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62화
"화장은 아직 안 했어?"
"이제 곧 입니다."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거야?"
"정식으로 신청한 휴가 기한도 슬슬 종료될 참이니 복귀하는 게 좋다 생각했습니다."
휴가라니.
공교롭게도 테올린은 장례 중인사람을 부를 정도로, 사용인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성대한 장례식의 비용을 대신 지불해 줬을 정도. 이제 와서 그녀에게 복귀하라 강제로 명령을 했을 리도 없다.
"좀 더 쉬고 있어."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유일한 가족을 뒤로해가며, 셰인의 옆을 지키고자 하고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는 태도로.
"내가 앞으로 이 가문에 해를 입힐지도 모르는데도?"
그런 그녀에게 셰인이 직접적으로 경고를 던졌다.
애초에 가문에 대한 소속감도 없는 몸.
이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일단은 가족이라는 연이 묶여있으니, 자신의 눈에도 거슬리는 걸 모두 처리하고 떠나자는 심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건 눈앞에 있는 이도 잘 알고 있는 일일 터.
"그걸 막는 게 저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이 자리에 선 이유였다.
제 앞에 있는 자가. 제 조모를 유모로 삼고, 그 은혜를 잊지 않은 남자가.
그 은혜를 기억하기에 이성을 잃고, 스스로의 고향을 무너트릴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니.
'……귀족사회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강단 있는 모습이 셰인에겐 익숙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군에서도 명예를 찾는 녀석들은 많았으니까.
그 행위의 본질은 결국엔 잔혹한 일이니, 광기에 침식되지 않기 위해선 대중이 인정할 만한 가치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에는 이름만 다를 뿐인 광기일 뿐.
충성이란 명예와 마찬가지로, 셰인의 입장에선 광기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와."
그런 여인이 자신을 따라오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저 시험에 들 뿐이다.
광기에 문드러진 삶을 살아온 그녀가, 진정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이의 광기를 버텨낼 수 있는지를.
* * *
"직접 들어온 건 처음이지?"
"……."
아드리아나가 말없이 셰인의 방을 둘러보았다.
신관에 들어온 후 몇 달간 머물렀던 장소.
하지만 전속 시종임에도, 아드리아나는 이제껏 셰인의 방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방 정리를 목적으로 몇 번 들어오고자 했지만, 그 때마다 그녀에게 들어와선 안 된다고 진중히 경고를 던져왔으니까.
'내 방은 정리하지 않아도 돼.'
'그럴 순 없습니다. 시종으로서…….'
'같이 이단연구 할 거 아니면 안 들어오는 게 좋을 거야.'
'…….'
비록 이 제국에서 이단이란 엄격히 금해지고 있지만, 현재 셰인에겐 로열 나이츠의 권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권한을 이용하면 외부와 공유하지 않는 걸 전제로, 주기적으로 성과를 황실에 공유하는 것을 통해 과정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지금 이 방에 가득 채워진 것은 그런 비호 아래에 쌓아간 연구자료들.
평생을 제국인으로 살아온 아드리아나에겐 생소하게 여겨지리라.
'점혈법……?'
그런 널브러진 자료 중 하나가 아드리아나의 눈에 버젓이 들어왔다.
사람의 신체를 표방한 그림에 찍혀있는 무수한 점, 그리고 그 안에 얽혀있는 무수한 선…….
"자세히 보지 마. 네가 그걸 이해하려는 순간 이단자로 찍힐 수도 있으니까."
셰인이 중재를 가하자 흠칫 몸을 움츠리는 아드리아나.
하지만 이제 와서 놀라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 출입을 금지시켰던 방이었으니까.
"저, 왜 이 방에 저를……."
"나도 알아."
그저 자신의 무력함을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이렇게 혼자 연구해도, 결국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무기력한 목소리.
당당하게 위법자들을 처단할 때의 모습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드리아나가 그 소리를 뒤로하며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깔려 있는 수백, 수 천 장의 종이.
그중 대부분은 중간까지 쓰이지도 못하고 찢어지거나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많은 실패가 있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는 부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료를 써내려간 흔적이 책상을 중심으로 벽으로 퍼져, 이내 그 일면을 뒤덮기에 이르렀다.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역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연구에 진심이라는 것 하나만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할 일이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일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저 벽만을 보고 미친 듯이 휘갈기기만 하는 건 비참하기 그지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당장을 두고 보았을 때의 일일 뿐.
"아직은 공유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니까."
"무슨……."
이윽고 셰인이 널브러진 종이 중 한 장을 제 손에 들어올렸다.
저택으로 복귀할 때면 잠도 씹어가며 행한 연구들. 그 끝에 완성된 것은 한 장의 종이에 적어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간략한 것이었다.
"이 지식들. 제국에 전파하는 걸 골드리안이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자료라도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이 제국에 만연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뒷배가.
"그건,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겠지."
당초 몇 달 동안 이 영지에 머무르는 놈들을 제 손으로 처벌하지 않았던가.
비밀리에 유통되는 약물, 유전변형을 필두로 한 키메라, 화학 테러…….
그런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날수록, 가주의 입장에선 도리어 그를 유발한 문화와 척을 질 것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장의 이야기일 뿐.
제국의 경제를 책임질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자가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분명 제 목적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기도 쉬워질 것이다.
"그래도 황실이라는 뒷배를 쥐어보고 느꼈던 거야. 정치에 관심도 없고, 할 줄 모르는 놈이라 해도……. 그런 놈들이 등에 지고 있는 강력한 뒷배라는 건, 언제나 정치를 잘하는 놈들이었다는 거."
셰인이 제 품에서부터 금색의 패를 꺼내들었다.
로열 나이츠.
제국에서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인정한 결과물.
비록 주는 권한이라곤 해결 과정에서 발생한 위법행위의 면죄부뿐이지만, 그 권한만 하더라도 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문제는 그런 해결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라는 거다.'
부정을 저질렀다곤 하나, 셰인이 잡은 이들은 대개 권위를 갖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구속되었을 때 그 뒤를 이을 자를 찾거나, 혹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손해란 엄연히 골드리안이 감내해야 할 일.
하지만 그렇게 넘기는 건 어디까지나 가문과 연을 맺은 권위자들이지, 셰인과 같은 가문 내에 속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제발 가만히 있어라. 네 손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가주된 자가 그 정도의 결정까지 하게 만들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건 십중팔구 셰인과 마찬가지로, 이 가문의 피를 잇거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자가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파고들지 않고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 그것을 묻고자 하였다…… 라는 건가.'
아직은 의혹일 뿐이지만 결코 가벼이 흘려 넘겨선 안 될 일이다.
권력이 필요하니까.
이 제국에 만연한 풍조의 흐름을 바꿔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그런 원대한 이상에 비하면 골드리안조차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그 시작점이라면 분명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번 사태를 가벼이 흘려 넘겨선 안 될 이유다.'
어디까지나 이유 중 하나.
그 점을 직시한 셰인이, 제 손에 쥔 패를 차차 아드리아나에게로 뻗어갔다.
"……아드리아나."
로열나이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난 이제부터 골드리안의 더러운 면을 파헤칠 거야."
골드리안보다도 높은.
황실을 뒤에 진 남자가 자신에게 패를 내밀며 그렇게 선언한 것이다.
그 말에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아드리아나조차 몸을 떨며 셰인을 쏘아보았다.
"역시 로열나이츠로서……."
"아니, 엄연히 골드리안의 일원으로서."
금패를 쥔 손에서 차차 힘이 풀려간다.
"이 권한을 쓰면……. 형님이 말한 대로 전쟁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니까."
자신이 필요로 하는 가문이 전란의 중심이 되지 않길 바란다.
그나마 고향땅에 돌아온 감상을 느끼게 만들어준 이 땅이 더럽혀지지 않길 바란다.
이런 자신이라도 거두어준 허울뿐인 형제에게 감사를 느낀다.
가족애라고는 모르던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준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온존하며 지금 사태의 진상을…….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문의 어둠을 밝히고 싶다.
"그걸 위해선 나 역시 골드리안의 사람이 돼서 그 규율을 따를 필요가 있겠지."
그 과정에 황실의 권한이란 오히려 독으로써 다가올 수도 있는 것.
그러니 셰인은 적어도, 자신의 의구심이 해소되는 때까진 이 권한을 봉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니 당분간, 나를 통제하는 역할은 너에게 맡기도록 할게."
그리고 이 권한을 다시 사용할 순간을 정하는 건 자신이 아닌 그녀가 될 것이다.
이 몸에 흐르는 피를 빌려 가문의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 가문에 오래토록 봉사해온 그녀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할 수 있겠어?"
고작 몇 달의 시간.
아직 신뢰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셰인은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주기를 바랐다.
진정 그녀가 조모의 장례를 뒤로하고 자신에게 돌아온 이유가, 그저 공무에 충실해서 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으면 한다.
이런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족에 얽힌 문제의 진상을 파헤치길 바라고 있다고.
"……그 또한 저의 역할이라면 기꺼이."
이내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숙이고 셰인에게서 금패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저 제 업무에 충실해서인지, 개인적인 이유가 섞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당장은 이걸로 충분하다.
셰인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굳게 믿으며, 제 방을 벗어나 그 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 * *
영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묘.
그곳은 역대 가문의 일원들이 묻히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들을 보필했던 이들 역시 묻힐 것이 허락되는 장소이다.
얼마 전 화장을 한 전 시녀장 역시 이곳에 묻히는 게 된 상태.
그 유골함이 위치한 곳은, 다름 아닌 전대 가주가 있던 곳이었다.
"그녀를 애도하고자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함을 내려다보는 여인이 기도를 마쳤을 무렵, 그 옆을 지키는 호위가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였다.
골드리안의 노기사 빌헬름.
그에게 있어서도 아리엣은 감사해 마지않을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변경과 황실, 그 외에 무릇 많은 장소에서 검을 휘둘러온 그에게 있어, 가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개의치 않으셔도 돼요. 골드리안의 안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공교롭게도 테올린은 가주로서 많은 책임을 짊어진 몸.
장례를 지시할지언정, 직접 찾아오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 그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아내 된 자의 일임은 납득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녀 역시 제대로 몸을 움직일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네, 그럼 부축을 부탁드릴게요, 빌헬름."
곧 여인이 빌헬름의 손을 붙잡고 영묘의 출구로 나아갔다.
마치 유리세공품을 옮기듯 신중하게.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 끝에 좁은 출구의 입구에 들어섰을 무렵, 문득 빌헬름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도련님?"
셰인 골드리안.
그가 영묘의 입구에서 빌헬름과 그 손에 잡혀 있는 이를 마주하고 있다.
여인이 그를 알아보며 제 입가에 손을 올렸다.
"어머나, 셰인 도련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여전히 환한 미소다.
그것도 보는 이를 사로잡을 만한 마력을 갖춘 여자.
"아리엣을 보러 오신 거라면 길을 비켜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가 셰인에게 길을 비켜주고자 제 다리를 움직였다.
상당히 위태로운 움직임.
그 밑의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셰인이,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 균형을 유지해주었다.
"몸도 편찮으신데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삭에 달해있는 몸.
배에 곧 태어날 생명을 품고 있는 만큼,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런 몸으로 저택에서 떨어진 이곳까지 오는 것도 탐탁치 않은 상태.
덕분에 그녀를 찾는 데에도 시간이 할애되고 말았다.
"그리고, 제가 용무가 있는 건 아리엣이 아닌 안주인님이십니다."
"……저, 말씀인가요?"
"네, 잠시 저에게 시간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엘레오노라 골드리안.
테올린의 정실부인이자, 영주로서의 일에 충실한 그를 대신해 가문의 내부를 책임지는 안주인.
'즉, 이자가 현 골드리안 가문의 실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