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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60화 (160/255)

의무병의 환생 160화

'설마 검술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란다. 무엇을 배우건 본인의 자유지.'

정이라곤 느낄 수 없는 가문이지만, 그런 곳이라도 제 아비만은 예외로 두었었다.

진짜 아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유일하게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이었으니까.

'매일같이 단련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밖에 나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다. 내가 네 나이대엔 책을 읽기가 지루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밖으로 나가 친우들과 사냥을 다니곤 했었지. 나가지 못하는 날엔 시종들에게 목말을 태워달라 생떼를 쓰곤 했단다.'

보잘것없는 잡담에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충고.

그렇게 흘려 버릴 법한 이야기조차, 이 영묘에 들어선 순간 떠올리니 남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들아. 나는 가문과 관계없이, 언제나 네가 평온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단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지만 사랑받았던 기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기억을 더 이상 잇지 못하되 잊어선 안 된다고…….

적어도 지금의 셰인은,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셰인 골드리안'의 삶에 그와의 추억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의 임종조차도 지키지 못한 나는 후레자식이겠지.'

피식, 웃음소리를 흘린 셰인이 양손을 맞잡으며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그래요, 아버지. 저는 저를 위해준 당신을 외로이 죽게 만든 몹쓸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에라도 당신의 자식이 될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 삶에 아무것도 아니었어야 할 자가, 두 번째 삶을 거닐게 된 지금은 후회라도 느낄 만한 가족을 찾게 된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감사한다고…….

그런 마음이 담긴 기도를 이어간 끝에, 셰인이 맞잡았던 손을 거두며 제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제 옆에 있는 건 마찬가지로 한창 기도를 드리고 있는 아드리아나.

그녀는 셰인과 달리 아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바가 있던 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도련님?"

문득 측면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유골함이 보관된 방의 밖에서부터 들려온 것이었다.

셰인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해졌다.

그 이전부터 느껴졌던 낯설지 않은 감각…….

하지만 익숙하다곤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한때 들어본 적이 있지만, 최소 10년간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으니.

"셰인 도련님, 맞으시죠?"

"……아리엣?"

그래, 셰인은 이곳에 막 들어온 노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시녀복을 입고 있었고, 권위 역시 갖추고 있던 자였다.

당시에도 주름이 졌던 얼굴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더욱이 초라해진 상태.

날카로운 눈매 역시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듯 누그러져 있었다.

시녀장 아리에타 실피어스.

10년 전 가문에 있었을 적 자신의 활동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던 자.

개인적으로 '망할 할망구'라고 속으로 곱씹었던 사람이다.

"할머니?"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이는 그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분명 할머니라고…….

"……뭐?"

셰인이 눈을 부릅뜨며 아드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아나 역시 적잖게 놀란 듯 제 앞에 있는 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드리아나 실피어스가, 아리에타 실피어스를 마주하면서…….

'……허,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가 싶었더니.'

그러고 보면 전대 시녀장의 뒤를 이었다고 말을 했었지.

시녀장이라는 게 그렇게 훅훅 바뀌는 직위는 아닐 터.

아드리아나가 자신의 훼방꾼과 엮여 있다는 건, 그때부터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이야. 인생 알다가도 모르겠네.'

조모와 손녀가 쌍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까지.

그 또한 가문으로 복귀한 제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작 아리엣의 얼굴에 그려진 건 근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렇, 군요. 아드리아나가 도련님을……."

"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

묘하게 주춤거리는 아리엣.

지팡이를 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이내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분위기가 차차 서먹해지는 가운데, 셰인의 시선이 그녀의 밑으로 향해졌다.

예전의 표독스러움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늙고 노쇠한 노인의 형상만이 제 앞에 위태롭게 서있다.

이미 육순을 넘는 나이.

햇수로 치면 제 아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살아온 자였다.

'제 시녀보다 먼저 눈을 감은 주군이라니.'

참으로 안타깝지만, 사후에도 그를 기리고자 찾아온 걸 보면 좋은 인생을 살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 비켜드릴게요."

"아, 네……."

이내 셰인이 아드리아나를 이끌고 영묘를 벗어났다.

어두워지는 거리.

장사를 접는 이들이 차차 늘어가나, 유흥을 위한 시설들은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고 있다.

조금 더 늦더라도 집에 가는 길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 같다.

셰인이 그 빛을 눈에 새기며 아드리아나를 스윽 돌아보았다.

"입이 좀 심심한데 마실 것 좀 사와 줄 수 있을까?"

"마실 것, 말입니까?"

용무를 마쳤으니 가야 하지 않나 싶겠지만, 현재 셰인의 시선은 영묘의 안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눈치를 챈 아드리아나가 조용히 되물었다.

"사람이 많아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그럼……."

이내 아드리아나가 자리를 떠나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영묘에서 아리엣이 빠져나왔다.

홀로 선 셰인을 마주한 아리엣이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도련님, 아드리아나는……."

"잠깐 자리 비우게 했어요.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아서."

제 앞에 있는 자의 표정 하나 못 살필 정도로 눈치가 없는 몸은 아니다.

그 점을 밝히며 조용히 물으니, 아리엣이 우물쭈물하며 힘겨이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마치 고해라도 하듯.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사실 그날의 재판에서 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미 짐작했던 부분이다.

말하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충분하다, 생각한 셰인이 아리엣을 배려하고자 말을 잘라내었다.

그에 의외인 듯 초라한 눈을 벌려 뜨는 아리엣.

셰인이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법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적어도 한둘 정도는 주변 사람을 선택할 테니까."

5년 전.

셰인이 받았던 재판은 다름 아닌 제도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제국의 3공작이 모두 출석하고, 재판장을 대신하여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는 5명의 배심원단을 모집하는 재판.

비록 신상이 공개되지 않고 서로가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추측할 여지 하나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두 명 정도는 당사자의 사정을 잘 아는 이를 택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피고를 익히 지켜봐온 사람이 변호사보다도 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거기엔 자신을 유년기 때부터 돌보아온 유모 역시 후보로 올라가 있었다.

"절, 원망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은연중의 추측을 한 지도 언 5년째.

그것도 그 시기가 지난 후에는 아무래도 좋다고.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뒀을 뿐인 이야기였지만, 당사자와 직접 마주해 보니 기분이 묘해지는 게 느껴졌다.

"도련님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라니.

전혀 상관도 없는 자에게도 분통을 터뜨리는 게 인간인 법이거늘. 원망이라는 게 애초에 자격을 논하며 하는 것이었던가?

그런 마당에 자신이 그녀에게 화를 낸다면, 그건 그 당시에 있었던 일보다 지금의 자신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이란 뜻이 될 것이다.

지금의 셰인에겐 여유가 있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때 변경으로 보내는 것보다 좋은 답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이 대륙에서 제가 해온 일이 허락되는 건 변경뿐이니까."

"그래도, 도련님께선 그 위험한 땅에 가서……."

"그런 땅이기에 찾을 수 있던 기회도 있었죠."

그래, 원망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땅이기에 구할 수 있던 사람도 있었고요."

제 앞에 있는 자도 입장이 있어서 자신을 방해했던 것.

애초에 자신을 싫어했다면 이단의 땅으로 간다는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을 것이며, 셰인은 그 땅에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 성과를 통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원받은 상황.

제 품에 들어 있는 금색의 패는, 그런 노력이 빚은 성과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속죄해 달라거나 원망을 받아달라거나 하는 말은 안 할 게요. 그냥……."

이내 셰인이 아리엣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솔직함을 담아서.

"앞으로는 어색한 일 없이 편히 대해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모질게 굴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해하고, 자신 역시 거기엔 별 원한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렇게나마 과거의 악연을 묻어두고, 그 관계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쌓아갈 것을 이 자리를 빌려 제안한다.

"……아."

그에 아리엣이 탄성을 흘리다, 이내 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며 고개를 숙였다.

밑으로 늘어진 양손의 거센 떨림은 죄의식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라도 마주하게 된 '또 다른 주군'을 향한 반가움에서 비롯된 것일까?

적어도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가문에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겠습니다. 셰인 도련님."

지금 자신을 향한 정중한 인사는 그저 형식이 아닌, 그녀의 속마음이 우러나온 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사를 마친 아리엣이 스윽, 거리의 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마침 마실 것을 사고 돌아온 아드리아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잔은 각각 자신이 따르는 주인과 제 조모를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도련님을 잘 부탁드리마. 아드리아나."

"……네, 할머니."

인사를 마친 후.

제 조모에게 잔을 내어준 아드리아나가 셰인과 함께 귀갓길을 거닐었다.

그중 그녀가 가지고 온 음료를 마신 셰인이 저도 모르게 의문을 토로했다.

"……뭐야 이거, 커피?"

커피 특유의 맛이 나지만, 커피라는 건 이 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곳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곳이다.

그 숫자가 워낙에 적기에 귀족들의 연회에, 혹은 교단의 고위직들만이 마시는 게 겨우 허락될 정도.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만큼, 길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것이다.

"말린 민들레의 뿌리를 달여 만든 것입니다. 커피의 향과 맛을 유사하게 따라 할 수 있어, 평민들 사이에선 커피의 대용품으로 쓰이고 있죠."

"아, 대용품……."

확실히 서민들 문화 중엔 귀족들의 것을 흉내라도 내고자 시도하는 것들이 있었다.

셰인 역시 전쟁터에 있었을 적엔 그런 것들을 자주 접해본 몸. 그래도 민들레를 커피로 달인다는 건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일까?

"할머니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음료입니다."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이어지는 설명.

셰인이 흠칫 놀라며 아드리아나를 돌아보니, 허리께에 올린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불안하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 건 역시 귀족답지 않겠지요?"

귀족다움을 교육시켜야 할 자신이 이런 물건을 대접한 걸 문제라고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셰인의 입장에선, 오히려 진짜 커피보단 이쪽이 더 낫다 생각이 되었다.

"아니, 딱 좋네."

사치품을 흉내 내는 음료라니.

아직 귀족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반푼이에게 이보다 적합한 물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유모 덕에 좋은 걸 알게 됐어."

민들레 뿌리 특유의 은은하고 구수한 내음. 그 향토적인 맛이 입안 가득 퍼지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 따스함을 느끼며 떠올린 것은 자신을 돌보아준 늙은 유모의 모습.

'이미 은퇴했으니 저택 밖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테고……. 늙은 몸으로는 초대하더라도 저택까지 오기도 힘들겠지.'

나중에 아드리아나와 함께 그녀의 집에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소소한 계획을 잡은 셰인이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들이켜 갔다.

그리고……

* * *

-웅성웅성.

영지의 거주구에 위치한 한 주택가.

그곳에 한가득 모인 인파의 사이로 위병들이 지나며, 주변의 행인들을 통제하고 있다.

셰인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앞서 그곳으로 간 자신의 전속 시종이 알려준 대로라면, 저들이 모여 있는 현장이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이가 머무르는 곳이었으니까.

"무슨……."

투욱.

정성스레 포장된 민들레 커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당장은 아무래도 좋았다.

셰인이 인파를 지났을 무렵, 위병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아드리아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드리아나, 이게 무슨……."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창백히 식은 안색과 자신을 마주한 퀭한 눈동자.

언제나 당당하게 시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던 그녀가, 잠깐 헤어진 사이에 초췌한 몰골로 바뀌어 있었다.

이유는 머지않아 바로 알 수 있었다.

"도련님, 할머니께서……."

"……."

말없이.

셰인이 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아리엣의 자택을 돌아보았다.

제 유년기를 책임져 준 유모와의 갑작스러운 작별.

가문에 복귀한 후, 3개월이 지났을 무렵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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