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63화
엘레오노라 골드리안.
셰인이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현재 테올린과 맺어진 6명의 아내 중 당당히 정실의 자리를 차지했단 점이었다.
그리고 귀족 사회에서 혼약이란 정치의 수단 중 하나.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제국의 특성상, 아내가 많은 가문일수록 정치적인 분쟁 역시 결코 적지 않다.
그런 곳에서 정실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수완가라는 의미일 테지만…….
* * *
"후후훗~"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시네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의 귀갓길을 나아가는 가운데, 셰인이 마주 앉은 엘레오노라에게 조심히 곤혹을 흘려보내었다.
엘레오노라가 제 입가에 손을 올려 미소를 감추었다.
"미안해요, 도련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져서 그만……."
"네?"
"그야 보면 볼수록 테올린의 젊었을 때가 떠오르니까요."
확실히 자신이 테올린과 비슷한 얼굴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닮은 것일까?
갓 20대에 들어선 자신에게서 향수가 느껴질 정도로?
"그래요. 테올린도 이렇게 풋풋하던 때가 있었죠. 당시에도 꽤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고……."
딱딱하기론 목석보다 더한 사내가 수줍음이라니.
그에 의문이 들었지만, 엘레오노라는 얼굴까지 붉히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었다.
"테올린이 그렇게 보여도 주변을 무척이나 많이 신경 쓰거든요. 처음 만난 건 무도회장에서였는데, 그때 제가 춤을 추자고 말을 했을 때도 팔짱을 낀 채로 엄청 딱딱하게 서 있었어요. 마침 저도 춤을 제안하시는 분들에게 쫓기는 터라 마음이 석연치 않았는데, 그때 테라스에 홀로 서 있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손을 뻗게 되었죠."
"아, 네. 그렇, 군요……."
"그때만 해도 저희가 서로 맺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저도 그때부터 테올린이 눈에 들기는 했지만, 저에게나 테올린에게나 구혼을 하시는 매력적인 분들이 많아서…… 아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저희는 그런 면에서 끌렸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하하."
수다스러운 분위기에 애매히 웃음을 짓는 셰인.
비록 대부분은 흘려들었지만, 제 형과의 관계가 좋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금실이 좋은 부부로군.'
테올린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택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여러모로 좋은 평가가 이어졌었다.
어쩌면 자기 자식한텐 팔불출 같은 면을 보일지도 모르지.
'그 가문바라기 녀석이 정말로 그럴지는 모르겠다만.'
힐끗.
셰인의 시선이 엘레오노라의 배 쪽으로 향해졌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부풀어 올라 있는 배로.
"신경 쓰이시나요?"
수다 중에 시선을 느낀 것일까?
어느 순간 엘레오노라가 제 배에 손을 얹으며, 셰인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괜스레 긴장을 느낀 셰인이 조심히 말했다.
"이제 곧 셋째가 태어나는 거군요."
"네, 머지않았네요."
배를 쓰다듬는 엘레오노라의 얼굴에 애틋함이 깃들었다.
그 얼굴에 그려진 건 분명 모성애라 부를 것이겠지.
아이란 몇 명이 생기더라도 그런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이번이 셋째라고 들었는데, 나머지 두 분께선 영지 밖에 있는 건가요?"
"후계자 수업을 영지에서만 할 순 없으니까요. 보다 넓은 세상을 돌아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아이들?"
"테올린의 아이는 저만 품는 게 아니니까요."
나머지 첩실들의 자식들.
흔히 '서자'라 불리는 이들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정실인 자가 서자를 챙겨주다니.
'내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로군.'
공교롭게도 셰인은 전대 가주의 아내를 마주해 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나중에 굴러들어 온 돌이자,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로 여겨질 테니까.
'그런 정실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 첩실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 첩실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수완이라고 봐야 하나?'
그래, 엘레오노라는 첩실들과 굉장히 사이가 좋은 편이다.
같은 저택에 살며 주기적으로 다과회를 열어 대화의 장을 열거나, 함께 욕탕에서 몸을 맡기며 씻고 서로의 가문에 직접 방문하는 등…….
보통의 가문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을 그녀가 직접 주도할 정도니까.
'괜히 서자들을 포함해 자식을 열 넘게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거겠지.'
보통의 정실이라면 서자 하나가 생기는 것도 견제하게 마련이거늘.
그럼에도 그에 대한 화제를 거론하는 현재, 제 배를 쓰다듬는 그녀의 얼굴엔 애틋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이는 워낙에 바쁘니까요. 그래서 가끔 저택에 돌아올 땐 모두 아쉽지 않도록 그와 시간을 보내는 걸 허락하고 있어요."
"다른 분들에게도…… 말입니까?"
"모두가 테올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저 혼자만 독차지할 순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끔은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모두가 같이 하룻밤을 보낼 때도 있어요."
"……네? 모두?"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었을 때가 10개월쯤 전이었겠네요. 그때 네 명이 모두 뻗은 마당에 저 혼자만 겨우 남아서 테올린의 상대를 했었는데, 정신을 놓고 보니 벌써 다음 날이 되었더라니까요?"
"아, 네, 그렇군요……."
"그때 막 눈을 떠보니 옆에서 테올린이 팔베개를 하며 '일어났나?'라고 무뚝뚝하게 속삭였는데, 그때 또 열이 올라서 홧김에 덮쳐 버렸는데~"
'그러고 보면 비뇨기도 외과 분야였나.'
설마 여기까지 와서 셋째의 탄생 비화를 듣게 되다니.
그녀를 직접 만나러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한 고민이었다.
* * *
-도련님께선, 혹시 안주인님을 의심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택의 탐문을 마친 후.
엘레오노라를 만나러 간다 하였을 당시 아드리아나가 토로했던 걱정이었다.
-의심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그때 정원에서 본 게 고작인데.
-그럼 왜 안주인님을 찾아뵈려는 것이죠?
아마 자신보다 그녀를 더 걱정하기에 그런 거겠지.
서자와 안주인의 취급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냥 탐문의 연장선이지. 현 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게 그 사람이니까.
저택의 사용인들은 물론 첩실들조차 넓은 아량으로 품어주는 여인이다.
그만한 인망을 갖춘 만큼 저택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도 해박할 터.
-이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지만, 범인으로 이어질 정보를 쥐었을 가능성은 높다.
아리에타 실피어스.
그녀와 얽힌 죽음이 가문과 연관된 인물로 한정되었다는 건, 테올린의 반응을 보는 것을 통해 거의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셰인이 개인적으로 생각해 둔 용의자의 분류는 총 셋.
'첫 번째는 저택의 사용인……. 골드리안에는 아드리아나가 속한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문에 오래도록 봉사해 온 이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류다.
사용인이라면 노동 중 상급자에게 앙금을 품는 경우가 많고, 아리엣은 위계질서를 위해서라지만 하급자들을 엄하게 다스려 왔으니까.
'하지만 사용인이라면 아무리 오래 봉사를 했다 해도, 충신 정도의 위치밖에 되지 않을 거다.'
테올린은 이번 사태에 자신이 나서면 전쟁마저 각오하겠다 했지만, 셰인이 아는 테올린은 가문의 위상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자다.
그런 자가 고작 가신 한 명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단 말까지 입에 담겠는가?
'둘째는 가문의 다른 형제들이지만…… 이쪽은 가능성이 낮겠지.'
애초에 가문의 후계자는 셰인이 있었을 적부터 테올린으로 점쳐지는 상태였다.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른 후엔 각기 제 갈 길을 간 상태.
테올린 역시 그들에게 심심치 않은 지원을 해주었으니, 굳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가문에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런 예상을 깨고 들어왔다 한들, 타지에 있는 그들을 당장 조사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당장 관심을 가져야 할 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다.
"아, 혹시 다른 첩실분들과 얘기는 나눠보셨나요?"
첩실.
그들이라면 전대 시녀장인 아리에타와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을 테니, 그와 접촉할 만한 명분은 분명 존재한다.
직접 독살을 하진 않았어도 사람을 시켜 사주했을지도 모를 일.
"아뇨, 공교롭게도 지금까진 기회가 없었던지라……."
"저런, 그러면 안 되죠. 엄연히 가족이라 부를 사이인데."
서자에 첩실…….
그럼에도 정실인 그녀는 그 모두를 가족이라 부르고 있었다.
10년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그녀의 존재는 제 아버지만큼이나 크게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혹시 괜찮으면 다과회에 참석해 보시겠어요? 분명 네 사람 모두 좋아해 주실 거예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자리에 썩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지라.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지도 모르니 사양하겠습니다."
"부담이 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다음 기회를 노려보는 수밖에……."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니, 엘레오노라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고 스윽 손으로 쓰다듬었다.
손의 떨림은 태동에 의한 것일까?
그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무렵, 셰인은 그녀가 이전에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네 사람.'
다과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자신을 제외하면 네 명이라고.
하지만 셰인이 알고 있기로, 테올린의 아내는 총 '6명'으로, 정실인 엘레오노라를 제외한 첩실은 총 5명이다.
그런 마당에 다른 첩실들과 화기애애한 그녀가 한 명을 배제하며 말하다니.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
"……안주인님."
슬슬 본제로 들어갈 때다.
셰인이 분위기를 다잡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안주인님을 급히 찾아온 이유는, 안주인님에게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후~ 도련님이 물으시는 거라면야 뭐든 답해 드려야죠."
여전히 호의적인 미소.
하지만 이다음으로 이어질 말은 어떨까?
"그레이스 골드리안."
"……."
"……그분에 대해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끼기긱.
마차의 바퀴가 멈추는 소리.
안에 들어 있는 산모를 배려하듯 그 움직임은 굉장히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후 마부 역을 수행하던 빌헬름이 노쇠한 몸을 이끌고, 마차의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마주하였다.
"안주인님, 저택에 도착했으니 이만……."
두 사람을 배웅해 주려는 것도 잠시.
곧 마차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빌헬름의 숨이 덜컥 막혀 버렸다.
지금의 엘레오노라를 본다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녀에 대해선 어디에서 들으신 거죠?"
그레이스 골드리안.
현 가문에 속한 모두가 대답을 회피한 인물을 거론한 순간, 이제껏 즐겁게 얘기하던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져 있었다.
'제대로 찾았군.'
마냥 좋게 볼 일은 아니었다.
이 확신을 가지는 대가로, 가문의 실세가 자신을 견제할 위험이 생긴 셈이니까.
* * *
-그레이스 님, 말씀입니까?
탐문을 하는 중 거론되었던 하나의 이름.
그 이름을 거론하자, 아드리아나 역시 다른 사용인들과 마찬가지로 꺼림칙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그래, 저택의 사용인들에게서 그녀에 대해 얻은 정보가 이상할 정도로 적었거든.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싶어서.
-…….
-……역시 너도 없구나.
-네, 이제까지 마주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마주해 본 적도 없다니.
아무리 마지막으로 받아들인 첩실이라도 너무 베일에 싸인 것이 아닌가?
-그분께서 저택에 들어오신 건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테올린 님께선 가세가 기울어진 가문에서부터 그녀를 초청하고, 이후 정식으로 첩으로 받아들이시게 되었죠.
-가세가 기울어졌다면 그거지? 흔히 몰락 귀족이라는 거.
최고의 재벌가가 몰락 귀족의 자제에게 투자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아드리아나는 그 부분에 대해선 별로 괘념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거겠죠. 가주님께선 절대로 의미 없는 투자는 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귀족 간의 관계라는 건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인 부분이 엮일 수밖에 없다.
가문을 중시하는 테올린이 새로이 첩을 들였다면, 그 또한 가문을 위한 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진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님께선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분들을 마주하지 않고, 홀로 별채에 틀어박혀 계시는 상태입니다. 이제까지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고요.
-……단 한 번도?
-네, 테올린 님께선 그녀에게도 이유가 있을 거라 하시며, 그녀가 스스로 방에서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엘레오노라 님에게 그녀를 부탁한다 말씀하셨고…….
가주가 영지를 다스리면 안주인은 가문을 보살핀다.
그렇기에 테올린은, 가문으로 들어온 후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첩실을 제 아내에게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즉, 현재 단계에서 그레이스와 안면을 튼 건 엘레오노라가 유일하다는 것.
-아니, 한 사람 더 있군요.
그렇게 단정을 지으려던 때.
아드리아나가 그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견을 내주었다.
-한 사람이 더 있다니, 누구를 말하는 거야?
-할머니께서 저에게 시녀장을 맡기신 후, 안주인님의 지시를 따라 잠시 그레이스 님이 계셨던 별채의 관리를 맡으셨습니다. 그마저도 건강이 악화되어 자택으로 돌아가신 거고…….
가문에서 가장 베일에 싸인 인물과 피해자와의 연결고리가 생겼다.
범인이란 확신은 없어도 가능성은 확보된 상황.
"……요컨대, 저 수상쩍은 사람의 비밀은 직접 파헤쳐 보는 수밖에 없다는 거겠지."
늦은 밤.
영지 뒤뜰의 숲을 지나 별채에 도착한 셰인이, 숲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로 상황을 살펴보았다.
저택에서 동떨어진 장소임에도 엄중한 호위가 자리한 장소를.