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50화
시간은 잠시 과거로.
블레이즈를 벗어나고, 이후 복귀 절차를 마친 후 고향에 발을 들였을 때로 돌아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못 본 새에 고향도 많이 바뀌었네."
황실에서 준비한 마차에서 막 내려온 셰인이, 곧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탄을 흘려갔다.
골드리안 후작령.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함으로써 다수의 통행로가 엮여있기에, 제국 내에선 교통과 경제활동의 요충지로 쓰이는 장소.
그만큼 타 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 영지 내의 풍경도 시시각각 큰 변화를 이루게 된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발을 들인 것도 거의 10년 전이었지.'
4년은 라인하르트 가문에, 그리고 5년 동안은 고향에 돌아올 새도 없이 변경에서 지내왔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출생은 귀족사회에선 평민보다 못한 서자.
전과까지 생긴 만큼, 가문에 돌아가더라도 자신을 환영해줄 자는 분명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혹시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잘 계시려나.'
아놀드 골드리안.
자신에게 두 번째 생을 선사해준 부모 중 한 명. 그리고 자신과 라인하르트 가문을 이어준 자…….
곧 가문에서 제명될 몸이라 할지언정, 그 이름만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잠깐 정도는 만나고 가도 되겠지.'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는.
자신이 변경에 가기 전까진, 무척이나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제국 각지에서 들여온 신기한 물품들을 보고 가시라!"
"지금 사면 하나에 추가로 하나를 더 드립니다! 이런 날 정말로 흔치 않다고요?"
"거기 지나가시는 잘생긴 사제분! 이거 하나 보고 가시죠!"
영지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에도, 거리에 있는 상인들의 호객에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끊이질 않았다.
그 중 셰인의 발걸음을 사로잡은 것은 '잘생긴 사제'라는 입에 발린 칭찬.
"저 사제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주기 위해서다.
"예? 하지만……."
"뭐, 그래도 칭찬해주신 건 기쁘네요."
전생만 해도 전쟁통에 외모관리 따윈 뒷전으로 미뤘던 몸이지만, 두 번째 생에서의 그는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를 타고난 상태였다.
서자라 해도 역시 귀족의 핏줄일까.
그 또한 셰인에겐 소소한 자부심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여기선 뭘 파는 겁니까?"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장신구들이지요~ 아, 여기 로자리아도 있는데 한 번 보시렵니까?"
값싼 장신구들.
그다지 가진 게 여의치 않은 셰인도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셰인이 그 중 십자가가 장식된 반지를 지목했다.
"이걸로 할게요."
"네? 그건……."
"마침 이런 게 하나 필요한 참이었거든요."
언뜻 보면 '묵주반지'로도 볼 수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셰인이 반지를 산 건 성직자들처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물건일 뿐.
'그래도 앞으로를 생각하면 이런 구색 정도는 갖춰도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상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시장터를 나아가는 것도 잠시.
-쿠당탕!
시장터 한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발걸음이 멈춰지고, 그의 시선이 이윽고 그곳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무너진 진열대의 밑으로 널브러진 상품들.
그 가게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상점을 습격한 이들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앉기 시작했다.
"아, 아이고, 나으리!! 안 됩니다! 그렇게 다 부수면 저희 가족은 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장사를 하고 싶으면 빌려준 돈을 갚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가게의 앞에서 주먹을 틀어쥔 채로 으름장을 놓는 거한들.
그 앞에서 한 상인이 무릎을 꿇고 빌고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도우려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꼬라지를 보니 위병을 불러도 마찬가지겠네.'
아직 이곳에 순찰을 돌지 않는 듯하지만, 누구 한 명 위병을 부르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광경이 '일단은'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
정도가 심하면 책임을 묻긴 하겠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이 저 상인의 처지를 해결해주진 못할 것이다.
'그렇군, 금융과 관련된 문제인가.'
돈이 돈을 낳는 말이 있다.
그 시작은 금고를 지키던 이들이 돈을 대여해 주는 대가로 보상을 받은 것.
이것이 현 제국의 경제활동 중 하나인 '대금업'의 시작이며, 이 대금업자들은 채무를 갚지 못한 자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된다.
국가에서 빌려준 것이건 사설 채무건.
'일반적으로 보면 돈을 갚지 못한 쪽의 잘못이 크다……. 라는 인식이 있는 셈이지.'
물론 이걸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녀석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공교롭게도 셰인은 제네릭과 달리 경제에 대해선 해박하지 않은 몸이었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선 괜히 나섰다가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는 법.
그러니 가급적이면 연관되지 않고 떠나는 게 좋다는 생각도 들지만…….
'문제는 그냥 돈만 걸린 게 아니라는 거고.'
블레이즈에서도 이런 개새끼들이 대놓고 판을 치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깊게 한숨을 내쉰 셰인이, 제 손에 쥔 배낭을 떨구며 현장으로 차차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돈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
"히익! 가, 갚을게요! 반드시 갚을 테니까……."
"저기요."
막 상인과의 멱살잡이를 시작한 떡대를 부르는 셰인.
그에 반응한 떡대가 고개만을 돌려 험상궂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뭐야, 교쟁이야?"
"전도는 다른 곳에서 하시지 그래? 지금 우리 바쁜 거 안 보여!?"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야비한 인상의 남자.
교단 소속의 복장을 하고 있다면 주눅이 들 법도 하거늘, 정작 그들은 도리어 자신을 압도할 기세로 겁을 주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이 나라가 교국이라 한들, 교단 사람들은 교리에 의해 언데드와 같은 부정한 존재가 아니라면 폭력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사람을 발견했다 한들, 그것이 자신에게 얽힌 것이 아니라면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
그게 여의치 않으면 침묵을 해야 하니, 대중에게 있어 성직자들은 '방관자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인식이 되고 있다.
합법적으로 한량짓 하는 놈들에게 무시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의미.
"아뇨 뭐. 돈 거래하시는 거에 대해서는 그쪽이 알아서 하실 문제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셰인은 성직자가 아니다.
파란 입술, 충혈된 눈동자, 근육에 도드라진 혈관…….
그들의 외모를 살핀 셰인이 어금니를 깨물고는, 밑으로 늘어진 제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그 뭐냐. 제가 여기에 간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생겨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상관없는데 우리 일은 방해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 이 교쟁이 새끼야. 너희들 교단이랑은 상관도 없으니까……."
-콰앙!!
주먹이 휘둘러짐과 함께 멀찍이 튕겨져 나가는 떡대.
그 힘이 워낙 강한 나머지, 이전까지 쥐고 있던 상인의 옷깃이 그 자리에서 뜯겨나갈 정도였다.
"……어?"
멍하니 선 채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는 상인.
하지만 셰인의 관심은 상인이 아닌, 이미 야비한 인상의 청년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이봐요 아저씨. 어디서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무, 뭐?"
"니 대가리 깨지는 소리요."
-꽈앙!!
그대로 정수리를 가격한 손날과 함께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남자.
그때가 돼서야 주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사제!"
"교단 사람이 저래도 되는 거야!?"
"당장 위병 불러!"
그제야 위병을 찾으러가기 시작하는 방관자들.
그들을 보던 셰인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야, 빚쟁이들이 애먼 사람 때려눕히는 건 그냥 지켜보고, 그걸 막으려드는 녀석 잡겠다고 위병들을 부르러 가다니……."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 모를 지경이다. 하며.
참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셰인이 이 자리에서 난동을 부린 건 그와 별개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초에 그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은 200년 전의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니…….
"저 새끼야! 저 새끼가 우리 애들 눕혔어!!!"
"교단 사람인가?"
"일단 반죽이고 생각해!"
신고한 위병보다도 먼저 들어선 열이 넘는 떡대들.
그들을 마주한 셰인이 마나가 들끓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야~ 여러분들도 반 죽이는 거 좋아하나보네요~"
환생 후 19년차.
"저도 마찬가진데."
그는 여전히 불살주의자였다.
* * *
"그게 사건의 전부인가?"
"네, 네에……. 제가 전해 듣기론 그랬습니다."
영지의 검문소를 통과하기 무섭게 수금업자들을 때려눕혔다.
교전했던 이들은 하나 같이 전신의 뼈가 아작나고, 숨통만 겨우 붙어있는 상태.
하지만 위병들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나섰을 때엔, 그는 얌전히 구속을 받아들여 구치소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날뛰었을 때에 비하면 굉장히 순순한 협조라고…….
'……난장을 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하지만 그 말조차도 테올린은 심기가 거슬리는 것을 느낄 수박에 없었다.
대부업자들이 상가를 어지럽히는 거야 이 영지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그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에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방치하는 것 뿐.
'하지만 그 녀석은……. 아니,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일단은 얘기 정도는 들어봐야 한다.'
표면상의 절차라 한들, 그 과정을 거니는 것 자체가 자신과 같은 귀족들에겐 큰 의미로써 여겨지는 법이니까.
그래, 분명 그런 이유로 그가 수감된 철창으로 온 것이었건만.
"……뭘 하고 있는 거냐."
철창 내부에 있는 방에서 웃통을 벗고 있는 한 청년.
그는 자리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테올린과 눈도 마주보지 않고 제 할 일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팔굽혀펴기요."
왼팔 하나만을 이용해…….
아니, 몸을 지탱하는 건 손바닥이 아닌 주먹이었다.
땅에 두 다리를 대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상태로 '주먹'만으로 몸을 지탱하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갓 성인이 된 것치곤 터무니없는 신체능력.
그에 옆에 서있던 호위가 '호오'하고 감탄을 흘리자, 테올린이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걸 왜 지금 하고 있는 거지?"
"안 하면 근손실 오니까요."
그래, 정말로.
정말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짓의 연속이었다.
"호오……."
반면 제 옆에 서 있는 호위는 그마저도 감탄하는 상태.
그 역시 몸을 쓰는 일을 하는 만큼, 셰인의 경이적인 신체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리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에 대해 고민을 하는 가운데, 마저 자세를 푼 셰인이 겉옷을 두르며 테올린을 마주하였다.
"그런데 그쪽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겉모습을 훑는 셰인.
이후 무언가 떠오른 듯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빌헬름? 빌헬름 맞지!?"
"오오, 도련님.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셰인의 말에 호응한 건 테올린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였다.
노기사 빌헬름.
골드리안에 오래도록 충성을 맹세해온 자로, 과거 셰인이 골드리안 가문에 있었을 적 검술을 가르쳐준 적이 있던 자였다.
"이야, 못 본 새에 얼굴에 주름이 꽤 많이 늘었네~ 그런데도 꽤 정정한 걸 보면 운동은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나 봐?"
"하하! 도련님도 변경에서 많이 구르고 오신 모양이군요. 그래도 그곳에서의 수난을 잘 극복하고 오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목적이 있어 찾아온 건 자신이거늘, 어째서 공감대가 형성된 건 오랜 세월 가문에 봉사해 온 호위인 것일까?
"크흠!!"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해소한 테올린.
곧 침묵이 자리한 순간, 순간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셰인에게로 쏘아졌다.
"셰인 골드리안.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성까지 붙여 따박따박 풀네임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묻자, 셰인이 테올린의 안색을 멍하니 마주하며 되물었다.
"……누구?"
"테올린이다, 테올린 골드리안!"
이름을 입에 담으며 윽박을 지르는 테올린.
그제야 그를 알아본 셰인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흘렸다.
"아아, 형님이셨군요."
"……이제야 기억하다니, 참 경이적인 기억력이로구나."
"그야 뭐, 서로 나이도 많이 먹은 데다 9년 전에도 거의 말도 안 섞었으니까요."
9년 전만이 아니다.
당시 테올린은 후계자 싸움에 목을 매고 있던 몸.
가장 후계자에 적합하다 점쳐지는 입장에서도, 자신의 허점을 노리고 치고 올라올 다른 제자매들을 견제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늦둥이 서자를 관심밖에 두는 건 당연한 수순.
그건 가주가 된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일 예정이었다.
그가 5년 전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설명해라."
하지만 그를 가문에서 제명하는 건 결코 아집과 잣대만으론 이뤄선 안 되는 법.
"설명이요?"
"지금 네가 가두어진 이 상황에 대해 나를 납득시켜 보라고 말했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문제가 생기면, 마땅한 절차와 판단을 거쳐 행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그건 설령 꼴도 보기 싫은 동생이라 해도 마찬가지.
지금의 요청은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
정작 그런 자신의 말에 셰인이 되돌려준 것은 다름 아닌 감탄.
테올린이 의문을 느끼며 되물었다.
"무엇이냐, 그 반응은."
"아뇨 뭐……."
사나운 눈초리.
그 눈빛에 셰인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테올린에게 대답했다.
"이런 못난 동생이라도 얘기 정도는 들어주는구나, 싶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