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49화
[2부 프롤로그]
테라스 제국.
500년 전부터 줄곧 이어져 온 이름이자, 200년 전 대륙 전체를 통일시킨 전례 없는 업적을 이룬 나라.
그 국력은 주님의 보은 아래 절대성을 띠고 있으며, 제국인들은 변치 않는 현재야말로 영원불멸의 평화로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건 풍조가 변화할 기미가 보이는 현 시대 역시 마찬가지.
차차 바뀌어가는 흐름 속에서, 제국인들은 기존의 체재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제도에서부터 변경지대까지! 제국 곳곳에서 모아온 진귀하고 신기한 물품들을 보고 또 보며 사고 가시라~"
골드리안 후작령.
골드리안 후작가가 운영하는 상회인 '골드핸드'의 주 거점지로, 제국의 경제를 책임진다 일컬어지는 장소인 만큼 시장터는 늘 북적거리고 있다.
당연히 그 소란은 대개 골드리안 가문이 이끄는 골드핸드 상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한 장소에서 골드핸드 외의 상인이 장사를 벌이는 건,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기 뭔가 신기한 걸 판다는데?"
"한 번 가보자고."
물론 상인에겐 경계심을 살지언정, 일개 소비자들에게 신문물이란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져오지 않으니 발길이 막히지 않고, 끝내 마차 주변엔 인파가 넘치기 시작했다.
"네네, 어서 오세요~! 전부 다 보고 가셔도 좋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변상을 하셔야겠지만 보고 듣는 건 공짜니까요~!"
"호호! 이 아저씨 말하는 거 좀 보게?"
"거 뭐 파는지 일단 좀 보고 갑시다."
특유의 입담을 따라 짐마차로 몰려드는 행인들.
비록 반짝이는 보석장신구나 화려한 옷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형태의 물건들은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 행인이 한 곳을 지목하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아아, 그건 반창고라는 겁니다. 이렇게 상처가 생긴 부위에 톡! 하고 붙여서 사용하는 물건이지요~"
제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여 시범을 보이는 상인.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상처 부위에 감싸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상처가 나면 교회에 가면 되는데……."
"어휴, 모르시는 말씀 마시죠! 까진 상처 하나 치료한다고 교회에 가면 돈이 얼마나 깨지는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성력이 믿음을 빚어 만드는 만병통치약이라지만,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제국에서도 소수에 불과하다.
병자들 모두가 그 힘을 누리는 데엔 무리가 있는 상태.
그렇다고 상처를 내버려두면 덧나기 마련이며, 이는 신성력이란 평민들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요인이 된다.
희소한 권능을 누리는 건 돈이 드는 일.
교단에서는 헌금이란 명목하에,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많은 돈을 거둬들이게 된다.
"그런 상처들에 이렇게 반창고라도 살짝~ 붙여두면 상처가 덧날 필요 없이 알아서 아물게 된다 이거지요~ 그것도 아주 싼 가격에 말이죠!"
"호오……."
"그건 나쁘지 않네요."
상인의 설명에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신성력의 소모를 최소화시켜 주는 물건들.
싼 값에 편의를 구매할 수 있다는 건, 제 몸을 간수하기 어려운 평민들에겐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일이었다.
"혹시 어깨가 뻐근한 사람 계십니까? 그런 당신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바로 파스! 붙인 부분의 근육통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대단한 물건이지요!"
"이 파스라는 거 굉장한데?"
"피로가 빠지는 느낌이야!"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물건을 사가고, 끝내 짐마차에 가득 채워진 물품들이 모두 동이 나기에 이르렀다.
그 광경을 상인은 무척이나 흡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더 물품을 챙겨오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장사를 하는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물건들, 변경지대에서 가지고 왔다 하셨죠?"
"이제까지 변경에서 유통을 해오는 곳은 거의 없었는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공수해 오신 겁니까?"
"하하, 어디에서 가져왔겠습니까?"
-툭툭.
상인이 제 배후에 있는 짐마차의 표면을.
거기에 그려진 붉은 장미의 문양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이 제국에서 활동하게 된 블러드메리 상회라고 합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블러드메리 상회.
근래에 시장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신생 조합으로, 그 영향력은 골드핸드의 독점하에 놓인 장소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바였다.
이는 즉 수백 년간 깨진 적이 없는 골드핸드의 독점에 균열을 내었다는 것.
그건 현 골드리안 가문의 가주된 자에게 있어,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상회를 이끄는 것이 다름 아닌 친동생이었기에 더욱이.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뚝.
돌연히 불린 이름에 체스말을 쥔 손이 뚝 끊어졌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여인.
그 가느다란 손가락에 쥐어진 체스말이 피식,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조금 그러네~ 일단은 가족인데도 그렇게 성까지 일일이 붙여서 부르는 거."
"됐으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앙칼진 목소리엔 노골적으로 실망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런 가식은 마주한 이의 불쾌감만을 돋울 뿐이다.
골드리안 가문의 장남이자 현 가주. 테올린 골드리안이 마저 체스말을 움직이며 물었다.
"근래에 대체 뭘 노리고 있기에 가문의 땅에 다시 발을 들인 것이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걸까나~? 나는 그저 할 일이 있어서 이 부근을 지나고 있었고, 마침 친가가 있어서 한 번 들려본 것뿐인데."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라."
윽박을 지르는 테올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보였지만, 에버그린은 그저 조소를 지으며 제 체스말을 움직일 뿐이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오는 건 좀 섭섭하네. 내가 가문을 벗어났을 때만 해도 내가 하는 일에 전혀 손을 대지 않겠다 호언장담했으면서."
"그것도 네 입김이 가문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그리고 애초에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던 건 너 역시 찬동한……."
"자, 체크."
툭. 하고 체스말을 움직이는 에버그린.
이후 수를 놓길 기다리고 있자, 판을 내려다보는 테올린의 얼굴이 왈칵 찌그러졌다.
"생각이 너무 길지 않아?"
"……다물어라."
불쾌감을 드러낸 테올린이 다시 체스말을 움직이고, 그 손끝이 말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에버그린이 제 폰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래, 서로의 사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라버니의 말대로, 내가 영지를 떠날 때만 해도 분명 그렇게 말을 했었지."
"그런데 최근 이 영지에 네가 이끄는 상회의 입김이 닿기 시작한 건 어째서지?"
"내가 사주한 게 아니야. 그쪽 사람들이 돈줄 좀 챙기겠다고 우리 쪽을 끌어간 거뿐이지."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아닌 그가 이끄는 상회 쪽이리라.
그건 그만큼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들이 매력적이란 뜻이 될 테지만, 테올린의 입장에선 그녀가 수작을 부렸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제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을까?
에버그린이 자신의 퀸을 테올린의 진영으로 가져가며 미소를 지었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거 물어볼 필요 없지 않아? 애초에 그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오붓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건데."
그래, 지금의 체스는 단순한 시간 죽이기 따위가 아니었다.
시장의 점유율을 갉아먹는 개미를 처분하려던 중, 가족 연을 빌려 뻔뻔하게 난입한 여왕개미.
그런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으려던 중, 에버그린은 '돈과 사람이 걸린 전쟁'을 대신해 지금의 승부를 빌어 이번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제안을 걸어왔다.
이기면 이유가 뭐가 됐건 가문의 땅에서 완전히 철퇴.
반대로 그녀가 이기면 지금의 문책은 없던 것이 된다.
'그건 그 자체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이 될 일이다.'
그러니 이 싸움은 절대로 져선 안 된다.
지금의 땀이 어린 손짓엔 그런 절박함과 승부욕이 깃들었다 할 수 있었지만…….
"체크 메이트."
그 승부 끝에 선고를 내린 건 다름 아닌 누이동생 쪽.
도주로가 차단된 킹을 내려다본 테올린이 표정을 구기다, 이내 체스판에서 제 손을 거두어들였다.
"……빌어먹을 년."
"칭찬 고마워요~"
부채를 펼쳐 베일 밑의 웃음을 감추는 에버그린.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속임수 하나 도입되지 않은 승부에서 그런 짓을 하면 스스로만 추해질 뿐이다.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는 테올린을 본 에버그린이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걸로 상회간의 교류 건은 완전히 체결된 거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오라버니~"
"……어디까지나 영지 내의 입점을 허락한 것뿐이다."
그저 골드핸드의 영향권이 있는 곳에서 장사를 허락하는 것뿐. 이쪽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일단은 지켜보고, 허튼 짓을 한다면 바로 제지를 가하리라.
그런 경계심이 다분히 느껴지는 말에도 에버그린은 주눅이 들긴 커녕, 도리어 제 미소를 자신 있게 비출 뿐이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시장의 영향력이라는 건 한 곳을 깊게 파고들기보단, 여러 부분에 이름을 남겨야 커지는 거니까."
"아버지께서 독점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가르쳐주셨을 텐데, 그걸 잊어버린 것이냐?"
"잘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추구하는 바가 다른데 굳이 그 가르침에 목을 맬 필요는 없지 않겠어?"
가증스러운 말이다.
가문이 이끄는 골드핸드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상회.
하지만 지금 에버그린이 하는 말은 긴 시간에 걸쳐 증명된 영향력과 노하우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이 옳다 호언장담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리 건방을 떠니 네가 가주의 자리에 앉질 못하는 거다."
"어머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나?"
그런 테올린을 쏘아보며 에버그린이 조잘대었지만, 그 또한 늘 그렇듯 신경전으로 그칠 뿐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는 데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붓기엔, 두 사람 모두 맡은 바 일에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상태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제 일을 하고자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도 잠시.
입 밖으로 탄성을 흘린 에버그린이 테올린을 스윽 돌아보며 물었다.
"그 아이, 슬슬 복귀할 때 되지 않았나?"
"……그 아이?"
"셰인 말이야 셰인. 우리들의 귀여운 동생~"
귀여운 동생이라니.
20년 가까이 말도 제대로 안 섞은 녀석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 아이, 출소하면 한 번 가문에 돌아올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가 신경 쓸 바 아니다."
"흐음, 그래?"
장난스레 웃은 에버그린이 부채를 휘저었다.
"하긴,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도 나와는 달리 '아직은'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딸칵.
문이 닫힌 후, 이내 홀로 제 방에 자리한 테올린이 체스판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말의 숫자는 분명히 이 쪽이 더 많은 상황. 하지만 킹을 제외한 모든 말이, 자신의 왕을 궁지로 몰아넣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상황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바, 넌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냐."
그런 치밀한 녀석이 왜 지금에 와서 전과자로 전락한 동생을 왜 거론한 것인지…….
그 이유는 그가 가문에 복귀한 후에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테올린이, 이내 홀로 남은 현장에서 체스판을 정리해갔다.
그리고…….
* * *
"방금 뭐라고 했나?"
그 후로 석 달이 지난 현재.
늘 그렇듯 영주로써의 업무에 충실하던 중, 테올린이 시녀장의 보고를 듣고 서류에 적어가던 펜의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나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준 보고는 충격적인 것이었으니.
"그, 셰인 도련님께서……. 영지에 복귀하자마자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셨다고 합니다."
-빠각!
서류에 닿은 펜촉이 부러지며 잉크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