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56화
통행로 하나가 막혔을 때의 손해란 실로 막심하다.
행인은 물론 그 길을 이용하는 교역에도 지장이 생기며, 우회로를 고른다 해도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소요될 것이 전제되니까.
즉, 단기적인 경제손실은 물론 물가의 상승이나 시장의 흐름 자체가 변화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심각한 사단조차도 누군가에겐 기회로 다가오는 법이다.
[도로 무너졌다면서? 마침 잘됐네! 우리 상회도 마침 교통 공사 사업에 손을 뻗기 시작했는데, 어때? 이쪽이랑 협업해 보는 건?]
"……망할 년."
집무실에서 편지를 읽은 테올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자신보다 십몇 초 남짓 늦게 태어난 친동생은, 이번에 벌어진 사태마저도 기회로 여기듯 뻔뻔스럽게 자신을 향해 협업을 제안해 오고 있었다.
물론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골드리안은 유구한 전통을 가진 노동조합과도 깊은 연을 지닌 가문.
이제 와서 다른 가문에 시집간 녀석이 보내온 일꾼 따위를 쓸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문제는 하필 이번 사태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가 그 노동조합의 책임자였다는 건가.'
탈세에 횡령, 장부 조작…….
심지어 공사단계에서 영주조차도 모르는 샛길을 뚫어, 각종 암거래에 사용되는 길을 만들어두기까지 하였다.
사실상 약물유통을 포함해, 이 영지에서 벌어진 온갖 부정과 부조리함을 제공해준 원인이라는 것.
그런 만악의 근원이라 할 작자를 처리한 건 좋은 일이지만, 그 빈자리에 대신 앉을 자를 찾고 인수인계까지 끝마치는 데엔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로열 나이츠가 검거에 성공한다 해도 황실에서 보상해 주는 건 물질적인 것뿐. 그 외의 모든 건 해당 지역의 영주가 부담해야 할 일이다.'
사태를 수습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적인 손해까지.
영주에게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인지는 입이 닳도록 말해도 부족하겠지만, 제국에 속한 귀족이 황실을 상대로 항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부정이 판을 치게 내버려 뒀다 추궁하려 들겠지.'
이미 사달이 벌어진 이상 담담히 처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막상 일이 벌어지니 마음이 석연찮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여기서는 이 녀석에게 도움을 빌리는 수밖에.'
도로의 수복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
그런 상황에 편지에 동봉된 공사계획은 구체적이고 효율적이기까지 한 상태다.
거슬리는 건 그로부터 자신에게 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는 것뿐.
자신의 자존심만 찍어 누른다면, 제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네 좋을 대로만 되진 않을 것이다. 에바.'
그렇게 각오를 굳히며 편지를 서랍에 집어넣은 가운데, 집무실의 밖에서부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오거라."
집무실에 들어온 것은 현 저택의 총괄을 맡고 있는 시녀장.
테올린이 이 저택에서 가장 신뢰하는 충신 중 한 명이었다.
"바쁜 참에 미안하지만, 당분간 하고 있던 일을 놓아두고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이윽고 테올린의 시선이 제 배후의 창문으로 향해졌다.
시야에 들어온 건 저택의 정원.
그리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한 청년의 모습.
시녀장이 테올린의 뒷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셰인 도련님에 대한 것입니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나 보구나."
"최근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으니까요."
대부분은 부정적인 이야기다.
그런 탐탁잖은 녀석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측근을 맡겨야 하다니.
'당최 믿을 녀석이 하나도 없군.'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 * *
명문가의 시종이란 대체로 출중한 능력을 가진 이들로 선별하는 법.
그건 재발가인 골드리안 역시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 해도 세상 모든 일을 쉬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으르르르르…….
대략 1달 전, 돌연히 정원 한 폭을 차지하게 된 짐승.
새로이 가문으로 복귀한 일원이 변경에서 데리고 왔다고 하지만, 그를 보살펴야 하는 사용인들의 입장에서의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덩치도 덩치지만, 제 주인이 아닌 자가 다가서면 무조건 이빨부터 세우고 보니까.
"저, 저기…… 식사를 가져왔는데……."
-아으르르르!!
"히, 히익!! 죄, 죄송해요!"
수레에 고기를 담아온 시종이 지레 겁먹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도망치는 자신을 뒤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수레에 담겨 있는 고기를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늘 그렇듯 제자리에 몸을 앉히고 있을 뿐.
그런 조용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 두려운 듯, 시종들이 한데 모여 제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자리……. 지키고 있는 거겠죠?"
"적어도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물진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먹이를 줄 수가 없는데."
"어, 어떻게 하죠? 너무 무서워요오……."
공교롭게도 그들이 전문으로 하는 건 가사노동과 서무뿐.
동물을 조련하는 건 물론이고, 유사시에 그 동물을 제압하는 무력 역시 갖추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제 상사로부터 저 짐승에게 먹이를 주라 지시를 받았으니…….
"제때 밥을 먹이지 않으면 시녀장님께서 화를 내실 거예요!"
"하지만 다가갔다가 저희를 점심밥으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이러나저러나 우린 죽는 거예요!"
"흐에에……."
그렇게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것도 잠시.
한 청년이 그들의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고, 곧 하얀 짐승을 향해 소리쳤다.
"콘. 이리와!"
-카우!!
외침에 반응하며 풀쩍 뛰어오른 거구.
그 몸이 마치 사냥감을 습격하는 야수처럼 남자의 몸을 땅에 내리꽂았다.
지켜보던 시종들이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쓰러진 남자의 얼굴에 그려진 건 공포가 아닌 환한 미소였다.
"하하~ 그만해, 간지러워!"
-끼우우, 끼잉…….
"그래그래,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해. 근래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워낙에 많아서 좀 늦어버렸네."
셰인 골드리안.
가문과 연관되어 있던 부정을 조사하던 그 역시,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제 반려가 반가운 듯 거리낌 없이 몸을 맡겨주었다.
손짓 하나하나에 기분이 좋은 듯 그르릉거리는 여우.
덩치만 클 뿐이지, 당장의 모습만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도련님, 대단하시네요."
"네, 저렇게 큰 짐승을 상대로도……."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시녀들이 하나둘씩 감탄을 흘렸다.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땅에서 데리고 온 짐승이라고 했던가.
그런 존재를 길들인 것도 모자라 저렇게나 자신을 따르게 만들다니.
"여기 혹시 숯이랑 불판 좀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그를 감탄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무렵, 셰인이 시녀들에게 다가서며 수레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콘에게 줄 먹이로 가져온 고기가 한가득 들어 있는 수레였다.
"부, 불판이요?"
"저도 마침 출출한 참이라서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콘과 함께 밖에서 구워 먹으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 바로 창고에서 가져올게요!"
시녀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의 입장에선 서자에 불과한 그 역시 엄연히 섬겨야 할 대상.
그의 지시를 따르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업무 중 하나였다.
물론 하나같이 얼굴이 붉어진 건 그와 상관없는 이유였지만.
"도련님, 뭔가 가주님이랑 엄청 닮으셨네요."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주님이 10년만 젊었어도 딱 저런 모습이었겠다, 생각이 종종 들고는 했는데."
나이 차이가 클 뿐, 둘 모두 엄연히 같은 아비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몸.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둘을 나란히 붙여두면 가족임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주군의 얼굴을 간간이 살펴보는 건, 시녀들에게 있어 고된 노동 살이 중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가주님은 뭔가 무서우시고……. 직접 마주하기 껄끄럽다고 할까요?"
"일만 잘 수행하면 별말씀은 없으시지만 그, 뭐랄까……. 사적으로는 한 방에 같이 있기는 싫은 느낌?"
"하녀에 불과한 저희들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셰인 도련님은 뭐라고 해야 할까……."
화제는 차차 테올린에게서 셰인에게로.
그 분위기 역시 꺼림칙함에서 화기애애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부드러운 느낌이죠?"
"네, 평소에는 호쾌하신데, 가까이 가면 굉장히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주변을 잘 보신다고 할까요?"
"아, 저도 알 것 같아요. 저번에 마구간에서 여물을 주고 있을 때 넘어질 뻔했는데, 그때 제 몸을 안아주시면서 '괜찮으세요?'라고 자상하게 물어보셨는데~"
"어머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그때 잠깐 몸을 끌어안아 준 게 전부예요. 그래도 그때 얼굴이 엄청 가까워서……. 헤헤."
"심장은 괜찮으세요?"
"어, 얼굴은 자세히 보셨어요? 속눈썹 길이는 어땠나요?"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 수도 있죠! 그렇게 멋있는 분이라면……."
-덜커덩.
차차 대화가 고조되어 가는 것도 잠시.
한 시녀가 창고를 벗어나기 무섭게 손에 쥔 짐을 떨어뜨리고, 입구에 선 채 몸을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왜 그러신가요, 하고…….
차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내뱉지 못하였다.
창고의 밖에는, 그녀들이 그토록 두려워 마지않은 자가 서 있었으니까.
"시, 시녀장님……?"
"네, 시녀장입니다."
스윽.
왼쪽 눈을 감추고 있는 단안경을 스윽 치켜세우는 여인.
그 렌즈의 반사광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납기 그지없는 눈매였다.
"제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지시를 내렸을 텐데……. 그 일은 수행하고 이곳에서 노닥거리시는 겁니까?"
목소리 역시 얼음장마냥 차갑기 그지없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시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주춤거렸다.
"그, 그게……. 저, 저희도 밥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 도련님께서 대신 주시고 계세요. 저, 저희는 그……. 읏!"
쏘아보는 눈빛에 주눅이 드는 시녀들.
대강 상황을 파악한 시녀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창고에서 등을 돌리며 냉정히 말했다.
"아뇨, 설명은 됐습니다. 경고는 제가 직접 하면 되니까요."
"겨, 경고라니, 무슨……."
-저벅, 저벅.
선명한 발걸음 소리로 대답을 대신하는 시녀장.
아니, 그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주변에 정적이 자리한 것이다.
싸늘하고 엄숙하면서도 정교한 사람.
현 골드리안의 시녀장은 그렇게 정의해도 이상하지 않은 자였고, 그로부터 비롯된 기백은 전문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조차도 주춤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비단 시녀들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끼이잉!
셰인과 어울리던 콘이 털을 곤두세우고, 직후 우는 소리를 내며 셰인의 뒤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콘, 왜 그래?"
-끼이잉, 끼잉…….
더욱이 셰인의 배후에 몸을 기대는 콘.
그런다고 특유의 덩치가 가려질 일은 없었지만, 평소의 콘답지 않은 행동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대개 낯선 이가 접근한다면 이렇게 겁을 먹기보단 경계심을 드러내는 아이였으니.
"그저 저택에서 갖춰야 할 예의를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 지금 콘은 이곳에 들어선 이에게 겁을 먹은 것이다.
이전에 마주했던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시녀복을 걸친 한 여성에게.
"주인이 없는 곳에선 제대로 식사조차 하지 못하다니. 가문을 지켜야 할 번견이 그래서는 안 될 일이겠죠."
하지만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그래도 '그 나잇대 여성'과 같은 느낌이 있던 시녀들과 달리, 지금의 여인에겐 온갖 수라장을 거쳐 온 셰인조차 잠시 경계심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미안한데, 이 애는 가문의 번견으로 삼으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설령 그렇다 해도 이전처럼 자리를 오래 비우는 일도 잦으실 테니, 독립의 필요성 정도는 당신도 느끼고 계시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억지로 떼어놓는 건 그다지 좋은 방침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졸지에 그녀를 맡게 된 가문의 입장도 생각해 주시죠."
돌연히 찾아와 쓴소리를 늘어놓는 정체불명의 시녀.
그를 어찌 받아들일까 곤란함을 느끼는 가운데, 콘이 애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셰인이 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여인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야?"
연한 금발의 머리카락을 땋아 밑으로 늘어뜨린 여인.
왼쪽 눈에 쓰고 있는 단안경은 시력의 교정보다는 패션에 중점을 둔 장신구였다.
주로 직급이 높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권위를 표현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물건.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셰인 도련님."
그 권위의 상징을 치켜세운 시녀가, 제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셰인을 향해 나직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귀족가의 일원에 걸맞게도 기품이 다분히 느껴지는 인사.
"현 골드리안의 본가에서 관리 총괄을 맡고 있는 시녀장, 아드리아나 실피어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눈에서 느껴지는 건, 도저히 상급자를 대한다곤 생각할 수 없는 딱딱함이었다.
그 딱딱함에서 묘하게 익숙한 느낌도 든다.
'테올린 그 자식이 여자면 이런 느낌이려나.'
누구 사주로 찾아왔는지 알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