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44화
"부관. 내 누누이 말해온 것이지만, 전쟁이란 건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강하고 용맹해도 결국 개인일 뿐.
혼자서는 수천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고, 아군이 죽어나가는 현장에 홀로 고립된 현실은 견고한 정신에마저 균열을 내는 법이다.
그렇게 죽어나가고, 미쳐가는 병사들을 사샤는 이제껏 여럿 보아왔다.
그럼에도 그 현장에 서고자 하는 병사들을 보다 많이 봐왔다.
"그런 그들이 전장에 설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 무엇을 통해 존속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겠지."
이내 도착한 성벽의 앞.
그곳에 기다렸다는 듯 오와 열을 맞춰 선 병사들이 두 사람을 대면하였다.
사샤가 그들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말했다.
"나는 그 존속의 이유를 '계승'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존재했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
그럼에도 그들의 흔적은 여전히 그들이 있던 터전에 남아있으며, 그 자리에 뒤이어 찾아온 자들은 그 흔적을 되새길 권리를 얻게 된다.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건 본인의 몫.
"의무부대,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경례자세를 취하는 이들은, 그 책임을 감당하길 결정한 자들이었다.
걸치고 있는 것은 가벼운 경장. 그 외엔 아무런 방어구도, 무기 하나 갖추고 있지 않다.
최소한의 의무용 도구와 손에 감긴 붕대. 그리고 단련된 육체 하나가 무장의 전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고대 민족. 아이헨발트 왕국군의 의무부대가 착용하던 제식복이다.
"……제군들."
이제 곧 떠나갈 자가 남긴 교본을 통해 5년에 걸쳐 길러낸 병사들.
그들을 앞둔 사샤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부관에게 내어주며 그들을 홀로 마주하였다.
"그대들은 내가 아는 가장 용맹하고 강인한 병사들이다. 그런 그대들을 신뢰하였기에, 나는 지난 수년에 걸쳐 그대들을 개인적으로 교육을 시켰던 것이지."
무기 하나 쥐지 않고 맨몸으로 전장에 나간다.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는 일이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어수룩한 병사들만을 선별할 순 없었다.
내로라하는 병사들을 단련시키고, 실전에서 써먹는 데에만 해도 5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만한 시간에 걸쳐 사샤는 절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선배라 부르는 자는 현역시절에 누구보다도 강했고, 또 많은 책임을 짊어졌던 자라는 걸.
"그런 그대들에게,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의 목숨을 맡겨도 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이 그의 의지를 온전히 이어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바람에 부흥하듯, 그들이 말없이 자신의 손을 심장으로 향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
스스로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아는 가장 확실한 자세다.
"복창하라! 의무병의 신조!"
그 박동을 함께 느낀 사샤가 외쳤다.
""의무병의 신조!!""
일제히 이어지는 함성.
피부를 떨리게 만드는 기백에, 그들을 이끄는 자가 더욱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신조 하나!!"
""의무병은 절대로 전장에서 죽어선 안 된다!""
"그렇다! 너희들은 전장에서 죽어가야 할 사람들을 살리는 자! 너희들의 죽음은 그 자체로 수많은 병사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어서 신조 둘!!"
""의무병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선에서, 아군을 살리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너희들의 본분이자 존재의의! 전장에 선 순간부터 너희들의 목숨은, 오롯이 사람을 살리는 데에 쓰여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또 명심해라! 이어서 신조 셋!!"
""신조 셋!! 앞선 두 가지의 신조를 지키는 선에서, 의무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사력을 다해야 한다!!"
"그래! 너희들은 치유사임과 동시에 군인이니! 너희들은 본분을 수행하는 선에서,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세 개의 신조를 입에 담고.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선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 모든 설명을 마친 사샤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그대들이 입에 담은 세 가지의 신조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냐!"
""사람을 살리는 자는, 전장에 선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 남자처럼.
그의 숭고한 의지는 이미 이어지고 있으니, 사샤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그들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이 진정 '군인'이라 불리는 자이니.
"전군! 성벽으로 집결하라!"
이윽고 그 각오를 확인한 지도자.
이단의 군주가 그들을 포함한 군세를 이끌며 성벽의 밖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 * *
-퍼엉!!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포성과 함께, 한 발의 포탄이 성벽의 아래에 충돌하였다.
전체에 비하면 작고, 적중한 부분도 밑 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전율만은 확실히 느껴진다.
이제 곧 밀려들 전쟁의 파도 속에서, 인간이란 너무나도 작은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 떨림에 균형이 무너질 법함에도.
"……미안해."
셰인은 그저 면목이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에 벌어질 문제에 신경을 쓰기엔, 당장의 상황을 견디는 것조차도 벅차게 느껴졌으니까.
"무엇이, 말인가요?"
그리고 그건 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벽의 밑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불빛과 함성.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이 공허한 성벽 위엔 아무런 영향조차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전부 다……."
이 성벽의 위에 자리한 것은 오롯이 두 사람 뿐.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역시, 이 순간엔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말은……."
마치 이제껏 거쳐 온 세계와 동떨어진 곳에 고립된 것 마냥.
그러한 침묵을 빌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만이, 이 공허한 성벽 위에서 벌어지는 일의 전부였다.
"그 말씀은, 셰인도, 저와 같다는 말인가요?"
"……글쎄."
천천히.
두 사람은 제 망막에 새겨진 서로의 모습만을 응시하였다.
어느 샌가 성벽 밑으로 늘어트린 검마저 바로잡은 소녀.
당장이라도 떨어트릴 듯 위태롭게 떨리는 손은, 소녀가 이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런 무게마저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혼자뿐이니까.'
그래도 선택지가 있는 눈앞의 소녀와 달리, 그에겐 이 길을 걷는 것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 과거의 기억이란 현재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족쇄로 다가올 뿐이었다.
선택지가 주어진다 해도, 그건 어느 쪽을 가더라도 극단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저 세태에 순응하며 살 것인지.'
'과거에 있었던 감상을 이 시대에 구현하여, 세계를 바꾸기를 각오해야 할지.'
하지만 결국에는 시간문제에 불과한 고민이었다.
전세에 마주했던 그들의 숭고함과 처참함을 기억하고 있는 그가, 그 시절의 광기가 남아있는 시대에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리는 만무했을 테니.
'누구를 만나건, 어떤 사건을 겪건……. 나는 그 때처럼 교수대로 걸어가는 걸로 내 삶을 끝내려 했을지도 모르지.'
고칠 수 있는 병을 저주라고 부르는…….
그런 시대에서 살아갈 거라면, 차라리 그런 시대를 바꾸는 시작점을 마련하고자 이 목을 내어 주리라.
과정이 어떻건, 그 결론만은 스스로가 카일 페터슨이길 희망하는 이상 달라질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 아이에게 큰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려 했거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라도.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동떨어진 시대라 한들, 그 또한 의지할 곳이 필요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래, 결국엔……. 나도 스승님과 같은 인간에 불과했다는 거겠지.'
외로움을 느끼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지칠 수밖에 없는 인간.
그러니 그에겐 언제나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그저 과거로만 남은 제 스승보다도 더 확실하고 뚜렷한, 현실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통해.
'만약 이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의지할 곳을 필요로 하던 그가 처음으로 환자를 마주했다.
그 대상이 세실리아 라인하르트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손을 뻗었겠지만,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것도 결국 가정일 뿐이다.
'이 아이라면, 나를 신뢰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자신을 거부할 수도 있고, 도리어 고발을 하여 무언가 이루지도 못하고 계획이 파토날 수도 있었다.
부작용이 걱정되어 약을 거부할 수도 있었을 터임에도, 이 아이만은 자신을 신뢰하며 제 몸을 맡겨주었었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도 살려야 할 환자가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이런 평화의 시대라도.
'다름 아닌 이 아이였어.'
그저 전쟁에서밖에 사람을 살려본 적이 없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해준 것 역시 그녀였거늘.
'이런 시대라도, 내 전생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줬던 건 이 아이였어.'
그러한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마음은 키워지고, 그 그리움은 애착으로…….
이윽고 그녀의 곁에 서고자 하는 마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그녀에게 구애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곁에 서선 안 되는 거야.'
그 마음이 더욱 커져가는 것이 느껴지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임을 실감한다 하더라도, 고작 19년의 삶만으론 전생에서 비롯된 숙명을 모두 덜어낼 순 없으니까.
그 숙명을 우선시 둬야 하는 그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행동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미안해, 세실."
그런 과거에 떠밀린 결정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한들, 그 마음에 솔직해지면 결국 두 사람 모두 파국으로 치달을 게 분명할 터다.
"미안해. 난……."
그러니 오늘을 끝으로 마주하지 않으리라고.
설령 그 마음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서러움을 느낄지라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답이라고 여겼건만…….
"후훗."
어째서 저 아이는.
그런 아픔을 각오해야 함에도 저런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는 것일까?
"…세실?"
"아, 죄송해요."
맺어질 수 없는 것을 괴롭다고 말했었거늘.
마음이 있음에도 차마 맺어질 수 없다 말하는 자신을, 어떻게 저렇게나 밝은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방금 셰인이 한 말이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그만……."
"기쁘다니……."
"그야 그렇잖아요."
화사한 미소다.
자신과 함께 지냈을 적에는.
그저 긴장과 눈치만을 살피기만 하고, 이별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을 때에는 보여준 적이 없던 밝은 미소.
"셰인의 말대로라면, 저희들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마음을 품었다는 거잖아요."
아니, 아마도 그건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녀가 지난 5년간 거닐어온 길 역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힘겨운 길이었으니까.
"서로 다른 공간에 있어도,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마음을 품고 키워왔다니……."
그 끝에 도달한 결말마저 절망케 하리라 여겼건만.
정작 그녀는 이 순간을 보상이라고 여기듯,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해온 일은 결코 틀리지 않았던 거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세실."
하지만 이런 마무리는 셰인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여기서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에 대한 정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괴로워질 뿐이니까.
썩은 상처에 돋는 고름처럼, 서로의 삶을 괴롭게 만들 것이 분명할 테니까.
"정말, 그걸로 되는 거야? 나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차기 가주는, 현 계승권자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자로 결정된다."
설득을 하려는 셰인에게, 세실리아가 단호히 말하며 제 검을 들어올렸다.
"대상은 성인식을 치르기 이전이라면 누구든 가능하며, 도전자의 조건은 신분과 재산. 그 외의 모든 요인에 상관하지 않는다."
늘어졌던 클라우디아가 휘둘러지고, 그 형상이 장검에서 한 자루의 레이피어로 뒤바뀌었다.
그 반대편에 쥐어진 것은 한 자루의 단검.
그 두 개의 무기를 교차로 쥔 세실이, 그 사이로 셰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령 그자가 전과가 있다 하더라도……."
"……."
"…그러니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이윽고 침묵하는 그를 향해 세실이 조용히 물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계승권을 거머쥐기 위해, 저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했던 이전과는 다르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이, 이 순간이 서로에게 허락된 마지막 기회임을 가르쳐주고.
정말로 진심으로.
이대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며,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져버릴 수 있는지를 묻는다.
"……세실."
"저는 당신에게 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그래, 마음을 져버릴지 말지…….
그건 그녀에게 있어선 쓸데없는 걱정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 마음을 받아줄지 말지는 서로의 의지가 아닌, 5년의 시간에 걸쳐 누구보다 강해지길 희망했던 자를 꺾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아니, 더욱 나아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예요."
그가 구제해줬기에 쥘 수 있던 검이 아닌가. 그 검을 쥐었기에 세간에 자신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던 게 아닌가?
가문의 부흥, 선조의 재림, 더욱 나아가 시대의 변화…….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자부심이자, 그를 향한 연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셰인."
그 증명을 이제 와서 마음이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없던 셈 칠 수는 없다.
"당신은 제 마음을 받아줄 걸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제가 당신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저에게 도전해달라고……."
그러니 진정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었다면, 제 손으로 심장을 뽑듯 그 마음을 억지로 져버리지 않아도 될 터이다.
"제가 당신의 마음을 받아줄지 말지는, 당신이 저보다 강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맺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니 진정 그가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면, 그의 간절한 소망마저 쉬이 이룰 수 없다는 걸 가르쳐주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니 이 자리를 빌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 사실을 가르쳐준 소녀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틀어쥐었던 검을 겨누며 물어왔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계승권을 걸고, 저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그 단호한 물음에 말없이.
그렇게 검을 들어 올린 소녀를 지켜보기를 차차 시간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성벽 밑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폭음, 그보다도 더 큰 함성소리…….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강해졌구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서로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서로가 행하는 것을 보며 판단할 수 있는 순간.
그 사실을 자각한 셰인이 이내 늘어트렸던 손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앞으로.
그렇게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린 채 허리를 살짝 굽히고, 날을 세운 손을 앞으로, 주먹을 쥔 손을 허리께에 두는 자세.
그가 교전에 들어갈 때에 취하는, 마투술의 기본에 해당하는 자세다.
그 외에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 결의를 표하듯 아무런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말 한 마디 없더라도 그것만으로 그의 의지를 읽기엔 충분할 터.
"셰인."
그건 세실 역시 마찬가지.
손이 품의 안쪽으로 향하도록, 그리고 가슴팍의 위로 검이 향하도록.
그렇게 곧게 뻗어진 세검의 칼날은, 그 끝은 정확히 셰인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전력으로 와주세요."
반드시 이뤄야 할 숙명을 안고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 사랑 또한 그가 타고난 숙명을 통한 보은으로 빚어진 결과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위해서라도, 그가 나아가는 숙명 또한 이뤄지길 바란다.
"……내가 할 말이야 세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천천히 교수대로 걸어갔을 뿐인 삶에, 이 소녀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시작점을 마련해주었다.
이제껏 이루어온 모든 것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온 것.
그 업적이 커질수록 그녀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고 여겼거늘…….
그래도 허락된다면 전생의 숙명에 관계없이.
그저 한 명의 남자로서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 마음만은…….
그래도 그 마음만은 이 자리에서 표현하는 게 허락된다면.
진정 저 소녀가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그렇게 자부한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라고 한다면.
"전력으로 덤벼."
그 역시 그 강함과 신념을 믿고 배려를 져버리리라.
이 순간 서로를 향한 도약에는, 그런 믿음이 동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