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57화
시녀장.
저택의 노동자 중 한 분류인 시녀들을 통괄하는 이로, 그 권한은 대체로 저택의 총괄인 집사장을 웃돌기에 이른다.
실제로 가문을 수호하는 기사단조차 시녀장에겐 존대를 할 정도로, 저택에서 그들이 가진 권한은 막강하다 할 수 있었다.
"……시녀장이라고?"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자는 갓 성인이 된 몸.
그런 사람이 총괄이란 중책을 맡았다는 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일이지만, 정작 장본인은 그런 취급이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 이상하게 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님께서 전 가주님의 뒤를 따르듯, 저 역시 이전 대의 시녀장님을 따라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니까요."
"……시녀장이라는 게 세습제로 이어지는 거야?"
"권위란 세습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지요."
새로 들여온 엘리트보단 내력을 가진 이를 요직에 앉히는 것이 통괄에 도움이 되는 법.
귀족사회에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피어스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거리를 좁혀온 아드리아나가 셰인의 눈앞에서 슬쩍 고개를 치켜세웠다.
상대적으로 키가 큰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작네.'
골격은 분명 성인의 것이지만 키가 평균적인 성인치곤 작은 편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구두 굽도 상당히 높은 것을 신고 있다.
그런 걸로 균형을 잡는 것도 실로 용하단 생각이 들 무렵, 아드리아나가 셰인을 향해 불쾌함을 드러내었다.
"도련님, 대화하는 중에 한눈을 파는 건 예의에 어긋난 일입니다."
"아, 미안.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
말없이 자신을 째려보는 아드리아나.
묘하게 할 말이 많은 듯하지만, 그 속내는 끝내 헛기침으로 억눌러졌다.
서먹한 분위기가 무마되는 가운데, 셰인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여기에 온 건 콘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야?"
"그건 본래 제가 지시를 내렸던 분들이 맡아야 했던 일입니다. 헌데 도련님께선 이 자리에서 그 아이와 함께 식사하시려는 듯 보이십니다만……."
아드리아나의 시선이 수레에 담겨진 고기 더미로 향해졌다.
일단은 싱싱해 보여서 구워 먹어도 문제는 없으리라 여겼건만.
"역시 뺏어 먹는 건 좀 그렇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아드리아나.
이후 설명을 이어가는 그녀의 눈초리는 사납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가문을 벗어났다곤 하나, 도련님 역시 엄연히 골드리안의 일원이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정원 한가운데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택의 다른 분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으시겠죠."
마당에서 고기를 굽는 건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말한 아드리아나의 시선이 곧 수레에서 콘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까지의 반복된 훈련을 통해 겨우 홀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참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제가 아닌 다른 분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려던 참에 난입하셔서 초를 놓으시니……."
"하하, 이거 본의 아니게 방해를 해버렸네."
알았다면 조금 더 주의를 하고 찾아왔을 텐데.
씁쓸함을 느낀 셰인이 애매히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지만, 그래도 가재는 게편이라고 하지 않던가?
겁을 먹는 콘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보호욕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건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 겁이 많은 아이들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거라면 괜찮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녀는 겁이 많을 뿐이지, 사람을 직접 습격한 경험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아니, 그걸 그쪽이 판단을 내리면……."
"제가 직접 시험해 보았기에 확신한 겁니다."
"뭐?"
직접 시험해 보았다니. 뭐를?
"지금껏 제가 이 아이에게 먹이를 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곧 아드리아나가 수레에 담겨 있는 고기 중 하나를 집게로 집고, 그것을 콘의 앞으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주춤거리는 콘.
행여나 발톱이라도 휘두르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콘은 아드리아나가 내어준 고기를 힘겨이 한입 베어 물었다.
불안한 감이 크긴 하지만, 일단 그녀가 내어주는 먹이 정도는 먹을 수 있단 것이다.
"……설마 처음부터 그렇게 먹이를 줬던 거야?"
"문제 있습니까?"
문제야 많을 수밖에.
아무리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자신과 함께 심층부를 뚫고 온 아이다.
척 보기와 마찬가지로 제 한 몸 지킬 무력 정도는 갖춘 상태.
반면 셰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아드리아나는 그다지 전투에 조예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자기 몸은 소중히 여기는 게 좋아."
"충분히 가치 있게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골드리안을 섬기는 자가, 가문이 거둔 아이 하나 챙기지 못하는 건 수치로 여길 일일 테니까요."
정작 아드리아나는 그런 셰인의 걱정에도 괘념치 않은 모습을 보일 뿐.
가문에 충성스러운 건지, 아니면 공포라는 감정이 결여된 건지.
'누가 원칙주의자 녀석의 부하 아니랄까 봐.'
또 제 주변에 피곤한 사람이 늘어버렸군,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는 것도 잠시.
"하지만 당분간은 시녀장으로서의 직위를 반납해야겠죠. 도련님께서 이 저택에 체류하신 동안은 저 역시 당신의 곁을 보좌하게 될 테니까요."
"보좌라니……?"
"가주님께서 저를 도련님의 전속 시종으로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전속 시종.
말 그대로 개인에게 귀속되는 시종을 의미하는 직책이다.
위험한 일을 도맡으며 홀로 다니는 자에겐 굉장히 성가시게 여겨질 존재.
"아니, 전속 시종이라니. 난 딱히 그런 건……."
"도련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며 거절하려는 것도 잠시.
아드리아나가 셰인을 부르고, 그와의 거리를 차차 좁혀갔다.
키가 작음에도 느껴지는 기백이 마냥 예사롭지 않다.
"가주님께선 굳이 가문에 해가 되는 기록을 가지신 도련님을 가문에 거두어들인 상태입니다. 언젠가 가문을 벗어나는 때에 골드리안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괜스레 정곡이 찔리는 것을 느낀 셰인이 시선을 회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가문의 수치라는 점은 그에게 있어선 마냥 회피할 수 없는 죄책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죄책감을 느끼는 자를,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권위자가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구제불능의 당신이 조금이라도 사람 구실을 하기를 바라기에, 가주님께선 저택의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저를 '굳이' 당신의 곁에 붙이신 겁니다."
오히려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것부터 대단하다 여겨질 정도.
그런 현실을 자각하니 괜스레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을 느껴갔다.
'이건 뭐, 오히려 소리치면 내가 개새끼가 되는 거고…….'
하필 요전에도 과잉진압이라며 잔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또 기회를 준 건데, 괜히 성가시다고 거절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지는 없나.'
말없이 자리에 서있자, 아드리아나가 그 반응에 납득을 표하며 자리에서 스윽 등을 돌렸다.
"그럼 제 말을 알아들으신 걸로 알고……."
이후 자리를 떠나가는가 싶었지만 움직인 것은 몇 발자국 뿐.
아드리아나가 슬쩍 셰인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따라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따라오라니?"
"그곳에 계속 있으시면 그 아이의 훈련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식사라면 따로 마련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훈련이라니.
겨우 저택에 복귀했는데도 콘과 떨어져 있으라는 말인가?
-끼이잉…….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흐느끼는 콘.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셰인이 어쩔 줄 몰라 고민하던 중, 아드리아나가 다시 콘에게로 다가서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눈을 맞춘 채로 말한다.
자신에게 일갈했을 때와 달리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제까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설령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이분이 돌아오실 곳은 언제나 당신의 곁이 될 예정입니다. 그 고독에 익숙해지는 것 역시 당신이 살아가는 데엔 필요한 일이겠지요."
-…….
이내 끙끙거림을 멈춘 채 아드리아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콘.
비록 말을 알아들을 재주는 없지만, 영리한 그녀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느낄 재주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 지금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마음엔 거짓은 없었다.
제 주인이 언젠가 다시 자신의 곁에 돌아온다는 것도.
그리고 그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 준 이 여인 또한,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 역시도.
* * *
현재 골드리안의 본가는 총 두 개의 건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수백 년가량 유지와 보수를 이루어온 구관.
그리고 다른 한 건물은 4년 전 새 가주가 취임하며 세워진 신관.
그중 구관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오래되었기에, 이제는 전통보존과 더불어 업무상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만 이용되는 곳이다.
셰인이 식사를 한 곳은 신관.
현재엔 가문의 일원들이 생활관으로 사용하는 장소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지내실 테니 시설을 안내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앞장설 테니 따라오시지요."
집무실이 있는 구관과 달리 업무에 관련된 모든 것이 배제된 장소.
그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역시 재벌가답게도 그 또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관광이라도 온 기분이네.'
이런 스케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귀족의 소양이라는 거겠지.
이내 아드리아나가 어느 한 곳에 멈춰서며 손을 뻗었다.
"여긴 저택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대욕탕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능을 하며, 그 시간에 각 가문의 분들이 욕탕에 모여 몸을 청결히 다지는 시간을 가지게 되지요."
"정해진 시간에?"
"지형상 주변에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이 없기에, 마도구를 이용하여 물을 생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마도구."
그 쓸데없이 비싸고 효율이라곤 쥐뿔도 없는 물건.
대체로 마도구란 비전마법과 마찬가지로 노가다의 산물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만들어졌으니 대대로 전수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사실상 민간요법과 다를 바 없는 부류.
그런 걸로 이만한 규모의 욕탕에 물을 담는 건, 그야말로 돈지랄의 정수라 표현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후 목욕 시간이 된다면 목욕 중의 시중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때 부탁할게."
대강 그렇게 평가를 내리며 목욕탕을 벗어나는 것도 잠시.
이후 세 발자국을 더 걸어간 셰인이 뚝 발걸음을 멈춰서고, 아드리아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농담한 거야."
"전 진심이었습니다만."
"……그런 데에 진심 발휘하지 마라, 좀."
다 큰 여자가 다 큰 남자의 헐벗은 몸을 태연히 보다니.
제 조국의 정조관념을 생각하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겁니까?"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오히려 셰인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상태.
그건 귀족사회에서 시녀가 목욕시중을 드는 것이 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였다.
'어렵네, 제국의 상식이라는 건.'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도 간다고 했던가.
환생한지 20년에 가까워지는 현재에도, 이 제국의 문화는 셰인에겐 낯설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제국보다는 '귀족계층'에 대한 거겠지만.
"여긴 도서관입니다."
마저 안내를 받던 중, 아드라아나가 셰인이 도착한 곳을 지목하며 말했다.
셰인에겐 마냥 흘려넘기기 어려운 곳이었다.
"도서관?"
"제국 각지에서 수집한 책들을 모셔둔 곳이기도 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들어가셔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
"……도련님?"
멍하니 셰인을 돌아보는 아드리아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쳐다볼 정도로, 도서관은 셰인에게 남다르게 여겨지는 장소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여기도 참 많은 추억이 있었지.'
환생 직후부터 10세가 되기까지. 당시의 셰인은 뭐가 됐건 정보가 필요했던 상태였다.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할 자신이 왜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시대에 떨어졌는지를 알기에 확실한 건, 그 시대의 지식을 직접 접해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완벽히 이해하는 데에 거의 8년이 걸렸지.'
움직임에 장애가 있는 유년기는 물론이고, 도서관에 들어가려 하면 사사건건 저택의 사람들이 훼방을 놓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갈 때면 언제나 남들의 눈을 피해 조심해서 다녔거늘…….
"히, 히익!"
그런 추억의 한편이, 왜 지금 저 도서관 한가운데에 선명히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쿠당탕!
셰인을 마주하기 무섭게 책 더미 속에 깔려 버리고 마는 한 소년. 아드리아나가 깜짝 놀라며 그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저런, 괜찮으신가요?"
"자, 잘못했어요! 다신 안 들어올 테니까!"
이내 비명을 지른 소년이 책을 끌어안은 채, 복도를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셰인.
쫓아가서 잡으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보다는 도서관의 현장을 정리하는 아드리아나가 더 신경이 쓰였다.
묘하게 씁쓸함이 묻어난 얼굴.
자신을 핍박했던 시녀장이 등을 돌릴 때면 희미하게 비춰졌던 감정이었다.
셰인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저 애, 형님의 아들이야?"
"네, 현 골드리안 가문의 '정통 14번째 후계자'이신 브레다 도련님이십니다."
"그래, 역시나……."
서자였구나. 하고.
그런 생각에 어린 소년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잠깐. 14번째?"
"그렇게 놀랄 일이신가요?"
"아니, 뭐, 그야……."
14번째라니.
그건 즉 그 위로 13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혼란을 느끼는 셰인에게 아드리아나가 단안경을 치켜세우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현재 가주님께선 정실부인이신 엘레오노라 님 외에 5명의 첩실을 두신 상태입니다. 브레다 도련님은 네 번째 첩실이신 네이레 님께서 세 번째로 낳으신 분이시죠."
"아, 그래. 네 번째의 셋째……."
진상을 들은 셰인이 제 입꼬리를 일그러뜨리고, 창문 밖의 먼 산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니트로글리세린이 비아그라 제작에 쓰인다고 했던가……."
"비아?"
"그런 게 있어. 남자한테 좋은 거."
약학이 금지된 게 이렇게 아쉬운 적이 또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