 들 뿐.
그리고 아마도 그 소리가 제 삶에서 끊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제 어미가 그렇듯,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자매님, 당신은 저주에 걸리신 겁니다.'
그런 원망스러운 어미의 기일에 무덤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자니, 한 여인이 다가와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사제복. 그리고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에 말뚝이 박힌 특이한 목걸이.
'당신의 어머니께서……. 그리고 외조부님의 가문은, 한때 신에게 큰 분노를 산 적이 있었지요. 그 저주가 후손들에게도 대물림되어 당신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호흡을 타고난 건 자신이 지은 적도 없는 죄에 의한 것이다.
그 죄를 어째서 자신이, 그리고 제 어미가 짊어져야 했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가, 감히 신이라 불리는 자의 뜻을 이해하려 드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일 테니까.
'…지금은 그렇게 알아두셔야만 해요.'
그게 당연한 것일 터인데.
어째서 그 신자는, 자신에게 저주를 남긴 자를 섬기면서도 그런 말을 남겼던 것일까?
'세상이 부당하게 여기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니까요. 그러니 당신의 증세에 대해 의심이 들더라도 절대로……. 그 의심을 입 밖으로 내뱉지 말아주세요.'
남들의 눈이 들지 않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곤, 그 신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결한 성직자를 연기하며…….
하지만 그 모습만은 소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소녀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엔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옳았다고…….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그런 순간에도 그녀의 몸에선 빛이 비추고 있었으니까.
비록 그 빛이 가진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모두가 그 빛을 경배하기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자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애틋하게 여겨주신 아버지처럼.
'혼담 예정이 잡혔단다.'
그런 아버지께서 어느 날 자신을 부르며 꺼내었던 말.
앞으로의 삶에 큰 반향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화제였다.
'어디까지나 혼담에 불과하지만,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약혼으로 이어지겠지. 너와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그 자리에서 결정될지도 모르는 거란다.'
귀족에게 있어 정략혼이란 드물지 않은 일.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건, 그저 귀족으로서 쌓아둔 교양 때문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삶이 길지 않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아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단다. 그러니 너도……. 그 아이가 너를 위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모쪼록 그 아이와 함께 어울려 지내도록 하거라.'
그래, 제 삶이 머지않았다면 하다못해 주변에 뉘를 끼쳐선 안 된다고.
'……네, 아버지.'
그렇게 결심을 굳힌 소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그렇게 너무나도 이른 시기에 어른이 되어갔다.
어떤 사람이 오건 그와 함께 살아가기를.
그 역시 제 아버지처럼, 자신을 따라주는 시종처럼 가족으로 여기기를 각오하면서…….
'세실, 너 천식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정작 그 자가 보였던 건 소녀가 우려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귀족가의 서자.
누군가는 하찮다 여길 출생임에도 자신의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고.
그것도 저주라는 애매한 개념이 아닌, 자신이 가진 증상을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단어로 정리하기까지 하며…….
'천식? 그게 뭔가요?'
그 모든 것은 소녀로선 마냥 흘려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 정도 선을 긋는 태도를 취해왔다.
'네 혈통에 내려오는 저주야.'
'……저주요?'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둬.'
소녀는 그 말에서부터 왜인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언젠가 자신의 증상을 진단해주었던 성직자에게 들었던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당신의 증세에 대해 의심이 들더라도……. 절대로 그 의심을 입 밖으로 내뱉지 마세요.'
그래, 당시 그 말을 입에 담았던 자는, 자신을 걱정하면서도 제 증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왔었다.
그저 제 증세를 방치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처럼…….
하지만 그게 올바르다 하더라도, 그걸 위해 괴로움을 감내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녀의 몫이었다.
일방적인 희생의 강요.
그것이 부당하단 생각마저 지울수가 없는 마당에, 자신을 구제하고자 하는 소년에게 이끌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 앞에선 기침하는 거 참지 않아도 돼.'
너무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보다도 어른스럽고.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그는, 소녀에게 있어선 유일한 버팀목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런 보탬 역시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소녀는 그 곁을 함께 하는 4년에 걸쳐 지켜보며 실감해왔다.
그 모든 기억을 제 마음 속에 쌓아가고, 이윽고 그걸 추억으로 치환시켰다.
'세인 골드리안, 당신에게서 이단혐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억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
그럼에도 그 순간 소녀는, 제 심장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무리 그가 처방해 준 약을 먹어도, 그 기침이 사라진 자리엔 울먹임만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감각이 익숙지 않기에 두려움도 느껴졌다.
대체 이 고통은 얼마나 가야 끝이 날까…….
아니, 평생이 가더라도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다시 만날 거라는, 그 일말의 기대조차도 느낄 수 없다면 더욱이.
'저주가 아니라 장애야.'
하지만 다행히도 세상은 그를 매정히 내치지 않고, 그 숭고함을 높이 사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장애는 엄연히 치료할 수 있는 문제야. 문제를 알고 있다면, 남은 건 그걸 해결할 방도를 찾는 것뿐이지.'
저주가 아닌 장애로.
그는 자신의 증상을 그렇게 정의하였고, 그 말을 되새기고 있자니 아려오는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파왔던 상처에 새살이 돋고, 그것이 차차 흉터로 남게 된 순간.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하나……. 억지를 부려도 될까요?'
이윽고 소녀는 한 가지 결의를 하고, 그 상흔을 제 결의의 상징으로 삼기로 하였다.
'저는……. 저의 반려가 될 자는, 저보다 강한 사람이었으면 해요.'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막대한 책임을 짊어지고도 허락되는 자유가 있다면.
그런 책임에 짓눌리지 않을 정도의 강함을 키워, 그렇게나마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두가 포기했던 제가 다시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셰인이 그런 위험을 감수한 이유가 있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그 기회를 다름 아닌 그와의 재회를 축복하는 데에 사용하겠노라고…….
그것이 자신을 구제하지 못한 집단에, 더욱 나아가 자신의 이상을 사지로 내몬 세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 여겼다.
'세실, 지금부터 할 단련은 그 어떤 때보다도 혹될 거란다.'
'……네. 괜찮아요.'
그 길이 고독하고 험난한 것을 경고함에도, 그 미래를 앞둔 소녀는 일말의 주저 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셰인은……. 분명 저보다도 더 힘들 테니까요."
애초에 그가 있었기에 연명 받은 수명이 아닌가.
그 손에 거머쥔 검도, 가문의 자부심을 이어가는 것 역시 그에게 선물로 받은 '기다림'이 있었던 덕이거늘.
그 시간을 그를 위해 쓰겠다는 것이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깨달음은 그에 대한 감사를 열망으로, 이윽고 피를 토해내도 멈추지 않는 집념으로 바꾸었으니…….
그 지독한 아픔조차도 그와의 추억을 상기하는 매개가 되어준 순간, 손아귀에 생겨나는 굳은 살은 그를 향해 나아가야 할 또 다른 목적으로 다가와주고 있었다.
그러한 자각이 이어지기를 5년이 지나고, 이윽고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 순간…….
다른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두근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가 돼서야 소녀는 깨달았다.
'나는 그를 좋아했구나.'
라는 생각보다도.
'이것이 좋아한다는 감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그 감정의 실체를 그가 떠나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가 되어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그렇게나 소녀는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기 그지없던 사람이었다.
"그야 전, 셰인을……."
하지만 그런 마음을 표현할 여유조차 그리 많지 않으니.
"당신을 줄곧, 사모해왔으니까요."
소녀는 이 순간의 기회를 빌어, 그를 향해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였다.
어쩌면 대등한 입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로나마 그가 자신을 이해해 주고, 거기에 답을 해주길 바랐지만…….
* * *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일방적으로 품은 마음일 뿐.
오직 혼자만이 품어온 마음이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부질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걸,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